성폭력 판례를 바꾸자

성폭력 판례를 바꾸자

일다 | 기사입력 2007-09-11 08:45

사례1. A씨는 노래방 도우미로, 사건이 일어난 당일 노래방 운영주인 B씨와 그 일행의 유흥을 돋구는 일을 했다. 일행이 돌아가고 나서 1시간 더 연장하자는 B씨의 요청에 따라 노래방에 있다가 강간을 당했다. A씨는 울면서 하지 말라고 소리질렀지만 B씨는 A씨를 강간하고 7일간의 치료를 요하는 외음부찰과상, 외음부습진 등의 상해를 가했다.

이 사건에 대해 2005년 1심과 2심 재판부는 A씨가 “적극적으로 반항한 흔적과 구조 요청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을 이유로, B씨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사례2. 초등학교 4학년 담임교사인 남성 D씨는 자신의 반 남학생 C군에 대해 2004년 3월~5월까지 4차례 성기를 만지는 등 추행을 했다. 1심과 2심, 그리고 대법원에서 재판부는 D씨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행위가 아니라, 미성년자에 대한 강제추행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D씨가 선고 받은 형량은 “학교 선생님”이라는 점 등이 참작돼 “벌금 500만원”에 불과하다.

편협한 성폭력 판례들 ‘이제는 바꿔야 한다’

위 사례는 한국성폭력상담소(이하 상담소)가 제시한 성폭력 사건 판례들이다. 상담소는 성폭력 사건에 대해 우리 사법부가 편파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비판하며, 공판 과정을 모니터링하고 결과를 발표하는 등 지난 1년간 ‘판례 바꾸기 운동’을 펼쳐왔다. 지난 8일에는 한국젠더법학회와 함께 사법부 판례의 문제점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 성폭력특별법 8조 항거불능 요건에 대해 법원이 엄격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가해자가 폭행과 협박을 통해서 피해자를 저항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판단될 때 강간죄를 인정하는 ‘최협의설’에 대한 것이다.

법원의 판례들을 보면, 피해자가 성관계에 동의했는가 여부보다는 얼마나 저항했는가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어, 결국 성폭력 피해자에게 비현실적인 저항과 목숨을 건 저항을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토론회 참가자들은 사법부가 성폭력 범죄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기존의 관행을 바꾸어야 하며, 피해자의 관점과 경험을 고려해 판례를 바꾸어가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유발하지 않았냐” 피해자를 되려 비난

이미경 상담소 소장은 2005년에 성폭력 사건이 1만3천446건 신고됐지만 기소된 사건은 40~50%에 지나지 않는다고 밝히고, 특히 많은 성폭력 생존자들이 수사 과정과 재판 과정에서 “(성폭력을) 유발하지 않았나”, 심지어 “즐기지 않았나” 하는 의심과 비난을 받아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이경환 군법무관도 성폭력 판례를 통해 경찰과 법조계의 편견을 지적했다. 경찰과 법원이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가 룸살롱 호스티스인지, 늦은 시간에 가해자와 함께 있었는지, 사건 이후 행동이 어땠는지 등 강간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정황들을 토대로 강간죄 성립 여부를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피해자가 성매매 경험이 있거나 연애에 있어서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경우, 성격이 활달해 전형적인 피해자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 변호인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불리하지 않게 하기 위해 부수적인 거짓말을 했을 경우, 또는 유무죄 여부가 애매한 상황에서 합의를 통해 사건이 종결된 경우, 소위 “꽃뱀”으로 몰린다고 지적했다.

기소하지 못하는 강간 사건들

토론회에서는 아내강간죄가 전면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공소시효를 없애거나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현재 아내강간은 별거 중이거나 이혼소송 중인 경우, 상습적이거나 흉기를 사용했을 경우에 한해서만 인정되고 있다. 또한 강간 등에 관한 현행 공소시효는 7년인데, 상담사례 중에는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이 10%에 이른다고 한다.

한편, 이경환 군법무관은 아동성폭력 사건에서 불거지는 피해아동의 진술 신빙성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에 따르면 아동이 성폭력 피해를 당한 시점이 증언을 하는 시점보다 훨씬 전이거나, 부모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피해를 드러낼 때, 아동의 진술이 일관적이지 않으면 증언의 신빙성을 인정 받지 못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이 법무관은 피해아동의 증언의 신빙성을 의심하기에 앞서, 아이에게 권위적인 태도로 질문을 하거나 반복해서 진술을 요구하는 등 조사 환경이나 질문 방식에 있어서의 문제점들을 먼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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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조이승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