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매매 탈출 20대 여성 수기] “이젠 내 명함 갖게 됐어요”

[성매매 탈출 20대 여성 수기] “이젠 내 명함 갖게 됐어요”

[국민일보 2005-09-21 21:14]

“창업 준비중입니다. 음식점을 하려고요. 맛으로 승부할 겁니다.”

요즘 사람들을 만나면 이렇게 말한다. 8월 중순부터 한달 동안 여의도역 영등포역에서 직접 만든 김밥을 팔았는데 반응이 좋아 자신감을 얻었다. 지난해 1년 동안 한남직업전문학교 조리과정을 다니면서 한식 일식 양식 조리사 자격증도 땄고,3000만원을 대출받기로 돼 있어 가게 자리를 보러 다니는 중이다.

김밥 몇 줄 팔아본 게 음식 장사 경험의 전부이고,자본도 적은데 뭐 그리 대수인가 하겠지만 내게는 특별하다. 그 동안은 늘 가명을 썼고,내가 무엇을 한다고 밝힐 수 없었다. 드디어 내 명함을 갖게 됐다. 꿈만 같다.

지금은 떠올리기도 싫지만,2년 전까지만 해도 룸살롱에서 일하며 ‘2차’를 나가는 아가씨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웃고 떠드는 여학생들을 보면 슬그머니 눈을 돌린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그때 왜 그랬을까.’ 이런 후회가 밀려오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불화로 세살 때 언니와 함께 전남 보성에서 할머니 손에 자랐다. 중3 때 운동을 한다고 하자 어른들이 반대했다. 철 없던 때라 서운한 마음에 가출,친구가 있는 부산으로 갔다. 친구는 만나지 못했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월급까지 준다’는 전단지에 나온 곳을 찾아갔다. ‘포푸라마치’로 불리는 집창촌이었다.

열여섯 살,아직 소녀티가 남아있던 나는 그렇게 성매매의 질곡에 빠져들었다. 채 자라지도 않은 몸으로 손님을 상대하다 보니 골반에 염증이 생겨 쓰러져 정신을 잃기도 했고,임신중절수술까지 했다. 견디다 못해 도망쳐 나왔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여수로 와서 룸살롱에서 2차를 나가는 생활을 했다.

사람들은 우리가 돈을 쉽게 벌어 흥청망청 쓴다지만 모르는 소리다. 온몸이 쑤시고 속도 엉망이다. 또 집창촌보다는 낫겠지만 룸살롱도 돈 모으기는 어렵다. 값비싼 옷을 입으라고 강요하고,이런 저런 명목으로 떼어가는 돈이 적지 않다.

매일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술을 마시고,어떤 날은 하루에 3번씩 2차를 나갔지만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4000여만원이 됐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2003년 10월,정말 더는 못견디겠다는 생각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성부(지금은 여성가족부)를 컴퓨터에서 찾았다. 여성부에선 한소리회를 알려줬고,그곳의 도움으로 빠져나왔다. 이곳에 와서 보니 나는 그래도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집창촌에서 도망쳤다 죽지 않을 만큼 매를 맞은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다가도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되돌아가는 아이들도 있다. 나도 이곳에 와서 첫 한달은 견디기 쉽지 않았지만 이를 악다물었다.

요즘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어떻게든 성공해 친구들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겁다. 그러면서도 가끔 혼자 웃는다. 어렸을 때 할머니가 밥상 차리기 귀찮다고 하시면 “나중에 내가 크면 요리사 돼서 할머니 밥해줄게” 했었다. 제2의 삶을 살면서 정말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 꿈을 펼치게 됐으니 정말 꿈만 같다. 지난 10년간 들을 수 없었던,부모가 지어준 내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너무나 좋다.

식당을 하게 되면 한 달에 한 번은 무숙자들에게 식사대접을 하고,수입의 한몫을 떼서 은성원에서 새 삶을 준비하고 있는 친구들도 도울 생각이다.

아직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친구들에게 꼭 말하고 싶다. 일단 그곳에서 나와 새로운 삶에 도전해 보라고.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계속 남아있을 때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해본다면 답은 하나다. 하루빨리 그곳에서 나오는 것이다.

정리=김혜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