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많이 버는 속옷모델 시켜준다더니 ‘성매매 강요’

돈 많이 버는 속옷모델 시켜준다더니 ‘성매매 강요’
한겨레|기사입력 2007-11-16 08:38 |최종수정2007-11-16 09:58

[한겨레]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다. 고향에 있는 가족들이 알게 될까봐 두렵고, 한국에서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 뿐이다.”

서울 광진구 구의동 ‘외국인 성매매여성 쉼터’에서 만난 콜롬비아 여성 베아트리스(21·가명)는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지난 9월 입국해 성매매를 강요당하며 살아온 그에게 한국 생활은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인 듯했다. 베아트리스와 함께 입국해 생활해온 20~30대 여성 3명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콜롬비아 현지에서 한국인 브로커 박아무개(38)씨로부터 ‘한국에서 속옷 모델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한국을 찾게 됐다. 지난 8일부터 이들을 보호해온 외국인 성매매여성 쉼터의 버지니아 수녀는 “박씨가 처음에는 깨끗한 숙소와 좋은 음식을 주며 인터넷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해줬는데, 며칠 만에 갑자기 돌변해 서울 강남의 술집으로 데려가 성매매를 강요했고 ‘살이 찌면 안된다’며 하루 한 끼 식사만 줬다고 한다”고 전했다.

실제 베아트리스와 동료들은 지난 9월21일부터 서울 한남동 한 연립주택에서 공동 생활을 하며 밤에 박씨 부부와 함께 룸살롱으로 출근해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해야 했다. 하룻밤에 25만~30만원씩을 받고 여러 한국인 남성과 성관계를 맺었지만, 이들이 손에 쥐는 돈은 5만원에 지나지 않았다. 이 돈조차도 ‘비행기 삯과 생활비 등 빚을 갚아야 한다’는 박씨의 등쌀에 마음대로 쓸 수 없었다.

이들이 지옥같은 생활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된 계기는 베아트리스의 임신이었다.

“임신 소식에 박씨는 ‘낙태 수술을 받고 계속 일하거나 비행기 삯과 생활비 등 빚 4천달러를 갚으라’고 강요했답니다. 넷이 상의해 아이를 낙태할 수는 없다고 결론내리고 베아트리스는 일을 나갈 수 없다고 완강히 버텼답니다. 박씨 부부와 나머지 여성들이 술집에 간 사이 집을 빠져나온 베아트리스가 경찰에 신고해 구출될 수 있었습니다.”

버지니아 수녀는 “결과적으로 베아트리스의 태아가 이들을 살린 셈”이라며 “베아트리스는 임신 사실을 콜롬비아에 있는 남자 친구에게 알리고 상의한 끝에 콜롬비아에서 아이를 낳고 함께 살기로 했다”고 말했다.

쉼터로 온 뒤 산부인과 진료를 받은 이들은 모두 성병에 감염된 것으로 나타났다. 버지니아 수녀는 “베아트리스는 임신한 상태여서 걱정이 많은데, 한국에서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어 치료도 콜롬비아에서 받겠다고 한다”며 “모두들 ‘매일 저녁 귀신을 본다’, ‘자려고 누우면 창문에 남자가 서 있다’, ‘밤에 무서워서 잠을 잘 수 없다’고 하더니 심지어 한국 음식도 싫다고 해 그동안 콜라와 빵만 먹어 몸이 많이 상했다”고 말했다. 그는 “쉼터에서 며칠 보내며 안정을 찾은 뒤 ‘피해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냐’고 묻길래 ‘민사 재판을 하려면 한국에 더 머물러야 한다’고 말해줬더니, ‘차라리 돌아가겠다’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서울 용산경찰서는 16일 박씨와 박씨 부인 장아무개(34)씨를 영리를 위한 한 약취·유인 등 혐의로 구속하고, 공범인 양아무개(32)씨 부부를 수배했다고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박씨 부부가 피해자들과 함께 동거하면서 이들이 출·퇴근할 때 운전을 하는 등 전반적인 관리를 해왔다”며 “초기에는 피해 여성들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합숙 생활을 하며 감시, 감금, 폭행하다가 나중에는 비행기 삯 등 빚을 빌미로 성매매를 강요해 한달 평균 5천만원 가량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강남 룸살롱에는 세계 각지의 여성들이 다 있다. 주류는 베트남, 필리핀 여성에서 러시아 여성으로 추세가 변했다가 러시아 여성들의 몸값이 올라가자 남미 여성들로 바뀌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경찰은 박씨 등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다른 남미 여성이 있는지와 베아트리스 등이 일한 룸살롱의 성매매 알선 혐의에 대해 조사 중이다.

이날 오후 베아트리스와 동료들은 인천공항에서 고향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버지니아 수녀는 “베아트리스를 제외한 나머지 세명 가운데에는 주부와 교사도 포함돼 있는데, 모두 가족들에게 한국에서 겪은 일들을 숨기고 있다”며 “사실 송탄과 동두천 미군기지 주변에서 성매매를 하는 필리핀 여성의 처지가 더욱 열악한데, 이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이라고 말했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