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매매, 생존권 투쟁?

[정희진] 성매매, 생존권 투쟁?
한겨레, 04-10-23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은 (‘창녀’가 아니라) 포주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나쁜 남자〉는, 남성의 분노와 ‘사랑’(폭력)은 모든 여성을 ‘매춘’여성으로 만들 수 있는 권력임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주장을 함축적으로 제시한다. 남녀 주인공이 트럭을 타고 다니며 성매매를 한다. ‘일’은 여성이 하는데, ‘손님’은 남자에게 돈을 치른다. ‘원조 교제’(청소녀 성매수)부터 기지촌 성산업에 이르기까지, 성매매의 형태는 너무나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따라서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대개의 성산업에서 여성은 몸을 파는 것이 아니라 팔리는 상품이다. 성산업이 왜 ‘여자 장사’라고 불리겠는가?

성매매는 도덕이나 쾌락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오래되고 집요한 남성 중심 정치권력의 실체를 드러내는 사안이다. 만일, 여성의 성이 판매된 시간과 그 수치만큼 남성이 여성을 상대로 몸을 판다면, ‘매춘’이 가난과 상관없이 백인 중산층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도 ‘자유로이 선택’하는 직업이라면, 연쇄 살인사건의 주된 희생자들이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이 아니라면, (성을 파는 여성이 아니라) 성을 사는 남성을 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런 존재로 규정한다면…. 이런 상황 이후에야, 성매매는 성별 권력 관계와 관련 없는 문제가 된다. 그전까지, 성매매의 본질은 성 상품화도 아니고, 성 보수주의와 성 자유주의의 대립도 아니다. 성매매는 가장 일상화된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일 뿐이다.

성매매특별법 시행 이후, 업주와 여성들의 ‘생존권’ 데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특히, 남성들의 질문은 이 법을 지지하는 나의 정치적 입장이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생존권을 위협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성매매가 ‘직업’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여성의 ‘자발적 선택’이라는 것과 (남성은 그렇지 않지만) 여성에게 성 판매는 사회적 노동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성매매의 폐해는 매매 행위 자체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본인의 선택 여부와는 별개의 문제다. 또한,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에게 ‘인간의 선택’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부여한 적이 없? 그리고 언제부터 한국 사회가 그토록 여성의 생계에 관심이 많았는지 묻고 싶다. 여성의 노동권 보장을 바란다면, 성매매를 허용할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의 성차별 근절 노력이 훨씬 효과적인 대책이다.

성매매 반대가 그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매매 제도의 문제는, 직접적으로 종사하는 여성들은 물론, 그렇지 않은 모든 여성들과 모든 남성들의 삶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성매매와 성폭력이 불가피하다는 편견은, 남성의 성은 억제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근거한다. 남성의 성이 인간의 성을 의미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존재와 인격은 신체로 환원되고, 여성의 외모와 성은 ‘자원’이 된다. 이런 사회는 여성의 지식과 기술보다는, 여성의 몸을 원한다. 이때 여성의 가치는 몸의 상태(‘젊고, 예쁘고, 마른’)에 의해 정해지게 된다. 남성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자원이자 여성 억압의 근원이다.

“18살에서 30살까지 성인 남성들이 무려 12년 동안이나 성관계를 가질 기회가 없어졌다”고 말한 한나라당 김충환 의원은, 성을 사는 것이 마치 일상적 성생활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이 발언은 범법 행위일 뿐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모든 남성을 매춘(買春)남성으로 간주하고 있다. 성매매 근절이 어려운 이유는,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과 업주들의 ‘생존권’ 때문이 아니라, 남성의 성욕은 통제 불가능하다는 오래된 그리고 너무나 강력한 신념 때문이다. 남성의 성이 강력하다는 통념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다. 여성의 성을 사는 것은 남성의 권리가 아니라 남성의 자기 소외, 자기 분열이다. 성매매 근절은 남성의 인간화를 향한 남성의 과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