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게 진 빚을 갚아라

그들에게 진 빚을 갚아라

기지촌 할머니 ‘공동의 집’ 위해 뛰는 활동가들…실질적 도움 주기 위해선 관련 입법 필요

▣ 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할머니들이 집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공동의 집’을 만들어드리고 싶어요.” 2004년 여름부터 ‘기지촌 할머니를 위한 공동의 집’ 마련을 위한 모금운동을 진행해온 우순덕 햇살사회복지회 대표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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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을 따라다니며 평생을 보낸 할머니. 월세 10만원짜리 단칸방에 사는 할머니의 유일한 벗은 담배다.

햇살사회복지회는 2002년 6월 캠프 험프리 앞에 자리한 안정리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기지촌 할머니들과 함께 밥을 먹는 것을 시작으로 활동을 개시했다. 지금은 지역의 병원, 사회단체들과 손잡고 할머니들의 생활을 돕기 위한 여러 활동들을 펼치고 있다. 이불 빨래를 해주거나, 미용실에 데려가 머리를 공짜로 손질해주기도 하고, 이가 상한 할머니들은 치과 진료를 받게 한다. 방 안에만 틀어박혀 생활하는 할머니들을 위해 서울의 남산과 한강, 충청도 수덕사 등으로 나들이도 다녀왔다. 할머니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그 속에 드러난 심리를 파악해 상담도 진행한다.

모금운동 4년째 제자리

기지촌 여성들을 돌보는 단체는 그 밖에도 동두천과 평택 신장동에 자리잡은 새움터와 의정부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두레방 등이 있다. 새움터와 두레방 역시 할머니들의 집을 직접 찾아다니며 의료와 생활 상담을 진행한다.

활동가들은 기지촌 할머니 지원 활동이 민간 차원에서만 이뤄질 때 생기는 한계를 안타까워한다. 기지촌 할머니들이 호소하는 직접적인 어려움은 생계와 관련한 것이다. 병에 걸렸지만 치료비가 없고, 정부에서 매달 주는 기초생활보장비로는 대체로 방세, 공과금을 내고 나면 끝이다. 다쳐서 꼼짝을 못해도 병원에 함께 갈 가족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우순덕 대표는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공동의 집’ 마련을 위한 모금을 시작했지만 4년째 제자리다. 지자체에 직접적인 도움을 얻어볼까 싶어 평택시, 경기도 등에 건의했지만 “기지촌 여성을 지원할 수 있는 관련법이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공적인 차원에서 ‘기지촌 여성’을 지원하는 방식은 따로 없다. 기지촌 할머니는 수많은 독거노인들 가운데 한 명일 뿐이다. 안정리 할머니들 대부분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상 수급자로서 한 달에 15만~40만원 정도의 돈을 받는다. 특별한 직업이 없는 할머니들은 그 돈으로 한 달 생활을 꾸려간다. 김금숙 평택시 생활지원과 계장은 “평택에는 8700명의 독거노인이 있는데 안정리 기지촌 할머니들 역시 이 가운데 일부”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성매매 피해자로 확인된 여성들을 지원하기 위해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두고 있다. 그러나 기지촌 할머니들은 지원 대상이 아니다. 김민아 여성가족부 권익증진국 사무관은 “법은 현재 피해를 입고 있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기지촌 할머니들에게 적용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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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지촌 할머니’들은 매주 화요일 햇살사회복지회에 모여 함께 점심을 먹는다.

이 때문에 할머니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관련 입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장호철 경기도의회 의원(한나라당)은 “기지촌 여성들의 주거 안정을 위해 특별법을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장 의원은 “할머니들이 과거에는 국가의 편의에 의해 ‘달러벌이의 역군’으로 살면서 국가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큰데, 지금은 편하게 발 뻗고 잘 공간조차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관련법을 만들 때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이하 위안부 특별법)을 참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1993년 제정된 위안부 특별법에 따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되면 4300만원의 초기 지원금을 받는다. 매달 80만원씩 생활안정지원금도 나온다.

그러나 기지촌 여성을 일본군 위안부와 비교하며 별도의 지원법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직 사회적 합의를 얻지 못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일제 식민지 시대 정부가 없을 때 강제로 끌려갔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고, 역사의 피해자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기지촌 여성들은 ‘제 발로 들어갔다’ ‘당시 가난한 여성이 어디 한둘이었냐’는 등 비난과 멸시의 시선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미군 기지촌 할머니들이 마음 깊이 안고 있는 것은 이런 사회적 낙인에 대한 피해의식과 상처다.

성매매 피해여성 자활지원센터인 다시함께센터의 조진경 대표는 “여성의 몸을 국가가, 혹은 남성이 이용하도록 허용하는 사회적 구조가 성매매 여성을 낳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발과 비자발을 근거로 ‘피해’와 ‘보상’을 나누는 것은 모든 책임을 ‘개인’으로 돌리고 사회와 국가의 책임을 외면하는 것이다.

“국가가 미군에 철저히 협력했다”

1973년 한-미 군사위원회에서 한국 쪽 위원장으로 활동했던 김기조(76·정치외교학) 박사는 당시 국가가 미군에 철저히 협력해 여성을 관리했다고 증언한다. “당시 미국이 기지촌 여성들의 성병 관리 등을 요구했고 이 때문에 수십 차례 의정부, 동두천 등 미군기지 근처 클럽들을 답사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자금으로 직접 의정부에 기지촌 정화사업 비용으로 1억원을 내려보내기도 했다.” 김 박사는 “당연히 국가가 이 여성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국가가 여성의 몸을 이용해 경제발전을 꾀한 혐의도 짙은데 이제 와서 그때를 모른 척하는 것은, 필요할 때 쓰고 필요 없다고 버리는 천박한 역사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같은 일의 반복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들의 존재를 기억하고, 필요할 경우 사과하고 배상에 준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가 법을 제정하는 것은 공식적인 사죄의 의미, 또 ‘거대한 포주’로서의 국가의 혐의를 인정하는 것이어서, 그것만으로 할머니들에게 지워진 주홍글씨의 색깔을 조금이나마 지워낼 수 있는 방법이 된다. 서윤미 새움터 대표는 “기지촌 할머니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전환 없이, 제도만 바뀐다고 할머니들의 상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법 제정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인식의 전환을 위한 다양한 운동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는 “‘나눔의 집’이 처음 생길 때도, ‘일본군 위안부 관련 특별법’을 만들 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말한다. 기지촌 할머니들의 질곡의 삶은 개인의 선택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논의, 역사가 만든 피해자임을 인정하고 보상하는 법률을 만들자는 논의가 공론화되는 것이, 국가와 공동체가 ‘기지촌 여성들’에게 진 빚을 갚는 첫 출발이 되지 않을까.

‘한 평의 행복’ 캠페인
햇살사회복지회(www.hessal.org)는 기지촌 여성노인들의 공동의 집 마련을 위한 ‘한 평의 행복’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59명의 할머니들이 한 곳에 모여, 주거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서로 소통하며 치유하는 ‘돌봄의 집’을 꿈꾼다.

후원 계좌번호
농 협 118-01-074174 사)햇살사회복지회
국민은행 509001-01-220240 우순덕(햇살)
문의전화 031-618-5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