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하우스의 삼순, 대학에 간다 16살 성매매 시작, 성노동 합법화 주장하다 탈출...배움으로 제 2인생 꿈꿔

코리아포커스, 송옥진 기자 2005-11-14 오후 6:26:05

설마 대학이라는 곳을 갈 수 있으리라고는 꿈도 못꿨다. 꽃같은 16살에도 꿈꾸지 못했던 일이다. 시도 때도 없이 주먹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피해 16살에 집을 나온 후 미아리, 파주, 수원, 완월동, 숭의동 집결지가 그의 집이었다.

추억이 없는 삼순

31살, 삼순(가명)씨는 대학합격통지서를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숭의동 성매매집결지인 ‘옐로하우스’를 나와 겨우 맘을 잡고 공부를 시작한지 한달 만에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한데 이어, 대학에 수시합격했다. 15년 동안 자신의 삶과는 아무 관련없었던 곳 학교, 그것도 4년제 대학교가 그에게 문을 연 것이다.

6개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에게도 꿈많은 여고시절이 있었다. 방적공장에서 일하며 다닌 산업체 부설학교, 언제나 잠이 모자랐다. 밤 근무 하던 어느날 실 자르는 칼이 손을 그었다. 공장을 그만두게 됐고 따라서 학교도 더 다닐 수 없었다.

“난 추억이 없어요. 남들은 돌아가고 싶은 날들이 있다고 할 때 난 없었어요. 만일 시간을 돌려놓으면 그 자리서 죽겠다고 했어요”

가출을 한 그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일자리는 술집뿐이었다. 그리고 성폭행을 당했다. 인생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라도 벌자는 생각에 ‘술집’에서 ‘미아리’로 옮겼다. 16살 가을이었다. 그도 모르는 선불금이 쌓여갔고 아버지의 폭행을 피해 언니의 단칸방에 들어간 어머니와 남동생 생활비는 그의 몫이 됐다.

그래도 돈을 모아 성매매를 그만두고 가게를 차리기도 했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20대, 가게가 잘 될 리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비까지 그의 빚으로 남겨졌다. 그는 다시 ‘그곳’으로 들어갔다.

성매매 합법화 주장, 집회 주도

2004년 9월23일, 그 법이 발효됐을 때 ‘죽겠다’고 생각했다. “성매매 합법화하라, 생존권을 보장하라” 목이 쉬어라 외치고 또 외쳤다. 숭의동 상조회 간부를 맡아 앞집, 뒷집 동생들 데리고 여의도로, 청량리로 많이도 다녔다. 청량리 집회 때는 숭의동 대표로 나가 결의문도 읽었다.

엄마가 아플 때, 아버지 장례식 때, 조카가 태어났을 때, 남동생 결혼식 때 빌려 쓴 카드빚과 선불금이 1천500만원이나 되는데 주머니에는 단돈 만원도 없었다. 일을 못하면······말 그대로 죽을 것 같았다.

윤락행위방지법 때처럼 숨죽이고 있으면 흐지부지 될 줄 알았는데 법은 점점 목줄을 죄어오는 것 같았다. 영업을 할 수 없었고 업주들은 돈을 대줘가며 집회를 가라했다. 살아온 인생의 절반동안 책을 놓고 살았는데 할 수 없이 밤새워 ‘성매매방지법’도 공부했다.

“여성단체? 잘난 남편 만나 호강하는 여자들이 남의 힘든 사정 모르고 엄한 법을 만들었다고 미워했지요.”

그러다 몸이 많이 아팠다. 남들보다 두배, 세배는 피곤했고, 피부염인지 온몸이 울긋불긋 터지고 갈라졌다. 다만 얼마라도 벌어야겠기에 안마시술소 카운터로 자리를 옮겼다. 아가씨들은 안마시술소에 100만원을 내야 손님을 받을 수 있었다. 옆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대학생이 “왜 아가씨들이 돈을 내야하는지 이해를 못하겠어요”라고 말했다. 쿵하고 머리를 치는 느낌이었다.

삼촌들은 아가씨들에게 욕지거리, 폭언이 일상이고, 아가씨들은 하기 싫은 날, 아픈 날에도 손님을 받아야 했다. 근무시간이란 것은 애시당초 없었다. 왜 손님을 안넣어주냐고 악다구니를 쓰는 아가씨들을 보며 혼란스러웠다. ‘노동자성’이라는 게 말이 안됐다.

‘원래 그래’는 없다

“내가 지금껏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게 갈취고, 강매고 폭언이었어요. 거기 아가씨들이 ‘원래 그래’하며 잘못됐다는 걸 전혀 모른다는게 답답해 미치겠더라구요. 내가 저랬구나, 내가 이런 걸 합법화하자고 그랬나 싶었지요”

탈성매매를 결심했다.

“업주들 중에는 상조회 간부까지 한 제가 등에 칼을 꽂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그들이 내 인생 살아줄 꺼 아니잖아요, 뒷바라지 해줄 꺼 아니잖아요. 내가 살려면 그 길밖에 없었어요.”

첫 가출 후 15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그는 가진 게 한푼도 없고 잘 곳도 없었다. 목돈이 필요하면 손을 벌리던 가족도 그를 안아줄 형편이 못됐다. 게다가 C형 간염, 건선(스트레스성 피부염), 만성중이염, 위염에 걸린 걸 처음 알았다. 막막했다.

여성가족부가 마련한 쉼터에서 그는 한달 이상을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나가 놀고 싶으면 놀았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았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유’를 맛봤다. 낮에 나가본 세상은 그가 아는 밤세상과 달랐다.

“낮에 다른 사람들은 활기찬데 나혼자 꾀죄죄한 거예요. 상담선생님들한테 일자리만 마련해 달라고 졸랐지요”

배운 것도 자격증도 없는데 일자리가 생길 리 없었다. 맘 잡고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본 후 텔레마케터로 일하려고 쉼터 친구 둘과 공부를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은 TV도 일찍 껐고, 공부하느라 불을 켜 놓아도 참아줬다.

그에게 기대를 걸고 지켜보는 선생님들, 동료들 때문에 엎드려 졸더라도 학원을 갔고 공부를 했다. 낮에 할 일이 생기니, 10여년간 바뀐 낮밤도 제자리를 잡았다. 성매매를 위해 일삼아 하던 화장을 그만둔 그의 얼굴도 맑은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가진 꿈, 여전히 막막한 생계

삼순이는 처음으로 꿈이 생겼다. 다시는 자신같은 ‘옐로하우스의 삼순이’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면 방황하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할 생각이다. 꿈이 생기니, 살아가는 것이 재미있어졌다. 세상에 떳떳했다. 좀더 자신이 생기면, “나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커밍아웃을 할 생각이다.

“그런 일 하는 친구들 99%가 가정이 올바르지 않아요. 아빠가 때리면 ‘아빠 그러지마’라고 못해요. 성은 여자가 참고 양보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죠. 가정폭력 같은 근본적인 것부터 파고 들고 싶고 그럴려면 능력이 있어야 겠더라구요”

하지만 그에게는 지금 등록금 360만원이 없다. 쉼터에 머무는 시간은 길어야 12개월, 인턴으로 일해서 받는 67만원 중 20만원씩 저축하지만 이 일자리도 내년 7월이면 끝난다. 신용회복 신청중이라 은행대출도 불가능하다. 또다시 생계의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당장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후원자를 찾고 있다.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좌절하면 또 주저 앉을 것 같아요. 어떻게든 대학 두 학기분 등록금만 마련되면 그 다음은 휴학을 하고 벌어가면서라도 해낼 생각이에요”

삼순씨를 만난 인천 숭의동 옐로하우스 현장상담소 창밖으로 13호, 18호, 29호라고 쓰인 성매매업소 골목이 보인다. 6개월 전 그가 걸어나온 곳이다. 33개 업소 중 아직 절반이 영업중이다. 삼순씨는 아직 나오지 못한 동료들이 찾아오면 다시 살아보자고 말한다.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졸업하면 여기 앉아서 선생님들처럼 상담을 하고 싶어요. 죽지못해 선택하는 일인데 도움만 준다면 성매매 할 사람 없거든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대학 등록금, 제도적 지원은 없어

여성가족부는 탈성매매 여성에 대해 직업훈련을 위한 학원비, 검정고시 준비, 생계비, 쉼터 등을 지원하지만 대학등록금까지 지원하지 못하고 있다.
다른 지원대상과의 형평성 문제 때문이다. 올 초 열린우리당에서 탈성매매여성 지원단을 통해 등록금을 지원한 바 있지만 역시 형평성의 문제로 제도적인 지원책을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다른 직업을 가질 기회를 위해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진학을 할 것으로 보이지만 조만간 제도적 지원을 기대할 수는 없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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