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노동으로 착취당하는 돈? 매년 24조!

<프레시안 칼럼>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 강제노동의 지옥, 대한민국
기사입력 2009-05-14 오전 9:55:28

국제노동기구(ILO)가 오는 6월 세계총회를 맞이하여 <강요의 비용(The cost of coercion)>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강제노동을 통해 갈취 당하는 금액은 매년 2000억 달러, 우리 돈으로 24조8000억 원에 달한다. ILO는 국제적으로 1230만 명이 강제노동으로 피해를 당하고 있으며(2005년 추정치), 특히 이주노동자나 젊은 여성이 강제노동의 위험에 노출되는 경향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주노동자는 인력중개업체에 지불하는 과도한 수수료 때문에 빚에 허덕이고 젊은 여성은 성매매를 위한 인신구속과 중간 갈취로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다. 보고서 책임을 맡은 로버트 플랜트 ILO 강제노동 근절 특별행동 대표는 "가난한 자들을 착취해 이윤을 얻으려는 사용자들과 거간꾼들의 탐욕이 주된 이유"라고 말했다.

강제노동이란? "처벌 위협 속에 비자발적으로 하는 노동"

강제노동에 관련된 ILO 협약은 대표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1930년 제정된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제29호)'와 1957년 제정된 '강제노동의 폐지에 관한 협약(제105호)'가 그것이다.

제29호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에 따르면, 강제노동이란 "처벌의 위협 하에서 강요된, 자발적으로 제공하지 않는 모든 노동"을 뜻한다. 여기에는 의무 군복무, 공민으로서의 특정 의무, 교도소 안의 강제노동, 비상시의 강제노동, 간단한 형태의 마을 노역은 포함되지 않는다.

제105호 강제노동의 폐지에 관한 협약에 따르면, ILO 회원국은 다음 다섯 가지의 강제노동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1)정치적 견해 또는 기존의 정치 사회 경제 제도에 사상적으로 반대하는 견해를 가지거나 발표하는 것에 대한 제재 및 정치적 억압 또는 교육의 수단, (2)경제발전을 목적으로 노동력을 동원하고 이용하는 경우, (3)노동규율의 수단, (4)파업참가에 대한 제재, (5)인종 사회 민족 또는 종교 차별대우의 수단으로 노무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 동의 없는 연장근로'도 강제노동이다

강제노동에 대한 ILO의 입장을 요약하자면 두 가지로 모아진다. 처벌의 위협 하에 행해지는 노무와 그것이 비자발적으로 행해질 때 강제노동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처벌은 법제도나 사규 같은 공식적인 것만 뜻하는 게 아니다. 기존의 권리와 특권을 상실하는 경우도 포함한다. 신체적 폭력이나 인신 구속, 살해 위협, 심리적 압박 따위도 강제노동의 요소에 속한다. 불법 체류 사실을 경찰이나 당국에 알리겠다고 이주노동자를 협박하거나 여권을 압수하고서 일을 시키는 행위가 대표적이다.

"비자발적인" 노무는 노동자가 실제로 노무 제공에 동의한 적이 없음을 뜻한다. 여기에는 속임수나 사기로 체결된 노동계약도 포함된다. 중요한 것은 각국의 법률에 맞느냐 틀리냐가 아니라 강요 혹은 강제의 실재 여부다.

강제노동은 인신매매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2003년 발효된 유엔 초국적 조직범죄 근절 협약을 위한 팔레르모 의정서에 따르면, "인신매매란 착취를 목적으로 위협 혹은 강제력의 사용, 여러 형태의 강압, 권한 혹은 지위의 남용, 금전거래 따위의 수단을 통해 사람을 채용·수송·은닉·수용하는 것"을 뜻한다.

<강제노동 비용 보고서>는 최근 강제노동과 관련하여 노예제, 노예제와 유사한 관행, 착취를 목적으로 한 인신매매, 국가가 생산과 용역을 목적으로 부과하는 강제노동, 교도소 민영화와 감옥 노동, 지역사회 근로(community work) 명령, 실업수당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강제노동, 처벌 위협 하의 연장근로(overtime) 등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고 밝혔다.

ILO 이사국이면서도 '강제노동 금지 협약' 비준 안한 한국

1998년 ILO는 <일터에서의 기본 원칙과 권리에 관한 ILO 선언>을 채택하여 ILO가 제정한 188개 협약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을 추려 ILO 핵심노동기준으로 정했다. ILO 기본협약으로도 불리는 핵심노동기준은 아래 표처럼 4개 영역의 8개 협약으로 이뤄져 있다.

ⓒ프레시안

8개 핵심협약 가운데 한국 정부가 비준한 것은 아동노동에 관한 협약 2개와 차별금지에 관한 협약 2개로 다 합쳐 4개뿐이다. 대한민국 헌법에도 보장된 기본권인 노조 결성권과 단체교섭권을 보장한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에 관한 협약 2개와 강제노동 금지에 관한 협약 2개는 아직 비준하지 않고 있다.

ILO 회원국인데다가 이사국인 한국 정부가 ILO의 핵심협약을 모두 비준하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노조원 자격과 노조간부 임금까지 간섭하는 한국 정부

런던에서 소방관이 파업에 돌입해 화재진압에 비상이 걸렸다거나, 파리에서 경찰이 파업 시위를 벌여 비노조원 경찰이 진압에 나섰다거나, 잉글랜드에서 교사가 처우에 불만을 품고 파업을 벌여 학교가 문을 닫았다거나 하는 소식을 외신을 통해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소방관이나 경찰은 파업이나 단체교섭은커녕 노조조차 결성할 수 없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반쪽짜리 단체협약을 교육당국과 어렵사리 체결해도 협약 이행은커녕 정부로부터 단체협약을 일방적으로 해지당하는 일이 대낮에 버젓이 벌어지지만, 파업은 꿈도 못 꾼다.

노무제공과 근로감독에서 사실상 지배-종속관계에 있으면서도 '소사장'이니 '자영업자'니 하고 우기는 법률 때문에 단결권, 단체협약권, 단체행동권이라는 노동 3권을 사실상 배제당한 노동자가 대한민국에는 부지기수로 존재한다.

1948년 제정된 ILO 협약 제87호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은 "노동자는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고 증진할 목적으로 어떠한 차별도 없이 스스로 선택하여 단체를 설립하고 가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며, 행정당국은 이를 제한하거나 합법적인 행사를 방해하고자 하는 어떠한 간섭도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정부가 직접 나서 누구는 노조원 자격이 있고, 누구는 노조원 없다는 시시콜콜한 것까지 참견하고 간섭하고 있다. (아직 그 시행이 유보되고 있기는 하지만) 엄연히 회사 직원인 노조 전임자에 대해 회사가 급여를 지급하는 것까지도 "불법"으로 만들기 위해 노동법을 개악한 지 오래다.

'위장된 군인' 의무경찰과 공익근무요원도 강제노동 중이다

강제노동은 어째서 비준하지 않고 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지난 10일 술을 마시고 여의도 한나라당사 앞을 지나던 일반인 3명이 "맹박아 너 때문에 못살겠다. 경찰이 개고생이다"고 소란을 피우다가 경찰에 연행돼 즉결심판에 넘겨졌다. 음주소란 혐의로 즉심에 넘겨진 이들이 '개고생'한다고 말한 그 경찰은 일반 경찰이 아니라 의무경찰로 사실상 군복무를 대신하여 경찰로 근무하는 자들이다.

▲ 의무경찰도 군복무를 대신하여 경찰로 근무하는 자들이다. 어느 나라 법에서도 경찰을 군인으로 분류하는 나라는 없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국제법상 의무경찰은 명백히 군인이 아니다. ⓒ프레시안

어느 나라 법에서도 경찰을 군인으로 분류하는 나라는 없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일반 경찰을 군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런데 의무경찰은 군복무를 대신해 경찰로 근무하고 있다. 뭔가 어색하고 이상하다. 국제법상 의무경찰은 명백히 군인이 아니다. 그 대표적인 국제법이 ILO 제29호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이다.

군인이 아니면서 군인인 채 하는 "위장된 군인"은 또 있다. 공익근무요원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군 막사 안에서 생활하지 않고, 집에서 기숙하며 관공서나 공기업에서 근무한다. 사실상 민간인 신분의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하는 일은 주차단속, 주차관리, 행정보조 등 다양하며 공무원이나 정규직원의 일을 대신하는 경우가 주를 이룬다.

얼마 전 서울 지하철역에서 황당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밤 10시쯤 표를 사러 역 창구에 가니 정규직원은 없고, 공익근무요원이 표를 팔고 있었다. 정규직원이 퇴근해 자기가 대신 파는 것이라고 했다. 행인으로 붐비는 출퇴근 시간에 전철역 타는 곳을 지키는 이는 정규직원이 아니라 공익근무요원으로 대체된 지 오래다.

사정이 이러한 데도 지하철공사들은 정규직원이 너무 많다고 인력감축에 열을 올리고 있다. 최근 5000명 가까이 정리해고를 하겠다고 발표한 코레일(철도공사)에도 이른바 '공익'들이 근무하고 있지 않은지 궁금해진다.

슬그머니 사라진 강제노동 협약 비준 논의…정부가 강제노동에 앞장?

노동부는 2002년 10월 국방부에 공익근무요원에 대한 제도 개선을 요청했고, 2004년 9월 법무부에 노조활동으로 인한 재소자에 대한 징역형 부과와 협약 위배 여부에 대한 의견 요청을 하였으며, 2006년 8월에는 병무청, 한국노총, 경총, 국방부 및 법무부 등과의 협의결과를 기초로 하여 국제노동정책협의회를 열어 강제노동 제29호 협약 비준을 추진하기로 하는 따위의 활동을 벌인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협약 비준 움직임은 '가족 뇌물 참여정부'인 노무현 정부 말년에 슬그머니 사라지더니, '친자본가' 정권이자 '경찰력' 정권인 이명박 정부 들어 아예 실종됐다.

ILO의 <강요의 비용> 보고서는 강제노동과 관련하여 정부 차원의 법제도 개선은 상당히 이뤄진 반면, 강제노동의 상당 부분이 민간부문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대개 처벌받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한국의 사정은 정부 차원에서도 강제노동을 근절하려는 법제도 개선은 이명박 정부는 물론 '민주' 정부를 자처한 노무현 정부 하에서도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가 그 모양 그 꼴이다 보니, 채무자를 유흥가에 취직시키는 등의 강제노동을 강요하는 사채업자들의 불법행위가 성행하며 성매매나 인신매매에 따른 인권 침해가 끊이지 않는다.

'국제 기준' 달고 사는 정부는 대체 언제 강제노동 국제 기준 지키나?

일터에서도 마찬가지로 강제노동과 관련된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법에서 정한 하루 노동시간은 8시간이고 주당 노동시간은 40시간인데도, 한국은 세계 최악의 장시간 노동 1위라는 오명(汚名)을 이어가고 있다. 시간외 근로, 즉 연장근로가 별다른 규제 없이 횡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자본가와 정부는 연장근로가 강제노동은 아니지 않느냐고 딴전을 피우지만, 시급으로 최저임금인 4000원 남짓 받는 일을 하면서 연장근로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프랑스 파리에 본사를 둔 세계적 시멘트업체인 라파즈(Lafarge)의 한국 자회사인 라파즈한라시멘트에서 일하던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2006년 만나 노조 결성을 도와준 적이 있다. 당시 이들은 주 100시간, 월 400시간을 일했다. 일요일도 없고, 휴일도 없었다. 그런데 가족을 둔 삼사십 대의 노동자들이 받은 시급(時給)이 3000원을 조금 넘었다. 이것은 저임금 구조를 악용하여 연장근로에 자발성과 동의라는 가면을 씌운 사실상의 강제노동이었다. 물론 노조 결성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들의 사정은 지금 나아졌을까?

ILO는 해마다 6월이면 본부가 있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세계총회를 연다. 한국의 노사정 대표들도 어김없이 참여하게 될 것이다. ILO는 총회 전달에 배포하는 보고서를 통해 총회의 최대 쟁점을 미리 소개하고 논쟁을 유도한다. 물론 올해 총회의 최대 안건은 강제노동이 될 것이다.

한국에는 강제노동이 사라졌는가? 누구나 다 알듯이 사라지지 않고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렇다면 강제노동을 근절할 수 있도록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ILO 총회에 가는 노사정 대표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다. 특히 요즘 들어 "국제기준"을 자주 언급하는 노동부 관료들에게 더 묻고 싶다.

/윤효원 ICEM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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