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금 미끼 '준법서약'강용 촛불단체 길들이기

보조금 미끼 ‘준법서약’ 강요 촛불단체 길들이기
여성부 ‘촛불=불법’ 확인서 요구
행안부, 선정작업 2차례 연기 등
보조금 끊거나 결과 발표 미뤄

» 한 여성단체가 지난달 17일 여성부한테서 받은 ‘확인서’ 공문. 여성부는 “불법 시위에 적극 참여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확인서에 서명해야 국가 보조금을 주겠다”고 밝히고 있다.

정부 부처들이 지난해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단체들한테 정부 보조금 지원의 전제조건으로 ‘불법 시위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확인서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시민단체들은 “전례가 없는 시민운동 길들이기”라며 반발하고 있다.
‘데이트폭력 방지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여성부에 2천만원의 보조금을 신청했던 ‘한국 여성의 전화’는 지난달 중순 여성부 쪽으로부터 전화 통보를 받았다. 불법 시위를 주최하거나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고, 불법 시위 활동 등에 보조금을 쓰지 않겠다는 확인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보조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 단체 관계자는 “지난해 촛불집회가 불법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되는데다, 여성의 전화가 불법 시위에 가담할 가능성이 큰 단체라고 동의하는 셈이 돼 확인서를 낼 수 없다고 했다”며 “보조금을 받지 못하면 많이 힘들겠지만 사업을 대폭 축소해서라도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방의 한 여성단체도 지난달 17일 여성부로부터 △불법 시위에 적극 참여하지 않았다 △불법 시위 활동 등에 보조금을 쓰지 않겠다는 등의 확인서에 서명해 제출하라는 공문을 받았다.

노동부도 보조금을 신청한 시민사회단체들에 확인서를 요구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 노동단체 관계자는 “매년 노동부와 공동사업을 펼쳐 왔던 단체들 가운데 상당수가 불법 시위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확인서를 낼 것을 요구받았다”며 “오랫동안 공익사업을 해 오던 곳임에도 확인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보조금을 자른다고 해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또 행정안전부는 애초 지난달 중순 발표하기로 했던 ‘비영리 민간단체 공익활동 지원사업’ 선정 결과를 지난 15일로 한 차례 미룬 데 이어, 최근 5월 초로 다시 미룬 것으로 확인됐다. 행안부는 지난해 117개 단체 133개 공익사업에 보조금 50억원을 지급해, 중앙 부처 가운데 지원 규모가 가장 큰 곳이다. 행안부는 ‘비영리 민간단체 지원법’에 따라 공익사업선정위원회를 꾸려 심사를 통해 선정된 단체들의 공익사업을 지원해 왔다. 행안부는 경찰이 지난해 촛불집회에 참여한 1842개 시민사회단체를 ‘불법·폭력 시위 단체’로 규정하자 “이들을 원칙적으로 대상에서 제외하겠다”는 방침을 밝혀 왔다. 행안부 관계자는 “심사위원 선정 작업이 늦어져 발표가 지연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청에 발전기금을 신청한 한국성폭력상담소의 경우, 4년 만에 처음으로 기금 지원 단체에서 제외됐다. 서울시는 “사업목적·지원사업·금액산정의 적정성 등과 아울러 정부의 민간단체 지원 지침을 적용해 결정했다”고 탈락 이유를 밝혔다. 기획재정부의 ‘2009년도 예산 및 기금 운용계획 집행지침’은 불법 시위에 적극 참여한 단체 등에 보조금 지원을 제한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한편, 정부의 이런 방침에 반발해 아예 보조금을 신청하지 않는 단체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즐기는 문화 만들기’ 행사를 치르며 5천만원의 정부 지원을 받았던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올해 보조금 신청을 포기했다. 연구소 관계자는 “보조금 없이 자력으로 사업을 추진하기 힘들지만 아예 신청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역시 신청을 포기한 교육 관련 단체의 한 관계자는 “공익사업에 대한 돈줄을 쥐고 촛불집회 참여 단체들을 압박하는 정부 행태는 명백한 시민단체 길들이기”라고 비판했다.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