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몹시] <복지의 배신> 후기

[몹시] <복지의 배신> 후기_별

이번 몹시에서는 <혼자 살아가기>에 이어 <복지의 배신>을 읽었습니다. 신자유주의 금융 위기의 시대, 여성의 삶을 이해하면서 성매매 이슈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공부입니다. 올해 초 읽었던 <대출 권하는 사회>와도 이어지는 책읽기이기도 합니다. 상담 지원 과정에서 부딪치는, '페미니스트 활동'과 '사회복지'의 딜레마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언어를 모색합니다.

 
책은 김대중 정부, IMF 위기를 거치며 '생산적 복지' 즉, 신자유주의적 노동 복지 국가가 성립한 과정을 분석합니다. 연구는 당시 서울시 산하의 <청년여성실업대책 모니터링 팀>에서 1년여간 근로했던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가부장 중심의 정상가족의 틀 안에서 이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선별해내는 방식으로 복지를 했습니다.'IMF 노숙자'나 '신지식인'에 들어가지 않는, 취업과 재활 가능성이 없는 부랑인이나 백수들은 복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일례로 여성 노숙인은 "가정이 있다면 집을 나올 수 없으며, 혼자 사는 여성이라면 성매매를 해서 먹고 살수 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고, 여성 해고 또한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현재에도 여성이 가족과 성매매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은 가난이나 빈곤, 복지의 필요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여성이 남성, 가족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살려는, 살아야하는 움직임에는 사회적 지지와 지원이 없습니다. 내담자들이 복지 수혜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경우는 참 드뭅니다. 그마저도 단순히 남성과 주소지가 같다는 이유로 사실혼으로 간주되어 급여 수혜가 끊길 정도로 위태롭습니다.        
 
저자는 이런 복지의 배신이 민주화 시기를 거치며 진보적이고도 자유주의적으로 성장해온 주체들의 행보와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정부와 시민단체들의 민관협력은 정치 주체와 소비 주체가 중첩되는 자본주의적 자유시민의 양태를 육성하였고, 권위주의적인 개발국가의 유산과 구별되는 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하는데 이바지하였다고 평가합니다. 좋은 자유주의가 자본의 운동에 맞설 수 있고 맞서야만 한다는 생각은 교묘한 사기라는 것입니다.
 
국가와 여성운동 사이에 놓인, 페미니스트이자 사회공학 실행자의 위치에 놓인 이루머들이야말로 무엇을 해야하는지 묻고 또 얘기해야하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아주아주 불편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동일시하지 않고 거리를 둘 수 있는 시원한 자극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언제 우리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페미니스트들과도 이 주제로 이야기할 수 있는 판을 꾸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올해 마지막 몹시를 마칩니다! 내년에 만나요~!
 
활동이야기

[몹시] 그들은 왜 여성에게 돈을 빌려줄까?

[활동가세미나 '몹시' 후기]

그들은 왜 여성에게 돈을 빌려줄까?

완두


<무지개론> 광고
 

지난 달 은행에 방문했다. 3년 전 4%대 금리로 들었던 적금 만기 해지를 위해서였다. 소액으로 겨우겨우 3년을 유지하며 채웠지만 요즘 금리를 떠올리니 좀 더 일찍, 많은 금액을 저축 하지 못했던 지난날들에 괜히 속이 쓰렸다. 번호표를 뽑고 30분 이상 기다려 마주한 은행 창구 직원은 ‘투자’니 ‘공격상품’이니 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용어들을 섞어가며 아주 빠른 속도로 내게 ISA통장개설을 권했다. 종종 1%대 예금 금리에 대해 하소연 섞인 목소리로 안타까워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왜 이렇게 금리가 낮은 거예요?”라고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던진 내 물음에, “다 대출 때문에 그렇죠 뭐, 대출업무가 많아요.”라며 목소리를 낮춰 답했다. 적금 들러 왔다가 대출을 받는 고객도 많단다. 하지만 이것도 초저금리 시대에 ‘빚테크’라는 신종 자산관리 흐름에 발맞춰 제1은행권 대출이 가능한 소위 돈 좀 있는 사람들의 얘기다.
 

저축으로 돈을 모은다는 건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언론은 틈틈이 가계부채 심각성을 보도하며 서민경제를 크게 우려 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지난 4월 하향 조정된 법정 최고이자율(기존 34.9%에서 27.9%로 인하)에 대해 "대부업계의 대출심사가 까다로워지면 서민들이 불법 사금융 업체로 내몰릴 수 있다"라는 금융계, 경제학자들의 목소리를 연일 보도했다. 그간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선심 쓰듯 상환능력이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고리대자본을 축적한 거대 자본가들의 무책임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한다면 과언일까. 최고이자율 인하를 서민경제에 타격을 주는 부작용이라고 지식인의 언어로 포장하고 선전하는 모습에서 ‘고양이 쥐 생각한다’는 격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고리대금과 추심에 대한 적극적 규제와 단속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채무자에 대한 보호 장치가 전무한 현실에서 소득이 불안한 개인에게 ‘대출’은 권리이자 복지인양 그 무엇보다 폭발적, 전략적로 접근을 확대해왔다. 내 앞가림은 내가 한다는 어른들의 조언을 신조 삼은 ‘도덕적이고 합리적 주체’인 개인은 미래소득을 담보로 ‘대출’이라는 하나의 선택지 안에서 주거‧의료‧교육‧복지‧생계 문제를 감당하며 현재를 저당 잡힌 채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부채경제 말단엔 노동시장에서 소외되고 저임금 산업으로 내몰리는 여성이 있다.
 
 

이룸은 ‘대추: 대출은 추심!’사업의 밑 작업으로 지난 3월부터 1980년대 금융자본의 세력 확대와 신용의 증가로 이전 시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대출을 받게 된 흐름에 주목하고 있다. 이번 [몹시]에서는 <가난을 팝니다>(라미아 카림, 오월의 봄, 2015)를 읽고 ‘금융의 세계화’가 진행되던 시기 최빈국 방글라데시를 틈새시장으로 발견한 금융의 검은 속내와 전략을 꼼꼼히 들여다봤다.
 

방글라데시는 서구 원조기구에 의존하며 필수서비스를 NGO에 아웃소싱한 탈식민지국가이자, 전체 인구 80%가 농업에 종사하고 1일 1달러 소득 미만인 극빈자가 전체 인구의 41.3%를 차지하는 최빈국이다. 그런 땅에서 그라민은행은 어떻게 ‘소액 대출’로 세계적인 "빈곤 퇴치와 젠더 전략을 위한 주요 원조정책" 모델로 각광받으며 노벨평화상까지 받을 수 있었던 걸까.
 

그라민은행은 누구보다도 ‘빈민여성’을 가치창출의 주요한 고객으로 삼았다. “소외계층 삶의 개선에 헌신한다”라는 윤리적 주체이자 농촌사회에 자원을 공급하는 권력을 가진 NGO로서 그라민은행은 농촌여성에 대한 기존의 관습과 통제를 자신들의 손실은 막는 위험관리로 제도화했다. 결과적으로 빈민여성과 금융서비스라는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여성이 금융자본에게 그 무엇보다 ‘선’하고 ‘합법적’으로 이윤을 내기에 탁월한 시장임을 증명해보였다.
 

그라민은행을 비롯해 마이크로파이낸스 정책, 간단히 말해 ‘무담보’ ‘무보증’을 내세운 소액대출 서비스를 하는 이들 NGO는, 이 같은 대출이 “여성역량강화와 가난을 구제하고 공동체를 개발한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들은 상환능력을 묻지 않고 가족 생계를 지탱할 만한 토지를 살 정도의 금액보다 훨씬 적은 액수만을 가계경제에 결정권이 없는 빈민여성에게 무작정 대출해주었다.

 
저자가 연구한 그 실상을 좀 더 살펴보면 이렇다. 여성들은 대출자그룹을 형성해야 돈을 빌릴 수 있었는데, NGO는 이들 그룹을 통해 일일이 손대지 않고도 대출금 회수에 상호 압력을 강요해 대출자를 통제할 수 있었다. 이른바 연대보증이다. 뿐만 아니라, NGO는 정해진 이자에서 대출 상품의 종류와 기관에 따라 다양한 추가 비용(고정이자+그룹회비+의무저축+가입비+통장발행비+취소수수로+의무적으로 상품을 사게 하는 끼워 팔기 등)을 통해 발생 가능한 연체를 대비한 안전장치를 두었고 저축을 해야 대출자격이 생기는 규칙은 상환금을 연체할 시 담보역할을 했다. 특히 이들 NGO의 ‘공개적 망신주기’, ‘집부수기’ 심지어 감금하거나 대출자를 고발하는 방식의 강압적인 추심은 농촌 사회의 명예와 수치관념 하에 지배받는 취약한 여성의 지위를 이용하여 채무를 변제하도록 스스로 규율하게 했다. 즉, 여성은 대출로 가족과 공동체 차원 모두에서 새로운 형태의 종속과 억압에 놓이게 된 것이다.

앞서 나열한 NGO대출은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여성전용대출’의 고객 선정과, 마케팅, 위험관리 전략에서 매우 유사한 점을 보였다. 먼 나라 이웃나라에서도 여성은 금융이 이윤을 창출하기에 가장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성매매피해지원상담소에서 많은 비율로 과다채무와 고리대, 강압적인 추심으로 어려움을 겪는 여성을 만나는 우리가 성매매를 이야기하면서 금융, 복지, 노동, 기본 소득을 함께 고민해야 할 필요를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금융자본의 질주는 성별 성차별 제도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에서다. 
 


<웰컴론>광고
 
“넌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주체야”
“네가 필요해서 빌린 거잖아”
“네가 선택했기 때문에 감수해야 해”
 

신자유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은 담합과 뒷거래를 통해 몸을 불리는 자본권력을 은폐하며 우리들의 경제관념에 교묘하게 파고들어 행동을 규율한 지 오래다. 그사이 법은 채권자들에게 추심의 결정타로 기능하고 있고 비현실적이고 차별적인 금융자본의 설계에 말미암은 위기와 과제는 개인의 문제로 축소되어 발화되고 있다. 이 같은 현실에서 나는 고금리, 강압적인 추심, 폭력과 같은 행위를 합법/불법이라는 틀에서 겨우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우리의 ‘자발’, ‘선택’, ‘필요’라는 언어 속엔 ‘누구에’의해 ‘특별히 누구의 필요’가 만들어 지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이익을 얻는 자들이 누구인지는 없다. 금융자본은 이윤에 따라 움직인다. 개인의 부주의를 탓하고 서로가 서로를 단속하게 하는 질문과 논의 속에서 이 움직임에 대응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왜, 빈곤한 여성들이 갚을 능력도 없이 돈을 빌릴까?”
“왜, 그렇게 많은 빚을 지고도 또 돈을 빌릴까?”라는 질문에 다시 질문해 보려고 한다.

 

“그들은 왜 여성에게 돈을 빌려줄까?”

 
그리고 이 같은 질문이 필요한 현실에는 경제적 불평등에 따른 비정규직 저임금 여성노동의 대안으로 성매매가 존재하는 문제가 함께 있다.
 

“돈이 없어서 배우지 못하고, 돈이 없어서 집을 못 사고,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하고, 돈이 없어서 성매매를 한다는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자본’이었을까?”
“이들이 말하는 어려움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그 어려움이 이들에게 미친 영향을 무엇일까?”
“빚이 늘어난 이들이 ‘돌려막기’,‘사채’, ‘카드깡’ 등의 동일한 경로를 경험하는 건 왜일까?”
“돈을 빌리지 않고도, 성매매를 하지 않고도 생존권, 노동권이 보장되는 현실에 대해 같이 목소리를 낼 수는 없을까?”
여러가지 질문이 꼬리를 문다…

 
이제 “왜?”라는 질문은 돈을 빌릴 수 있는 능력을 ‘신용’이자 ‘권리’라고 말하는 이들에게로 향해야 하지 않을까.
신용은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권력자들이 불평등을 해소하고 국민의 복지와 자활에 필요한 자원을 모으고 배분하는 ‘능력’으로 우리에게 심사받아야 할 책임으로서 기능해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내담자가 일수업자로부터 반복적인 추심협박에 시달려 상담소를 방문했다. 상환방법을 묻는 질문에 그녀는 “돈을 빌린 후 연대보증인의 카드를 일수업자에게 주고 비밀번호를 알려준 후 본인과 연대보증인이 해당 계좌로 매일 돈을 입금한다.”고 말했다. 법적 대응이 필요하거나 다툼이 생겼을 때 돈을 갚았다는 사실을 입증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채무자의 책임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이 불공정한 관행은 지금도 우리의 상식 밖에서 새로운 상품들로 둔갑에 둔갑을 거듭하고 있다.
 
 

활동이야기

[몹시] ‘한국 성매매 산업의 금융화와 여성 몸의 ‘담보화’ 과정에 대한 연구’ 를 읽었습니다.

몹시 후기(별)

0. 들어가며

이번 몹시에서는 베프 김주희님이 이루머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을 적어 손수 부쳐주신 여섯권의 책, [한국 성매매 산업의 금융화와 여성 몸의 ‘담보화’ 과정에 대한 연구]를 2회에 걸쳐 나누었다. 지난 겨울 베프 때는 아직 세상에 없던 책이 여름 베프가 되자 이렇게 사무실에 도착했다니 논문의 탄생과정을 함께 하기라도 한 듯 무지 감동스러웠다. 조금이라도 더 꼭꼭 씹어 소화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 논문은 2차, 접대라 불리우는 여성들의 몸-노동이 화폐의 순환을 떠받치고 있는 현실의 밑그림을 그려낸다. 화폐, 담보, 부채관계와 같은 경제와 실증의 단어들로 빼곡히 서술된 '구조적인 억압과 착취'의 밀도 높은 현장감은 뒷골을 서늘하게 할 만치 생생하다. 논문을 읽은 이루머들이 무력감에 휩싸일만도 하다. ㅠㅠ
 

1. 금융화된 성매매 공간과 여성들의 담보화

 
'신용의 민주화'는 가진 거 없는 자에게 선뜻 돈을 준다. 빌렸다 갚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신용이 제 의미가 무색하게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여성을 비롯한 빈곤한 자들을 채무자로 만드는 까닭이 무엇일까. 인간의 정치적, 윤리적 존재 및 행위의 근본 단위를 이름하여 ‘부채관계’로 소급 재편하기 위함이다.

‘부채관계’는 비노동, 무임금으로 치부된다고 여겨지는 여성으로서의 상품가치를 화폐로 전환하는 실천에 이미 합리성과 도덕성을 부여하고 있다. 자본의 힘은 이자청구와 채권추심의 합법성을 매개로 성매매에 대한 낙인이든 성매매 불법 여부든 개의치 않고 ‘채무자-여성’의 ‘몸-가치’를 투시하고 회수해가지만 아무런 법이나 제도의 제재를 받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권장된다.

그런만큼 여성들의 행위성, 자발성, 자유는 그 힘의 자장 안에 있다는 점이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여성들은 자본을 대리하여 자신의 몸-가치를 계산하고 단기간에 고수익을 낼 수 있는 전략을 실행하는 동시에 그 리스크를 개인의 몫으로 부담하고 있다. 이처럼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담보화'해야만 자신의 삶이 가능한 현실을 살고 있다.

담보화의 실천은 필연적으로 성매매 공간 안에서 이루어진다. 성매매 공간은 자원이 없는 여성에게 가능한 최대치의 신용을 주는 한편 그에 뒤따르는 고리를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노동시장이다. 금융 공간이 성매매를 주요 이익 회수원으로 인정하자 여성에게 주어지는 수많은 대출 자체가 선불금과 동일한 효과를 낳게 되었다. 판례에서는 채권이 성매매를 전제로 했다는 사실보다는 그 채권이 위조되었다는 점이 더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업소의 벌금이나 임금체불, 건강에 유해한 노동환경으로 인해 지출한 병원비로 인해 생활비가 부족하게 된 여성이 대부업체 대출이나 카드빚으로 채무가 쌓여 파산을 한다고 해 보자. 이 여성의 대출은 채무부존재소송에서 누락되어 파산이나 개인회생으로만 변제가 가능하게 되어버린다.

이처럼 성, 즉 남성 성욕의 충족이라는 것은 그만큼 높은 가치로 거래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사회는 광범위하고도 완전하게 신뢰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러한 신용과 대출들이 발생할 수가 있을까. 언니들은 자신이 번 액수를 실제보다 훨씬 높게 잡거나 얼마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성매매 공간으로의 진입비용, 성매매 공간에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드는 비용, 선불금 및 대출 수수료와 원리금을 갚는 과정 전체가 수익에 이미 포함되어 있으나 이를 당연히 자신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장기라야 한번 떼어먹으면 그만이지만 성노동은 나이 들거나 병들어 더 이상 그 일을 할 수 없어질 때까지 자발적 재생산이 가능하니 이익 회수에 더 유리하다. 여성들은 추심도 더 쉽다. 가족한테 알리겠다 한마디에 알아서 갚는다. 안갚아도 되는 돈인걸 알아도 끝까지 갚는다. 이토록 '안전한' 선불금 차용증은 ‘증권화’ 과정에서 제2, 제 3의 신용과 대출, 이윤을 겹겹이 발생시키는 밑거름이 된다. 현금없이 룸싸롱 다섯개를 굴리는 사례를 보자.

이러한 사회구조 안에서 여성들은 이성적인 계산에 입각해 ‘매춘화된 성’, 성별불평등의 재생산으로서의 성을 '선택'한다. 그러한 종류의 성이야말로 상품성이 있는, 거래될 수 있는 자신의 유일한 몸-가치로서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소유자-시민의 지위를 주기 때문이다. 역으로 이 교환이 이러한 성적 관계를 정당화하면서 이것을 재생산할 수 있는 주체들을 양산해낸다. 이러한 효과를 낳는 대출들이 여성 개인의 채무 형식으로만 인식되면서 성매매 정치학에서 누락되어 왔음을 논문은 분석한다.

2. 이루머들의 대화

2,1 부채의 형성과 조절

이루머들은 업소들이 대형화되는 한편 언니들이 소액의 선불금을 갚지 않고 계속 안고 가는 동향을 이해할 수 있겠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이 돈을 갚을 필요가 없고 업소에서 갚게도 안 한다. 업소는 여성이 그만큼을 땡기게 한 다음, 그 빚을 안고 가게 한다. 그 빚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 더 많은 빚을 지게 한다. 연대보증과 맞보증 등으로 채권을 묶어 한 사람이 손실을 내도 나머지 사람이 메꾸게 한다. 이것이 성매매의 경제 공식이다. 이때 부채가 여성을 통제, 억압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인데 오히려 통제를 많이 하면 부채가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부채와 통제가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삼종 방석집에서 계속 갇혀서 일을 하면 돈이 모아지고 부채가 줄어든다. 이처럼 성매매 경제 안에서 부채는 늘어나기도 하지만 줄어들기도 한다. 부채가 너무 크면 언니들을 다른 업소로 못보낸다. 즉 팔릴 수 없는 몸이 된다. 여성들이 성매매를 해서 성산업에 기생하는 여러 사람들을 먹여 살리게 하기 위해 부채는 유지되고 조절된다는 것이다.

잘 그려진 다혜의 부채 그래프가 이러한 부채의 조절의 역학을 보여준다. 어떤 업소에서도 일억짜리 언니를 받아주지는 않는다. 일억의 부채는 여성들을 성매매에 묶어두면서 상품으로 순환시킨다는 본래의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린다고도 얘기할 수 있겠다. 부채의 연결망은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성매매에 남을 수밖에 없는 여성 인구를 확보하면서 다음, 다음의 여성을 끌어들이는 성격의 것이지 여성들 개인의 씀씀이에 의한 개인적 채무가 아니다. 논문은 부채에 대한 시각을 개인적인 것에서 관계적인 것으로 전환한다. 이렇게 신용의 민주화가 젠더화 되어 있음을 밝힌다.

하지만 막상 언니들이 사기죄로 재판을 받을 때 판사가 이 돈 받아서 어디 썼어요? 물어보면 진짜 이상한데 썼다는 함정… 논문에서는 성매매를 하기 위해서 꼭 다 사야하는거였던 걸로 증명을 하기는 하지만, 본인들도 내가 받아서 내가 썼다고 하는데 어떻게 구조로 책임을 전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논문의 논리가 실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2.2 풀링 기법과 부실채권, 추심

한편 ‘풀링’ 기법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금융화 이후의 성매매에서 풀링으로 위험요소가 분산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사례를 통해서 이해해보려고 했다. 대형 룸에서는 한 업소당 막 백명씩 있는데 열명의 여성이 비슷한 조건으로 열개의 대출을 한다면 관리하는게 쉽고, 상환이 안되서 처리할때도 연대보증을 서고 있으니 다른 금융기관에 팔 때도 쉽고, 받은 기관이 채권을 회수하기도 쉽고, 동시에 추심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닌지!

뿐만 아니라 일억짜리 차용증이 신용쪽에 십퍼센트, 천만원의 가격에 팔린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은행쪽에서는 천만원 내고 일억을 추심할 수 있으니 이익이지만 업주는 왜 직접 일억을 추심하지 않고 구천의 손실액을 감수하는지에 대한 평소의 의문을 해소해보려고 했다. 그 구천이라는게 상당부분이 선이자, 벌금 등 성매매 운영비용일거라고 추정된다. 관리하는 언니들이 많으니 비용을 계산해서 텄다 싶으면 추심할 시간에 업소를 굴리고 술을 파는게 낫다. 업주들은 진짜 손해를 안보고 사나보다 싶은… 업주 당사자가 추심하는걸 본 적이 없다. 그걸 보면 별로 손해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이걸 돈 주고 산 신용정보회사는 다르니 추심이 고약해진다. 추심업체 피라미드가 재미있었는데 추심행위들이 밑으로 갈수록 많아지고 지저분해진다. 불법추심금지법이 있고 언니들에게 그 법을 언급할때가 많지만 사실 처벌된 판례는 없다. 이런 추심이 이 경제의 필수적 요소라는 반증이다. 학자금 대출을 갚고 있는 이루머들은 지하경제 추심으로 안전한 상품을 대출받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또 한번 우울해지고 말았다.

2.3 업소서열화와 수입서열화

업소 서열화와 수입 서열화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부분에 대하여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텐과 삼종은 기본이 다른데 정말 그런지 이루머들에게 바로 와닿지는 않았다. 순자산이 일정하다고 하면 동의가 될 수는 있을거 같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젊은 여성들의 업소만 보면 어느정도 일정하다 얘기할 수도 있겠는데 지역대와 나이대가 개입하면 또 다른 분석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정말 경제적 자립을 한 언니들을 본적이 없다는 점에서는 동의가 쉬웠다! 스폰이 경제적 자립은 아니니까? 성매매 시장 안에서 계속 활용되는 한에서만 경제인으로 살 수가 있다는 사실. 언니들이 수중에 들어온 돈이 적다는 설명만이 아니라 왜 돈을 못모으고 왜 못나오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용의 착시효과 만으로 명쾌하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 상담사례를 모아나가면서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논문에서 제시되는 업소 서열화를 보면 사이즈가 더 중요하지 성적 서비스는 부차적이다. 그걸 보면 성적행위, 기술이라는 상품이 판매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몸을 파는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상품성의 기준이 성적인 서비스가 아니라 몸, 외형으로 결정되니까.

2.4 갚을수 없는 돈, 갚지 않아도 되는 돈

다혜라는 아웃로의 사례가 흥미로웠다. 여자들이 어떻게 돈을 버냐고 되묻는, 눈먼 돈을 집어삼키는 그녀는 날카로운 동물적 직감으로 성매매 공간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사람이다. 그녀만이 자본의 논리를 거부하는 존재로 나온다. 하지만 그녀 역시 지금 스폰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점에서는 다른 여성들과 운명을 공유하고 있다.

3. 상담소에서

몹시를 마치고 난 후 상담전화를 받았다. 언니는 수년 전 맞보증 선 동료 언니가 파산할 때 이룸을 알게 되었는데, 그때는 상담원의 파산 권유를 거절했었다고 한다. 자신이 굴릴 수 있는 규모의 부채라고 판단했고 그 부채를 유지해야만 업소에서 계속 일을 하면서 미래의 시간성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언니는 그 부채를 유지하는데만 계속해서 새로운 부채를 졌다. 그리고 당장 오늘, 원리금 상환이 불가능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수년간 매일, 매주 돌아오는 상환일과 추심이 자살시도를 할 정도의 스트레스였음에도 언니에게는 어떻게 오늘만 막으면 앞으로 해결을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남아있었다.

언니의 사례는 담보화 논문과 이어진다. 소득이냐 부채냐의 이분법적 프레임으로는 언니의 일상을, 이 행위성을 설명할 수 없다. 9월 23일 열린 성판매경험당사자네트워크 뭉치의 토크콘서트에서는 내가 번 돈이 장부에만 기록되어 있고 선불금 빚은 줄어들지 않는 비상식적인 상황에서도 언니들이 쉽게 그만두지 않는 현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토크 참가자들과 관객들이 머리를 맞대었지만 언니들을 성산업에 고착화 시키는 구조는 쉽게 말로 정리되지 않았다. 업주와 알선자의 감금, 협박, 세뇌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언니들은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자발성으로 성매매에 머무른다.

수화기 속의 언니에게 자신이 더 이상 부채를 갚을 수 없는 사람임이 주위에 알려져 업소에서 맺어온 관계들, 나를 믿고 돈을 빌려준/빌려줄 사람들을 잃게 되는 것은 가족에게까지 추심이 들어가 성매매 사실이 알려지는 것만큼이나 수치스럽고 겪고 싶지 않은 일이다. 언니가 파산과 탈성매매를 미룬 까닭 역시 이 수치심과 공포심 때문이다. 언니는 좋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게 되었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 좋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돈을 빌려준 사람들이었다.

언니들은 선불금이 갚지 않아도 되는 돈이라는 사실을 알더라도 끝까지 돈을 갚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돈을 떼먹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신용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신용이 언니들을 성산업으로 유입시키고 고착시키는 것이다. 이 신용이 언니들의 부채관계를 형성한다. 어떤 힘이 언니들에게 이러한 자발성을 주는가? 토크 콘서트에서 한 관객은 자신이 성매매가 나에게 적합한 노동환경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고수익으로 인해 선택을 고민하게 되는 상황 자체가 폭력으로 다가왔다고 이야기했다. 여성들에게 이러한 선택이 주어지는 상황 자체에 대한 분석이 없이는 성매매 구조를 파악할 수 없다는 반증이다.

나, 를 지탱하는 핵심이 나의 신용이 되었을 때 그 신용을 포기하는 것은 삶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여성들에게 내가 나를 이 신용과 동일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이 신용에서 비롯한 성매매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인식틀을 주는 것이 이 논문이다. 이 인식틀은 언니들의 경험, 이야기가 성매매를 새로운 사회적 현실로 구성할 수 있도록 매개가 되어준다. 여성들이 자신의 행위성으로 성매매에 발을 들여놓고 머무른다는 사실과, 이것이 착취이자 억압이라는 발화를 동시에 긍정하면서 어떻게 설득력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 설득력을 만들어내는 것이 여성주의적 의미투쟁이라고 생각된다.

자활의 문제는 이 신용을 재생산한다는데 있다. 이 사회가 허락하는 주체성과 자유가 신용일진데, 그리고 여성들에게는 이 신용과 자유가 성매매를 전제로 할 것일진데 파산, 개인회생, 워크아웃, 채무부존재소송을 통한 부채 탕감이 반성매매의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주 업무인 상담소의 입장에서는 난감한 상황이다…

4. 여성주의적 의미투쟁?!

여성운동이 언니들에게 탈성 자활에의 성공, 신용 이외의 새로운 주체성, 새로운 삶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제도화된 국내 여성운동이 금융 자본주의 사회를 향한 비판력을 상실한 것일 수 있다는 논문의 일갈! 어디서 이 힘을 길어올 것인가? 젠더권력관계는 금융화로의 신변종을 겪고 있다. 여성이라는 성적 타자의 몸과 섹슈얼리티가 화폐제조기가 되었다. 이 구조에 개입하지 않는 이상 현재의 반성매매 정책을 비롯한 여성운동은 헛발질이 될 수 있다… 아아…

캐슬린 배리는 계급으로서의 여성을, 이진경은 죽음정치적노동에 포섭된 자들로서의 여성을 이야기했다. 여성들이 성매매를 하지 않으면 화폐가 금융권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는다. 금융은 어떤 식으로든 여성들이 성매매를 하게 만들것이다. 그것은 자동차, 주택담보대출이고 성형대출이며 풀옵션원룸, 강남에서 텐으로 살기 위해서라면 필수적으로 지불해야 하는 비용들에 포함되어 있다. 이 비용이 없는 성매매를 상상하는 것은 최소한 그 비용을 지불할 수 밖에 없는 여성들을 위한 일은 아니다. 쉽게 버는 돈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말도, 성매매가 쉽게 돈버는 일이 아니라는 말도 충분하지는 않다. 왜 여성들이 이 돈을 벌어야 하는가? 이룸의 노년여성 인터뷰에서 여성들은 이 돈을 가족 재생산에 투입했다. 논문에서는 가족과 친구에게 무언가 해주기 위해, 금융 신자유주의 사회가 제시하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소유자로서의 삶을 사는데 투입했다. 이 삶에 개입하지 않으면서 성매매라는 단일 이슈에만 개입하고 성매매를 제거하는데만 집중하는 여성운동은 비판적 실천의 힘을 상실한다.

이런 의미에서 가루가 앰네스티 논평에서 앰네스티 정책을 포주의 언어라고 지적하는 것은 유효하다. 전면 비범죄화는 이러한 삶을 용인하는 실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매매가 합법화되면 성노동자 대상으로 보험상품이 많이 개발되지 않을까? 이런게 규제로 다 될까? 자본가들 입장에서는 성노동자를 인정하는게 이익이 되므로 그렇게 될텐데 빈틈을 알리고 작업을 하는 자체가 성노동을 인정하는 것으로 여겨지는게 답답하다. 우린 뭘 할 수 있을까?

 
5. 나가며

성매매 경험을 새로운 사회적 현실로 재편하는 작업으로서 이 논문은 큰 의미가 있다. 이러한 이야기가 더 많이 알려지고 읽히는데 이룸도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고, 이룸의 활동에 녹여내었으면 좋겠다. 이룸에서 김주희님과 논문읽기 자리를 마련해보자는 희망찬 계획으로 몹시를 마무리하였다! 

활동이야기

[몹시] ‘영자의 전성시대’, 도대체 누구의 전성시대?

몹시 후기  

영자의 전성시대’, 도대체 누구의 전성시대?

 

가루


(스포일러 매우 많습니다)


 

몹시 세미나에서 ‘영자의 전성시대’를 함께 보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의아했다. 나는 이 영화가 성매매에 관한 것인지 모르고 ‘얄개 시리즈’처럼 철없는 10대의 연애담에 관한 옛날 영화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전성시대’라는 단어가 그런 혼란을 가져왔던 것 같다. 성매매하면서 고생한 시절을 ‘전성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룸’에서 노년 성매매 연구 관련해서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목 때문에 이 영화가 그다지 무겁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 같다. ‘성매매를 선정적인 소재로 활용했겠지’ 정도로 생각했다. 이 영화가 굉장히 유명한 영화이고 개봉되었던 1975년 당시에 엄청난 흥행을 했던 작품이기에 더욱 그런 기대를 했던 것 같다. ‘무거운 영화면 흥행을 했겠어? 성매매 여성의 암울한 이야기를 사람들이 많이 보려고 했겠어?’
 
나의 이러한 기대는 영화 시작 10분 만에 깨졌다. 시골 가난한 집의 장녀로 밑에 줄줄이 동생을 달고 있던 영자가 도시로 올라와 돈을 많이 벌어 집에 보탬이 되겠다는 포부를 품고 한 부잣집의 식모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집 아들로부터 강간을 당하고 쫓겨난다. 아니, 이건 너무 리얼하잖아? 그러나 영자의 고난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공장에서 봉제일을 해보지만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장시간의 고된 노동을 한 달간 견디고 월급을 받아 손에 쥐었을 때, 영자는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그리고는 곧 “하하하” 배꼽을 잡고 방바닥을 구르며 히스테리컬하게 웃는다. 영자에게 잘 곳을 제공해 주던 고향 언니는 술집을 다니고 있었고 영자에게 줄곧 “술집에서 일하라”고 조언을 했던 터라, 이 언니도 영자와 함께 배꼽을 잡고 웃는다. 영화는 이 상황의 희극성을 놓치지 않고 극적으로 잡아냈다. 식모살이를 해도 어차피 성폭력을 당해서 몸 버리고, 공장 일을 하면 건강 상하면서 죽어라고 일 해봤자 버는 돈은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할 정도이지 시골에 돈을 보내줄 수도 없는데, 몸 귀하게 여겨 뭐하겠다고 술집 일을 마다하고 이 고생을 했나? 술집에서 일하면 똑같이 몸은 버리겠지만 그래도 방이라도 하나 얻고 집에 적은 돈이라도 좀 부쳐줄 수 있었을 텐데. 이 돈을 받겠다고 이 일을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이런 의미의 자조적인 웃음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영자는 술집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러나 잘 못 마시는 술을 마셔가며 남자손님 비위를 맞추는 일은 쉽지 않았고, 영자는 마음을 다잡고 택시운전기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일단 버스차장으로 취업을 한다. 버스차장 일은 엄청 위험하다. 꽉 찬 버스에 승객들을 밀어넣고, 달리는 버스의 열린 차 문에 매달려 앞뒤 교통 상황을 파악한다. “오라이! 오라이!”를 외치며 열심히 일하던 영자는 어느 날 열려 있는 차 문에 노출된 팔이 지나가던 차량에 부딪히면서 팔을 잃는 사고를 당한다. 육체노동만이 살 길이었던 영자는 절망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까지도 영자는 몸을 누일 방 한 칸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팔을 잃었으니 식모 일도, 공장 일도, 버스차장 일도, 택시기사 일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낙인이 심한 사회에서 도시에서 기댈 사람 하나 없던 영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영자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진다. 술에 의존하기 시작하고, 사고 보상금으로 받은 거액은 고향에 다 보낸다. 난 영자가 죽어 버리려나 싶었다. 아직도 지낼 곳이 없었던 영자는 어느 날 잘 곳이 없을 때 종종 가던 여인숙에 간다. 이 여인숙은 전에도 영자가 왔을 때 주인이 “쯧쯧쯧. 혼자 온 남자손님 하나 있는데 연결해줄까?”라고 선심 쓰듯 성매매를 제안했던 곳이다. 추운 겨울 날 몸 누일 곳이 없어 불구가 된 몸으로 이 여인숙에 온 영자는 지친 목소리로 “남자 손님 방에 넣어주세요. 돈 안 주셔도 돼요. 안아주시기만 하면 돼요.”라고 주인에게 말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영자의 마음에 너무나 공감이 갔다. 의지할 사람 없는 큰 도시에서 추운 겨울에 불구의 몸으로 몸 누일 곳도 없는 신세. 따뜻한 방에서 체온을 나누어줄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성구매자든 누구든 무슨 상관이 있었겠는가. 
 
이렇게 영자는 성매매 일을 하게 된다. 결국. 이 영화는 110분인데 영화 시작하고 반도 지나지 않아서 영자는 이미 성매매 일을 하고 있다. 여기까지도 너무 끔찍한데 나머지 한 시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더 일어나려는 거지?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십 분 쉬고 봅시다! 제발!” 이라고 외쳤다. 도대체 영자의 전성시대는 언제 나오나?
 
영화의 후반부도 제목처럼 발랄하지는 않다. 영화는 영자를 짝사랑하는 순박한 청년인 창수의 시각에서 전개되는데, 그는 영자를 매우 좋아하지만 월남전에 갔다 온 후 변변한 일자리가 없어 목욕탕에서 세신사로 일하기 때문에 집한 칸 마련할 돈도 없고, 그래서 영자에게 선뜻 결혼하자는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영자의 성매매업소로 가끔 찾아가 돈을 지불하고 밤을 보내며 영자가 쉴 시간을 줄 따름이다. 영자는 점점 더 몸과 마음이 망가져간다. 성병에 걸리고, 술에 의존해서 생활한다. 창수가 영자에 대한 자신의 진심을 고백하면서 둘이 잘 되는가 싶더니, “영자는 플러스 1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마이너스 1이 되는 사람”이라는 창수 지인의 충고(?)를 들은 영자가 창수를 떠나고야 만다. 
 
영자는 왜 마이너스 1인 여자가 된 것일까. 젊은 빈곤 여성에게 안전한(성폭력으로부터, 산업재해로부터) 노동환경과 적정 보수가 제공되는 일자리가 없었던 당시 시대상황 때문일까. 아니면 자기는 몸 누일 방 한 칸 없는 상황에서도 집에 돈 먼저 부쳐주며 장녀의 의무를 다하려 한 영자의 판단착오 때문일까. 아니면 술을 마시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드는 성매매 일의 특성 때문일까. 이 영화의 포스터에 적힌 문구에서는 영자를 “우리가 만난 여자. 우리가 사랑한 여자. 우리가 버린 여자”라고 표현한다. 그래, 우리가 버렸지. 당시 붕괴되어가는 농촌에서 도시로 올라와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또는 살아남기 위해 온몸으로 버텼던 그 수많은 여공들, 성매매 여성들을 우리는 버렸다. ‘시대의 한계’라며, 개발과 성장의 논리 아래 부차시했던 다른 수많은 소수자들의 인권과 함께 스스로 알아서 살아남도록 버려버렸다. 
 
영자가 그래도 살아남기를, 그래서 그 시대가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말이 안 되었었는지를 이 시대에 이야기해줄 수 있기를 바랬다. (영화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 보여주는 영자의 마지막 모습은 뜬금없게 느껴졌다. 자신처럼 신체 장애를 가진 남성과 결혼하여 딸을 낳고 허름한 빈민촌에서나마 건강한 모습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집창촌에서의 원인 모를 화재로 사망하는 원작 소설의 결말과는 매우 다른… 원작의 결말이 더 사실성있게 다가오는 것은 나의 편견일까? 내가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영화는 기대보다는 훨씬 당시 시대 상황과 성매매 여성의 처지를 구체적으로, 사실적으로 보여주었다. ‘전성시대’라는 제목은 아무래도 역설적인 의도였던 것 같다. 아니면, 영자같은 사람들을 저버린, 개발과 성장에 동참하여 계층 상승을 이루고 눈부신 경제 성장을 한 나머지 우리들의 전성시대였다는 의미일까? 
 
활동이야기

[몹시]여성영화제 <우리삶의이야기들> 보고왔어요~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던 유월의 첫 날, 이루머들은 상콤하게 오전회의를 마치고 여성영화제로 향했다. 일찌감치 신촌에 도착해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유명하다는 ‘호00’ 팥빙수집에 가서 팥빙수도 한 판 때리고 나니 어느새 영화시간! 우리의 선택은 케냐에 있는 예술 집단 ‘네스트’의 창작 작품인 <우리 삶의 이야기들> 이었다. 2015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테디심사위원상과 파노라마 관객상을 받았다는 정보에 혹하기도 했고, 케냐 영화를 볼 기회가 또 언제 있을까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영화는 참여한 이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5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었다
. 학교에서 동성애를 이유로 정학을 받고는 호기심에 남자와 섹스를 해봤다가 관계가 틀어지고 마는 레즈비언 커플 이야기, 뒷골목에 있는 게이 바를 찾아갔다가 친구에게 발각되어서 도망가는 게이의 이야기, 농장에서 함께 일하는 베프를 사랑하지만 그가 여자 애인와 함께 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한 게이의 이야기…첫 세 에피소드를 보면서는 한국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과 이야기들에 한숨이 나오기도 하고, 워낙 익숙한 이야기들인 탓에 살짝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중간 중간 삽입되는 영화 음악과 이미지들이 흥미를 돋궈주었다. 게이바 출입을 들켜 친구에게 구타를 당하다가 도망가는 장면에서는 쿵쿵쿵 박자가 강한 음악이 함께 흘렀는데 평소 내가 들을 수 있는 음악과 매우 달랐다. 아마도 북소리를 베이스로 하는 아프리카 음악(아프리카로 통칭되는 것을 싫어한다고 하지만 달리 아는 정보가 일천하여ㅠㅠ)일 것 같았는데, 심장을 울리는 그 소리가 너무 좋았다. 영화 중간 중간에 들어간 ‘아프리카 음악’ 들과 케냐의 목화농장, 숲, 들판 등의 장면들이 신선하고 좋아서, ‘아 이런 게 다른 문화권을 접하는 묘미이구나!’ 생각했다.
 
네 번째 에피소드는 젠더, 인권 등을 공부하는 케냐 게이(^^;)가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에 갔다가 백인 성판매 남성과 성매매를 하는 이야기인데, 처음엔 성구매자와 성판매자로 만났다가 대화 끝에 로맨스로 이어지는 것 같은 암시를 하면서 끝이 났다. 그걸 보고 ‘성매매를 너무 낭만화 한 것 아니야?’ 라며 같이 본 친구와 성토를 하기도 했다. 평소 이룸에서 ‘소수자 성매매’ 사업을 했다고는 하지만 흑인 게이 성구매자와 백인 성판매자가 나오는 씬은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상상력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본 이유가 충분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에피소드가 가장 재밌었다. 정부에서 ‘동성애는 아프리카의 것이 아니다’라며 이웃에서 동성애를 신고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발표를 하는 뉴스를 보고는 잠들지 못하는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이다. 그 중 한 명은 뒷걸음으로 마을에 있는 영험한 나무를 7바퀴 돌면 남자가 된다는 설화를 떠올리며, 정말 자신이 그 나무를 7바퀴 돌아서 남자가 되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다는 상상을 하며 잠을 뒤척인다. 한국에도 지역마다 잊혀져가는 설화들이 참 많다는데, 성별이 바뀌는 내용이나 동성애에 관련된 것도 하나쯤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이런 상상력을 자극하는 내용은 언제나 흥미롭다.
 
책을 읽고 열띤(?) 토론을 하는 ‘몹시’도 좋지만, 간만에 용두동에서 벗어나 바깥바람을 쐬는 이런 ‘몹시’도 좋다. 영화제 곳곳에서 반가운 얼굴의 페미 언니들을 마주치는 것도 좋았고, 이루머들과 함께 퀴어영화를 보는 것도 좋았다. 내년에도 여성영화제 기간에도 ‘몹시’의 외도가 계속되길 바라면서! 이번 ‘몹시’ 후기 끝~~
 
<우리 삶의 이야기들> 영화가 궁금하신 분은~
http://www.siwff.or.kr/wffis2015/program/program_view.php?sang_no=1789&code=213&cook=2307195549b6e72da0f20150506033831


활동이야기

[몹시] 노년 성판매경험 여성을 만나자

1.

지난 4월 몹시와 5월 몹시는 시리즈물입니다. 주제는…….. 노년!!! 이룸은 요즘 노년 여성들을 만날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시작은 매우 사사로운 것이었습니다. 신년 워크샵에서 ‘나는 갑자기 할무니들을 만나고 싶어졌어. 노년?’이라고 툭 뱉은 것이 화근이 되어(제가 왜 그랬을까요…) ‘노년 여성 인터뷰 사업’이 뚝딱 기획되고 말았습니다.
‘우왕 할무니 조아, 이야기 재밌쪙’ 했던 처음 마음과는 달리.. 아직도 노년 사업은 번지르르한 이름하나 얻지 못하고 그저 ‘노년 노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지못미…..)
 
4월, 5월 몹시는 이 노년 사업을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사업과 사업간 MOU랄까요, 혹은 노년 아래의 산하 사업으로서 몹시랄까요. 여튼 여성들을 만날꺼고, 이야기를 듣고 싶으니까 그럼 구술사 작업을 하는 것일까?? 근데………………….. 그럼 구술사가 뭐징?-0- 알아보잣! 해서 만들어진 뽑아본 자료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경계’에서 – 용산 성매매 집결지 중‧노년층 여성의 이주체험을 중심으로(원미혜, )
‘과정’으로서의 구술사, 긴장과 도전의 여정(이나영, 2012)
여성주의 연구에서의 구술자료 재구성 – 탈성매매 여성의 생애체험과 서사구조에 대한 사례연구를 중심으로(이희영, 2006)

 
얘네들을 함께 읽는다고 뾰로롱 뭔가 잘 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대충 구술사가 뭔지 맛은 본 것 같습니다.

2.
 
그리고 4월에 읽은 구술생애사 방법론에 관한 논문들에 이어서 5월에는 최현숙씨의 <15소녀표류기> 1,2권을 읽었어요.
 
표류기의 여행기/이야기들은 자못 거칠고 날것이어서, 소설이나 영화를 읽을 때의 미끈한 쾌락과는 다른 감각들을 던져 줍니다. 표류기의 작가는 듣는 자이며 받아쓰는 자, 번역하는 자입니다. 그는 작품의 미학이 아니라 ‘할머니’들이 전시하고 구술하는 늙고 낡은 육체와 언어의 시간성, 그 혼란스러운 법칙을 따르고자 합니다. 이렇게 구술자와 청자는 이 이야기만을 위한 한 쌍의 임시적이고 즉흥적인 기관을 형성합니다. 이 공동의 이야기꾼들은 익숙했던 서사들을 비껴나가며 몸과 자아로 놀이를 합니다. “왜 하필 그런 내용을 그런 방식으로 말하는”가는 그녀들 고유의 권한이자 역량으로 그녀들에게 돌려주어집니다. 

독자는 이렇게 존재하게 된 이야기의 공간 안에서 자신의 몸이 겪는 느낌들, 감정들과 대면합니다. 다른 형식은 다른 주체를 요청하기에 독자는 세상에서 가장 비루한 노파의 모습을 한 예언자, 샤먼, 마녀를 해석하는 방법을 스스로 훈련해 나가야 합니다. “구술 자체가 정치적 에너지이자 연대의 제안”이기에, “듣고 쓴 사람과 읽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실천”을 고민하게 됩니다.
 
이야기하는, 이야기된 할머니들은 때로 노동 그 자체가 됩니다. 페이지들은 빼곡히 쌔가 빠지는 노동의 기록으로 채워집니다. 여성은 노동으로만 만들어진 정체성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여성은 관계로 수렴해버리는, 관계로 결정되는 오직 타자를 향한 헌신에의 욕망만을 지닌 존재로 자신을 재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녀들은 반짝이는 것에 홀려 길을 잘못 들기도 하고, 거짓 이력을 만들어 내며,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을 꾸며냅니다. 이들의 “노동과 살림과 놀이와 투쟁”을 목격하는 일은 참 체력을 요하는 일이었습니다. 같이 숨차하고 같이 버거워하다간 에라 모르겠다 삶 그 자체를 인정해버리곤 하면서요.
 
서사/내러티브는 이야기하는 존재, 이야기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나타내는 오랜 흔적일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 관해 이야기하고 이야기되면서, 그렇게 서로를 이야기 속으로 짜 넣어가면서 존재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부르는 이름은 이야기가 담긴 항아리 위에 붙여진 라벨 같은 것이 아닐까요? 인간은 이야기의 그물코, 모자이크 안에서 그의 이름으로 언급되고 회자되고 기억될 때 그저 흙덩어리가 아니라 일말의 깊이를 유지하고 있는 입체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 김미숙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그 이름은 그냥 납작합니다. 그녀의 주름을 본다 할지라도 아무도 그것에 관해 말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녀의 이름이 더 이상 어디에서도 어떤 방식으로도 인용되거나 참조되지 않을 때 그 삶은 윤회도 부활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김미숙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김미숙이라는 이름은 한 개별자의 총체를 상기시킬 수 있는 마법의 단어로 변모합니다. 
 
내러티브의 어원은 말하기이고, 이해하기라고 합니다. 왜 인간은 ‘순서대로’ 말할까요? 왜 인간은 단 한 순간 모든 생을 모든 곳에서 동시에 살거나 알거나 할 수 없고, ‘차례대로’ 자신의 가능한 모습들을 하나씩 하나씩 경험할까요? 그 이유는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을 것이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이유일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인간의 시간적 조건은 노인을 중요한 인물로 만듭니다. 노인은 곧 완전히 펼쳐져 펼쳐짐이 중단될 한계까지 아슬하게,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펼쳐진 사람입니다. “팔순의 몸을 빌려 입은 다섯 살배기 여자아이” 라는 표현처럼 이야기하는 동안 그의 몸은 생의 어떤 순간으로도 회귀할 수 있습니다. 대화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아주 오래된 의식이 아닐까요.
 
이렇게 15소녀표류기를 읽으며 앞으로 만나게 될 할머니들이 몹시 기다려지게 되었습니다!
최현숙 씨가 "(가난한) 사람은 무엇으로 행복해지는가?"를 탐구하며 여성들을 만나셨듯이, 이룸의 탐구를 해 나가보겠습니다!

 

활동이야기

[몹시] 이태원, TG, 성매매

올해 첫 번째 몹시에서는, 지난해 소수자 성매매 보고서의 기억을 가지고 이태원 아웃리치/별별신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읽어보고 싶어진 글들을 나누었습니다. 막달레나의 집 드랍인센터 이태원 사랑방을 경유해서 생산된 텍스트들을 중심으로, 성매매 그리고 규범성 및 공간성에 관한 논의를 엮어나가는데 아이디어를 던져주는 글들을 한데 모아 보았습니다.

루인 님의 캠프 트랜스: 이태원 지역 트랜스젠더의 역사 추적하기”, 막달레나 공동체 현장상담센터에서 제작한 <이태원의 수상한 사랑방><동네사람>, 그리고 <성의 정치 성의 권리>에 수록된 한채윤 님의 엮어서 다시 생각하기: 동성애, 성매매, 에이즈를 읽었답니다.

 

 

이룸의 소수자 성매매 보고서에서는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으로 성매매 현장을 인식할 때 성소수자 성매매가 아예 드러나지 않거나 규범에 끼워 맞춰져 해석되는 현상을 지적합니다. 보고서는 성매매에 특정한 한계를 지어 기존의 규범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 선에서 수용하고 재생산하려는 움직임에 저항하면서 성매매 현장과 만나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성애자 비트랜스 여성이라는 강요된, 고정된 젠더와 섹슈얼리티만으로 다종다양한 성판매가 경험되지 않는다는 것을 적시하려고 했습니다. 또한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구성하며 살아가는 경험 안에는 이미 성적인 피해, 착취, 거래, 교환, 노동, 자본, 친밀성 등이 착종되어 있음을, 역으로 그 착종된 양상 그 자체에서 유동하는 몸과 정체성을 읽어내야 함을 요구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여성주의적인 성매매 담론과 실천의 일환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캠프 트랜스에서는 이태원이라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 가능했던 관계들을 발명/복원/재창조하고자 시도합니다. 그렇게 이태원은 폐쇄되어야 하는 기지촌/집결지 또는 외국에서 들어온, 유교랜드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풍속들이 고여 있는 이상한 동네로 해석되는 것 이외의 새로운 역사를 확보합니다. 그리고 이태원은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과 치환 가능한 은유가 됩니다. 의료적, 법적으로 규정되는 좁은 의미의 트랜스젠더는 여성이나 남성 어느 하나로 분류되어야만 하고, 그 스스로 분류되기를 욕망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캠프 트랜스는 규범적인 인식체계 안팎을 끊임없이 배반하고 탈출하는 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져있음을, 우리가 그것들을 경험할 역량을 지닌 존재임을 상기시킵니다. 캠프 트랜스는 규범의 재생산에 봉사하는 기관이면서 동시에 규범을 위협하는 질병 또는 장애로 가시화되지만 실상 비규범적 존재들이라는 등재되지 않은 종들이 거주해온 비무장지대와도 같은 역사성과 잠재성의 영토였더라는 이야기를 써내려갑니다.

이처럼 하나의 정황, 풍경을 바라보며 쉬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들의 편에서 우리는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누락된 것이라고 발화하는 일은 언제 다시 읽어도 굉장한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 저항이 막달레나의 집 현장상담센터가 현장활동의 형식으로 이태원 지역에 다가간 기록에서 역시도 변주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태원이라는 공간이 불경기와 쇠락의 흐름에 놓여있는 상황에서 그 공간의 용도가 다 했으니 이제는 폐기처분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삶을 계승하는 새로운 삶의 공간으로 전이시켜나가겠다는 움직임의 기록이었죠. 공간과 관계가 축적해온 자원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신뢰, 그것을 발굴하고 연계하며 유통시키는 것이 의미 있는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를 함께 쌓아 나가자는 이야기로 들려왔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한편 공간이나 관계가 아닌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상담소의 구조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상담소의 형식상 내담자들은 개인으로 분절될 수밖에 없지만, 이들의 삶이 요청하는 것은 개인의 경제적, 의료적, 법적, 정서적 회복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언니들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성판매경험을 포함한 나 자신의 시간이 선택이나 비밀, 한때의 실수로 조각나고 봉인되고 삭제되지 않는 것, 그 자체로 통합된 사회적 삶으로 동등하게 평가받고 이해되며 회복해나가는 것일테니까요. 그러기 위해서 엮어서 다시 생각하기에서 시도한 바와 같이 낙인을 만들어내는 전략에 제 발로 포섭되어버리지 않는 운동이 필요한 것이겠죠.

 

이러한 논의들은 굉장히 추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게다가 이성애/이원젠더에 도전하지 않고도 어떻게든 성매매를 언어에 기입할 수 있기는 한데, 그렇다면 왜 이 시도를 해야 할까, 아니 더 정확히 하자면 여성운동의 공고한 이분법과 제도화 내부에서 어떻게 이 시도를 설득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남습니다. 소수자 성매매를 성매매의 특수한 사례로 다루지 않고, 성매매 담론 전체가 소수자성, 타자성, 비규범성으로 좀 더 정향할 수 있는 방식은 어떤 것일까요. 루인 님은 다른 글에서 젠더폭력을 젠더화하는 폭력으로 바라보기를 제안하는데요. 정체성을 향한 단 한 가지 해석만을 체화하도록 하는 폭력이라는 정의가 아직은 아리송하지만 이 짧은 제안이 어쩌면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하여 이룸은 왜 트랜스젠더 언니들을 만나고 싶었던 걸까요? 소수자 성매매에서 트랜스젠더 언니들을 인터뷰하면서 즐겁고 재미있었던 기억으로부터 그 서사를 더 듣고 싶다는 마음, 정보전달자/연계자/지원자로서 언니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 TG 성매매에서 성매매와 성적 실천의 경계에 관해 고민해보고 싶은 마음 등등!!! 우리의 마음을 하나씩 꺼내어보고 분명하게 해보는 (아니 더 혼란스러워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품이 많이 든다는 깨달음을 얻고, 앞서 그런 작업을 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이룸의 맥락으로 끌어들여 소화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다음 몹시도 몹시 기다려집니다~!

활동이야기

[몹시]우리들의 삶은 동사다

우리들의 삶은 동사다


141128 몹시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열림터에서 발간한 책입니다. 친족성폭력생존자들의 이야기인데요, 이 책의 출간기념회이자 열림터 20주년 자리에도 이룸은 함께했었습니다. 저희로서는 낯설지가 않은 책이죠.(왠일인지~ 낯설지가 않아요~♬)

책은 총 6장으로 이뤄져있고 각 장마다 쉼터, 고소 재판과정, 자립, 후유증, 엄마, 가해자 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루머 각자의 마음에 가장 와닿은 장은 조금씩 달랐습니다만 성매매피해여성을 지원하는 입장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엄마로, 생존자를 지지하는, 뭐든 간에 다들 절절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습니다.

‘아버지’를 고소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다른 가족구성원들로부터 ‘가족인데 용서해라’는 압박을 받기도 하고, 형사사법절차 내내 정말 피해를 당했고 ‘성폭력을 유발’한 잘못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합니다. 어버이날 카드에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 사랑하는 아빠에게”라고 쓴 내용이나 다정하게 보낸 카톡 메시지가 ‘장기간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가 취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니’라며 성폭력이 없었다는 증거물이 되기도 합니다.
생계 부양자인 가해자의 보호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기 삶을 지키려고 한 행동들이 법정에 오르자 ‘피해자다움’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죠.
 
고소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지만 많은 힘을 얻게 됩니다. 한편 궁금해졌습니다. 모든 고소 건이 승소로 이어지지는 않을 텐데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났을 때는 그 분노와 억울함을 어떻게 추스르는지 말입니다. 법이 피해자를 외면할 때가 많은 게 현실이니까요…………..ㅠㅠ 이룸에서의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가해자가 처벌받았을때의 기쁨보다 처벌받지 않았을때 피해자가 받게되는 상처가 훨씬 컸던 것 같습니다. 처벌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면 처벌받지 않았을 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달까요.

지난 몹시에서 가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해서인지 우리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가해자에게로 갔습니다. 도대체 무슨 마음(!)인 것일까 이런저런 추측을 해보았습니다. 

책을 읽고 발제를 하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을때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이야기가 중심인 이 책에서 주요 요점을 뽑아낸다는게 무슨 소용일까 싶어서요. 그냥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많은 분들이 읽었으면 좋겠고 그래서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용기내 이야기해준 생존자들에게도 고맙고 책의 형태로 만들어내어 함께 나눌수 있게 해준 열림터에게도 고맙습니다.

올해의 몹시는 이렇게 끝입니다!! 꺅 아마 내년에도 별일 없으면 계속될 것 같습니다. 

활동이야기

[몹시 후기]6월 몹시-논문<기획사 중심의 연예산업과...>을 읽고

 

기획사 중심의 연예산업과 이미지 상품으로서의 여성 연기자에 관한 연구(2014, 김신현경)

 

핫뜨거뜨거. 2014 따끈한 논문입니다. 이룸의 베프께서 추천해주셨고 김신현경님께 직접 전해받아서 몹시세미나를 즐….겁지는 않고 이래저래 좀 씁쓸한 마음으로 진행했습니다. 내용이 막.. 씐나고 재밌을 건 아니어서요… 왠지 좀 슬펐달까요.
논문의 질문은 이겁니다.
‘현재 한국의 연예산업에서 연기자 지망생과 신인 연기자들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인권침해적인 상황을 경험하고 수용하며 일을 지속하고 있는가?’
몇 가지 인상적이었던 부분,
 
– 기획사와 제작 단위간의 이해관계 조정을 통한 배역선정 방식인 ‘미팅’의 일반화는 공적인 일의 성사를 위해 ‘룸살롱 접대’ 등 성별화, 성애화된 방식의 ‘접대-네트워킹’이 당연시되는 우리 사회 남성 문화와 결합하여 작동하면서 ‘접대’, ‘미팅’, ‘성매매’의 경계를 애매하게 만든다. 이들을 이러한 위치에 놓는 행위자들의 존재와 권력관계를 삭제하고 자신의 성을 대가로 금전이나 출연기회 등의 자원을 얻으려고 한 시도로 손쉽게 전유된다.
 
– ‘발탁’과 ‘배역선정’을 둘러싸고 여자 지망생 및 신인들이 놓여있는 경쟁적 상황을 반영한다. 번성하는 ‘성적 루머’는 자신의 직업지위를 이용해 젊은 여성의 미모와 섹슈얼리티를 취하려는 남성들을 비가시화하고 ‘출연기회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자원화하는 여자들’이라는 범주를 도드라지게 전면화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여성들 자신의 선택에 달린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왠지 많이 기억에 남는 부분은 이겁니다.
– 이미지 상품’이 되기 위한 신체변형경험.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직업이니까’, ‘카메라로 보여질 때 넌 좀 흐릿한 인상이니까’라는 식의 언설들로 이미지 상품이 되기 위해 성형수술을 강요받는, 그리고 이게 강요인지 뭔지도 모르게 여성연기자들에게 내면화되는 과정이 있답니다. 이렇게 고쳐야할, 완성되지 않은 몸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서도 연기자를 계속 지망할 수 있으려면 이 와중에도 연기자를 해야하는 ‘뭔가 특별한 게 있는 나’라는 자아감각을 유지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감각은… 다른 여성들과의 경쟁적 비교를 통해서 유지됩니다 ㅠㅠ
여성연기자 언니야들은… 나만 고치는 거 아니다. 너나할 것 없이 다 고쳐야 된다!는 상황을 강조하면서도 인조인간처럼 된 나이트나 클럽에서 마주치는 여성들과 나는 다르다!고 차별화하게 됩니다. 다시한번… (이전에 몹시에서 읽은 적이 있는)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혐오가 등장합니다. ‘예외적 여자’가 되어 자기 이외의 여성들을 타자화함으로써 여성혐오를 전가하는 것……… 흙흙
 
 
여러 다양한 여성들이 나오는 영상물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인 소회로는…. 이 논문의 발제문을 들고 이룸 동료들을 보니이 오징어들.. 이렇게 해맑게 잘 살고 있구나!-_-;;;
오징어로 살 수 있어서 행복하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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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후기]6월 몹시-『보스턴 결혼』를 읽고 느낀 소감을 나눈 자리.


 

보스턴결혼이란, 19세기 미국의 청교도적 분위기에서 미혼인데 전문직인 여성들 간의 친밀성을 결합해낸 문화를 말한다고 해요. 그것을 로맨틱하면서도 성적이지 않은 여성들 간의 관계에 신보스턴 결혼으로 창조해내고자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19세기에 정의했던 개념과는 다르게 현재의 관계방식이 있다고 하나, 공통적인 것은 성적이지 않지만, 레즈비언 애인관계와 구별되지 않는 관계들을 일컫는다고 해요. 레즈비언 간의 사랑이 어느 정도의 기간을 보내고 나면 성적이지도 않으면서 애인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럼에도 최우선적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죠. 꼭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이 아니더라도 여성들 간의 강한 친밀감을 형성하는 예는 많잖아요. 책에는 성적인 관계에 주목하고 있지만, 그 외의 관계도 종종 예로 나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커플이라고 했을 때 성적인 관계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 둘 사이에 문제가 있음으로 보고 그것을 꼭 성적인 관계로 되돌려 놔야 정상적인 관계가 된다는 통념이 있잖아요. 흔한 예로, 부부사이에 성적이지 않으면 부부클리닉 같은 것을 통해서 말이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혼관계 내에서는 관계의 정상성이나 균열을 의심하지 않고 유지가 되지요.


그런데, 레즈비언 커플이 반려관계를 맺고 있을 때, 성적이지 않는 관계가 괜찮지 않다거나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어 지기도 하고 지인들에게도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압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해요. 물론, 이것이 미국의 문화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한국에서도 이러한 문화가 발현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쨋든, 여성여성 커플에게는 성적이지 않은 것이 관계 유지에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닌데, 여성남성 혹은 남성남성의 관계에는 성적 관계가 더 중요한 것처럼 보여지는데(무엇을 보고? 감히 이리 말해도 되는 것일까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너무, 여성단체 답지 않게, 여성은 관계중심, 남성은 엥?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안될꺼 같고, 그런데 어쨌든 그 현상은 비스무레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러저러한 추측과 가설에 대해 서로 이야기해 본 시간이 몹시였습니다.


,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성적인 행위 대신에 대안적인 블리스를 한다는 커플이 소개되고 있는데, 영혼과 영혼의 소통, 하나가 되는 일치감으로 그려지고 있어서, 그 말만 읽으면 인간과 인간의 참된 관계맺음이 이루어지는 듯해서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어서 아쉬움이 들었지요.


.. 어쨌든 관계의 문제라서.. 사회적으로 정상적인 관계라고 일컬어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 존중하는, 서로 합의에 의한 과정으로 관계 맺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어떤 관계인들 그렇지 않은 것이 있을까요. 책에는 주옥같이 아름다운 내용이 많이 있던 것 같은데, 보름 지나 후기를 쓰려니…. 휘발성이 참 강한 후기였네요^^;;
 

_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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