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되고 흐르는 삶의 맥락이 삭제되지 않는 제도를 질문하며_구지혜(다른)_성매매x여성노동x여성빈곤 세미나 후기

 

연결되고 흐르는 삶의 맥락이 삭제되지 않는 제도를 질문하며

– 성매매x여성노동x여성빈곤 세미나 후기

구지혜(다른) 

 

낙인과 혐오에 가려진 이들의 목소리는 온전히 들려지기 어렵다. 이는 어떤 존재가 경험하는 복잡한 현실이 단순하게 압축되거나 재현될 가능성과 상통한다. 특히 한국 사회는 ‘한정된 자원’을 핑계로 낙인과 혐오가 축적되어온 역사를 추적하고 걷어내려는 노력보다, 실재하는 누군가의 현실을 정상성의 틀로 재단하거나 고정하는 ‘쉬운’ 방식을 택해왔다. 

 

이러한 방식의 채택이 반복되는 사회 속에서 형성된 각종 제도와 규범은, 어떤 이/집단을 ‘정상적인 시민’으로 수용/배제할지 구분하는 논리에 힘을 더하며, 사회 구성원이 서로의 삶에 대한 연대와 지지를 보내기보다 단절과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구도를 재생산하고 있다. 그만큼 주변화된 이들이 경험하는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선, 배제와 분리를 용인하는 다층의 사회권력을 거슬러, 지워진 ‘맥락’을 짚어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성을 거래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여성은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과 동떨어져 살아가는 진공 속의 개인처럼 여겨진다. 이에 따라 이들의 삶의 ‘맥락’과 뚝 떨어진 특정 이미지가 의료, 문화, 정치, 복지 등 일상을 구성하는 영역에 스며들어, 사회 구성원들의 사고방식, 사회문화 곳곳을 유령 처럼 떠돈다. ‘성매매 여성’에 관한 단순하고 고정된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영향을 주고받은 규범들은 한데 뭉쳐 이들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거나, 혹은 손가락질 해도 허용되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성매매를 하는 여성이라면, 특정 이미지에 따라 응당 갖춰야 할 감정, 행동양식, 물적 조건이 그저 ‘정해진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럴 리가(혹은 그럴 수가) 없다.’. 

 

온갖 규범이 교차하며 구성되는 사회를 살아가고, 그 사회에 영향을 받으며 다시 구성되어가는 개인이 고정불변한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연하다. 돈이 곧 권력이 되는 자본주의 체제, 정상가족 바깥의 관계성에 대한 폄하, 건강한 몸에 대한 신격화-질병/질환자에 대한 혐오, 성인-남성-비장애인-선주민 중심으로 기획된 사회 질서…등 그 자체가 원인이자, 결과이기도 한 사회구조적 모순은 깔끔하게 하나의 이름, 하나의 현상으로만 떨어지지 않는다. 성별, 계급, 연령, 성적 지향, 성정체성, 이주, 장애 여부 등 개인이 처한 조건에 따라 그 영향을 받는 정도도 달라진다. 

 

이러한 현실이 성을 거래하는 현장과 무관하다거나, 성매매와 얽혀있는 일상을 통과하는 여성과 분리될 수는 없다. 사회는 이와 같은 진실을 뒤로 하고 성매매 여성을 마치 고정된 세계를 살아가며, 불변하는 고유명사처럼 호명한다. 이는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는 개인의 삶의 맥락을 지워내고, 사회가 읽어내기 쉬운 선-통치 질서에 위협이 가지 않는 기준까지만 이들의 존재를 받아주겠다는 의미다. 그 결과, 사회보장체계는 성매매를 둘러싼 물적 조건을 변화시켜 이와 연관된 이들의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는 방향이 아닌, 배제를 동력으로 작동하는 사회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제도만을 재생산하고 있다. 

 

예컨대 사회보장-법체계 안에서 성매매 여성은 복지 서비스 지원 ‘대상’이자, 동시에 ‘비정상’적인, 언젠가 탈(脫)해야한다고 여겨지는 거래(이른바 ‘범법행위’)를 하고 있는 이들로 여겨진다. 이와 같은 전제는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 임금노동에 진입이 가능한 여성, 혹은 복지 서비스 지원 대상 ‘바깥’의 여성으로 국가권력이 시민을 ‘평가-선별’하는 차별로 얼룩진 결과로 귀결된다. 

 

이러한 귀결은 노동윤리-노동신성화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 역사는 ‘일할 능력’을 기준으로 생산성 제고에 기여할 이/그렇지 않을 이를 구분하여 시민 간의 분리와 서열화에 공모해왔고, 궁극적으로 사회에 교차하는 정상성 신화에 불을 지폈다. 또한 노동의 내용과 방식을 ‘임금노동’ 중심으로 기획하여, 돌봄과 자연환경 등과 같이 존재를 연결하고 사회를 지탱하는 여러 가지 동력에 대한 평가절하와 착취를 일삼으며, 자본을 획득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배제를 지속해오고, 이를 정당화하는 규범에 개입하지 않은 채 방치했다. 따라서 막상 임금노동에 ‘진입’하더라도, 성별임금격차, 성별이분법-비장애인 중심으로 기획된 일터/일의 내용, 부모-친권자의 강력한 법적 권한과 결부된 십대 노동자의 현실 등에 관한 문제는 ‘임금노동’ 중심으로 짜여진 장에서 필연적으로 지속될 수밖에 없다. 빈곤과 노동의 문제가 끊임없이 순환하며, 자원 없는 이들에 폭력적이고 모순적인 현실을 계속해서 만들어온 것이다. 

 

성매매 여성을 지원한다는 목적의 사회보장제도는 이 구조를 포착하지 못하고, ‘탈성매매’=임금노동이라는 공식을 토대로 이에 대한 과도기적 지원만을 제공한다. 해당 과정에는 ‘임금노동’이라는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훈련하고 교정되어야 할 이등 시민으로의 재현이 남겨진다. 이러한 사회적 제스처는 성매매 여성이 ‘일할 능력’이 있음에도 ‘임금노동’을 하지 않는 음란하고 사치스러운 여성이라는 사회 프레임에 침묵한다. 또한 이주, 장애, 퀴어 등 소수자성을 지닌 성매매 여성들이 취약한 조건에 내몰릴 경우, 생존에 필요한 복잡다단한 자원의 부재-빈곤의 문제로 이들의 맥락을 고려한 사회적 경청이 이뤄지지 않을 때, 공동체의 목적, 복지의 목적, 공적 공간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제 기능을 상실한다. 

 

그러니까, 복지서비스를 지원함으로써 성매매 여성들의 ‘어떤 현실’에 개입하려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흐리다는 이야기다. 그토록 바라는 임금노동으로의 진입이 목적인데, 이 여성들이 ‘그’ 임금노동에 진입하지 않(못)았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사회는 스스로 던져보아야 한다. 그 질문이 있어야만, 해당 원인을 기반한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성매매 여성들의 현실에 어떤 권력(경찰-단속, 가부장제, 국경, 정상성 규범…)이 개입해 왔는가에 관한 추적이 가능해지고, 이에 균열을 낼 사회복지제도의 존재 목적을 분명하게 정립할 수 있게 된다. 

 

최소 국가가 성적 거래로 생계를 유지하는 여성들이 경험하는 취약한 일상에 매순간 제도로서 함께하지 못할 것이라면, 그들이 함께 하는 관계가 지켜질 수 있는 방향으로 사회복지제도는 다시 기획되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돌봄을 중심으로 기획되는 사회보장체계는 필수적이다. 각자의 현실 속에 맺는 관계에 대한 존중 없이 ‘가족’으로 회귀 되는 제도의 내용이나 자율성이 동반되는 삶의 장소가 보장되지 않는 방식의 제도는, 각 시민 고유의 관계와 삶을 존중하는 방식이 아니다. 

 

이처럼 성매매와 여성노동, 여성빈곤을 연결 짓는 사유작업은, 성을 거래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여성들을 계속해서 주변화하는 사회권력을 선명히 되짚게 하여, 이들의 삶의 ‘맥락’이 어떻게 가려지고, 사라지는가에 관한 질문을 가능케 했다. 사회에서 타자화된 존재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할 때는, 자원을 얻을 수 없는 조건을 사회가 어떻게 만들어왔는가를 반드시 먼저 역질문해야 한다. 그랬을 때야만 자원이 없는 상황에서 생존을 가능케 했던 관계, 공간,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선명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