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틀 넘어 ‘성적 인신매매’ 해결나서야
국제인신매매방지 전문가회의 열려
희영 기자
한국의 성매매 업소들에서 필리핀, 러시아 등지에서 온 외국인 여성들의 모습을 찾아보는 건 이제 어렵지 않은 일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예술흥행비자(E-6)를 통해 외국인 여성들이 ‘엔터테이너’ 명칭으로 유입되기 시작했고, 그보다 더 많은 외국인 여성들이 관광비자로 국내에서 체류하며 각종 성매매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또한 한국 여성들의 외국 성매매 산업 유입 역시 전부터 계속되어 온 문제다.
최근 이들의 인권현실에 대해 국내외적인 문제제기가 시작되면서 국제적인 ‘성적 인신매매’에 대한 인식도 확산되고 있다. 여성부와 법무부가 22일, 23일 양일간 공동주최한 국제인신매매 방지 전문가회의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 ‘국제적인 성적 인신매매’ 문제해결을 위한 정부와 입법부의 역할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엔 세계 39개국의 인신매매, 성매매 문제 관련 전문가와 국내 시민단체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성매매방지법 제정, 아시아기금 등 제안
한국엔 인신매매의 다양한 형태를 규율하는 통일적인 법체계가 없다. 또 국제간 인신매매에 대한 국내법적 대응도 미비한 형편이다. 민주당 조배숙 의원은 “외국인 여성이 예술흥행비자 및 관광비자로 유입되어 성산업에 종사하면서 착취를 당해도, 이들의 상황과 처지를 ‘인신매매’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밀입국이나 불법취업, 윤락행위 등의 범법행위를 했다고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로 인해 관련범죄에 대한 수사가 이어지기보단 외국인 여성을 강제 출국시킴으로 범죄수사의 결정적 단서를 없애버리는 행동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조배숙 의원은 “국내 성매매 문제 뿐 아니라 외국인 여성의 유입과 성적 학대에 대한 조항을 담고 있는 ‘성매매방지법’의 조속한 제정과, 아울러 국가간 성적 인신매매 방지를 위한 관련기관의 협력 조항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 회의에선 외국의 제도적인 대책을 소개하고 공조를 모색하는 논의가 이어졌다. 국제적인 ‘성적 인신매매’ 문제에 대해 우리보다 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호주의 경우, ‘국제연합 인신, 특히 여성과 아동의 매매 예방 및 억제를 위한 의정서’를 비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정부 각 부처간 인신매매에 관한 공조(IDC)가 시작되고 있다.
아시아 대부분 국가가 그렇듯이 캄보디아 역시 인신매매의 원천지이자, 경유지이자 목적지다. 캄보디아는 여성-퇴역군인부가 주축이 되어 자국에서 인신매매 관련한 법 알기 운동, 법집행 개선, 예비피해자들에 대한 교육 등 활동을 펼치는 한편, 태국과 베트남(캄보디아 인신매매의 목적지)과의 양자 협력을 시도함으로써 인신매매의 흐름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참가자들은 인신매매 관련한 정보공유체제를 갖추고, 아시아 지역에서만이라도 실태조사를 위한 국가간 공동조사단을 만드는 일에 착수하자고 제안했다. 또 이를 위해 ‘반인신매매를 위한 아시아 기금’을 조성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인신매매에 대한 정보부족, 미디어 캠페인 필요
성적 인신매매 방지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외국 참가자들이 중요한 대책으로 꼽고 있는 것은 ‘캠페인’이다. 국제이주기구(IOM)의 J.S.쿡씨는 전국단위 설문을 통해 여성 인신매매에 대한 사실을 수집하고, 이를 토대로 인신매매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내는 ‘인식제고 프로젝트’를 소개, 제안했다. 여성들이 사는 곳을 직접 찾아가 구체적인 법 정보를 알려주는 것과, 관련 정부부서가 모여 인신매매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것 이외에도 라디오 공공방송, TV다큐멘터리, 언론인 세미나, 포스터 부착 등의 다양한 캠페인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
또한 정부뿐 아니라 NGO간의 협력을 통해 인신매매 피해자들에게 쉼터 및 심리적 신체적인 지지와 훈련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를 위해선 NGO의 국제적인 네트워크, 그리고 NGO와 각 지역과의 연대가 필수적이다.
문제해결 위해선 국가의 틀 넘어야
한편, 전문가 회의에 참석한 한 캄보디아 참석자는 유니쎄프에서 제작한 ‘캄보디아 인신매매에 관한 미디어 캠페인’(부모가 가난 때문에 딸을 파는 내용) 영상을 보고 격양된 목소리로 “캄보디아에서는 부모가 딸을 파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소리쳤다. 또 독일의 한 대학 법학교수라고 소개한 참석자는 회의에서 ‘인신매매 목적지’로서 유럽과 미국이 계속 이야기되는 것에 대해 “독일에서는 인신매매가 일어나지 않는다”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기도 했다.
성적 인신매매 문제를 국제적인 차원의 문제로 다루고자 하는 시도가 쉽지 않은 일임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국경을 넘나들며 행해지고 있는 성적 인신매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그 대응책 마련 역시 국제적인 공조체제를 통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위상과 체면이 우선시된다면 국가간 공조체제가 제대로 구축되고 실천되는 일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여성과 아이들을 성적 노예로 만들고 있는 국제적인 ‘성적 인신매매’ 문제 해결을 위해 먼저, 국가의 틀을 넘어서서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갖는 것이 절실하다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