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막일 전전…업소 복귀도

탈출…막일 전전…업소 복귀도 (2005-03-21)

■ 성매매특별법 6달

지난해 9월23일 발효된 ‘성매매 처벌에 관한 특별법’이 시행된 지 6개월이 지났다. 경찰의 집중단속과 업주들의 반발로 큰 파문이 일어난 가운데 50만명으로 추산되는 성매매 여성들은 지난 반 년을 어떻게 보냈을까? 특별법 시행 당시 업소에서 일했던 세 여성으로부터 그들이 겪었던 서로 다른 삶을 들어봤다.

세 여성의 6개월 삶

밀린임금 청구했다가 포주에 폭행 당해
일자리 찾는곳마다 퇴짜…허드렛일 연명
적은보수 힘든일 적응못해 설달만에 다시…

#1 포주 학대를 받다 탈출한 윤소진씨=경기도의 한 성매매 업소 밀집지역에서 일하던 윤소진(25·가명)씨는 이달 초 성매매 업소 탈출에 성공했다.

지난 3년 동안 성매매로 밥벌이를 했던 윤씨는 지난해 10월 중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성매매 특별법 반대 시위에도 참가했다. 시위는 포주들에 의해 조직된 것이었지만, 윤씨도 시위에 어느정도 동조를 했기 때문이다.

“당장 돈을 못 버니까 항의하고도 싶었어요. ‘삼촌’(포주)들은 ‘여성부랑 여성단체들도 너희들을 이용한다. 텔레비전 인터뷰에 나오는 아이들도 다 대본을 그대로 읽는다’고 언론을 믿지 말랬어요.”

특별법 시행 초기, 일이 없던 윤씨와 동료들은 포주와 함께 동해안 여행도 가고, 집회에도 참석하며 한 달을 보냈다. ‘삼촌’은 떠나려는 여성들에게 “조금만 버티면 단속이 다시 뜸해질 것”이라며 회유하다가도, “경찰에 잡혀가도 너희들을 도와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며 협박을 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말, 포주가 말한 대로 다시 업소의 불은 켜졌고, 여성들은 정문으로 손님을 받기 시작했다. 포주들은 ‘경찰이 단속이나 큰일이 있을 때 미리 알려준다’고 자랑까지 했다.

하지만 장사는 예전 같지 않았다. 부모님에게 돈을 마련해주기로 약속을 했는데 돈이 벌리지 않았다. 포주에게 ‘일을 그만두겠다’며 밀린 임금 등 5천만원을 돌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포주는 차일피일 미루며 돈을 주지 않았다. 결국에는 포주가 “죽여버리겠다”며 윤씨와 친구를 때리고 흉기로 위협까지 했다. 친구는 흉기에 몸을 베이기까지 했다. 윤씨와 친구는 그제서야 포주를 경찰에 신고했다.

20일 만난 윤씨는 앞으로 ‘어려운 이들에게 봉사를 하겠다’는 꿈을 다지고 있었다. 그는 “성매매인 줄 알고 들어온 여성도 포주의 학대까지 알고 오지는 않는다”며 “여성단체말고는 성매매 특별법 시행 이전에 우리가 맞아죽든 말든 관심이라도 있었냐”고 되물었다.

#2 일자리 찾아 전전하는 김아정씨=10년 동안 성매매 생활을 한 김아정(35·가명)씨는 지난해 12월 전남 쪽 광주의 한 업소에서 탈출했다. 그러나 그를 반겨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고졸인 그는 처음에는 사무직에 들어가려고 몇몇 회사에 지원했다. 그러나 컴퓨터기술이 없어 가는 곳마다 퇴짜를 맞았다. 나중에 어렵사리 한 회사에 취직했는데, 알고 보니 다단계 판매회사였다. 그래서 열흘 만에 그만뒀다.

김씨는 ‘눈높이’를 낮췄다. 주유소와 편의점, 커피숍 등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봤다. 그러나 이곳도 그를 반기지 않았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막노동’ 쪽으로 방향을 틀 수 밖에 없었다. 생계 유지를 위해 식당 설거지, 창고 물건 나르기, 전단 돌리기 등을 닥치는 대로 했다. 하지만 몸이 약한 그로서는 이마저도 힘들어 한 번 일을 하고서는 며칠씩 쉬어야 했다.

19일 서울에서 만난 김씨는 “구직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며 “여전히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다”고 눈물을 훔쳤다. 그는 “30대 중반 여성이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정신과 치료 등을 받으며 허드렛일 자리를 전전하고 있으나, 여성단체의 도움을 받아 틈틈이 목걸이·귀걸이 등을 만드는 구슬공예를 배워 창업을 준비중이라고 했다.

#3 업소로 다시 돌아간 안송이씨=경기도의 한 룸살롱에서 일하는 안송이(24·가명)씨는 지난해 9월 성매매 업소를 탈출했다가 석 달 만에 다시 업소로 돌아갔다. 법 시행 초기, ‘기회다’ 싶어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다 결국 업소로 돌아간 것이다.

안씨는 “울고 나간 친구들도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며 “어차피 집이 너무 가난해서 부모님 버는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힘들고, 또 업주들이 하루 한번씩 전화해서, ‘언제 올거냐’ ‘어차피 망가진 거 돈이나 벌어라’ 이렇게 유혹하니까 다시 오게 된다”고 말했다.

안씨는 “구직 노력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인정하면서도, “룸살롱에서는 적어도 한 달에 200만원은 버는데, 편의점이나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를 하면 100만원도 못 받아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룸살롱은 업소 밀집지역과 달리 술은 많이 먹지만 하루밤 여러 사람을 상대하지 않아 그나마 낫다”며 “성매매도 나중에는 어차피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는 돈을 벌면 아이스크림 가게를 내는 것이 희망이다.

그가 일하는 업소에는 지난해 9월 말 당시 35명 정도의 아가씨가 있다가 한때 10명 안팎으로 줄었으나 다시 25명으로 늘어났다. 안씨는 “전에는 손님이 열 테이블 오면, 여덟 테이블에서는 2차를 나갔는데 돌아온 뒤에는 4~5개 테이블밖에 없다”며 “손님들이 처벌이 두려워서인지 많이 꺼리고, 카드 결제도 꺼려 성매매 자체는 줄어들었다”고 달라진 분위기를 전했다.

서수민 길윤형 기자 wikk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