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매매하다 자활센터 상담원으로
멘토로 활약하는 탈성매매 여성들
<경향신문> 2007년 8월 23일 (목)
김숙진씨(39)는 ‘탈 성매매여성’이다. 열일곱 살부터 20년간 성매매 생활을 하다 3년 전 그 생활을 청산, 탈성매매 여성지원시설에서 교육을 받은 후 현재 성매매 여성들을 상담하는 동료상담원으로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인터뷰를 한 날도 이제 막 성매매에서 탈출한 다른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왔다고 했다.
“제가 선생님들에게 상담받을 때는 잘 몰랐는데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적절한 상담을 해주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아직은 전문상담이 아니라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는 정도이지만 아직도 누굴 상담해주는 게 실감나지 않아요.”
온화한 표정으로 조곤조곤 말하는 겉모습만으로는 그녀의 과거를 짐작하기 어렵다. 이젠 악몽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김숙진씨의 지난 20여년은 파란만장한 여인잔혹사다.
부산이 고향인 숙진씨는 완월동 근처에 살아 집창촌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어릴 때 아픈 자신을 돌봐준 수녀님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져 수녀가 되고 싶었지만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말종’인 오빠가 너무 괴롭혀 중3때 가출했다. 근처 술집에 있다가 오빠에게 들켜 흠씬 두들겨 맞고 다시 가출했다. 스무 살 무렵엔 신발공장에 취업했지만 오빠가 월급을 뺏아가 그만 두고 다시 객지를 떠돌았다. 가족과 인연을 끊고 살아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년 후에야 소식을 들어 아직도 가슴 아프단다. 그러다 3년 전, 성매매방지법 시행과 함께 여성가족부가 지원하는 성매매여성자활지원센터의 도움을 받았다.
“자발적으로 뛰쳐나온 건 아니에요. 제가 일하던 업주가 성매매방지법이 시행되자 핑계김에 젊은애들로 물갈이를 하고 싶었는지 저처럼 나이든 사람들에겐 순순히 나가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것저것 빚을 청산하고 나니 제손에 남은 돈은 14만원뿐이었어요. 배운 것,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돈도 없는데 어딜 가서 뭘해요.”
못나가겠다고 버티니 업주가 동료여성들과 살라며 원룸을 구해줬지만 생계가 막막했다. 생활비를 벌려고 취직한 다방도 성매매를 강요하는 티켓다방이었다. 다시는 성매매를 하기 싫어 친구 집으로 옮겼다. 6개월을 얹혀 살자니 눈치가 보여 전전긍긍하는데 아는 동생이 자활센터에 가자고 권했다. 이곳에서 숙진씨는 상담을 받고 각종 치유와 자활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이곳에서 주선한 사회적 일자리에 참여해 한 달에 70만원 정도의 돈을 벌고 있다. 성매매를 할 때 숙진씨의 월 수입은 300만원 정도. 하지만 수입의 반을 고용주가 가져가고 전기·수도료 등 각종 공과금은 물론 미용실, 화장품, 옷 등도 모두 그들이 지정한 제품이나 장소에서 구입해야 하고 수건과 이불 등 손님을 위한 물품도 그녀의 몫이어서 영화 한 편 보지 못해도 한 달에 손에 쥐는 돈은 10만~20만원 정도였다.
“제게 일거리를 알선해주니까 업주가 절반을 가져가고 제 돈으로 물건 사는 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였죠. 그 사람들은 수입외제차를 타고 다니고 나중에 보상비까지 받고 부자가 되었고 전 20년을 성매매를 하고도 14만원이 전재산에 온몸에 병만 들었지만 억울하다거나 ‘이게 아닌데’라며 항의할 힘조차 없었어요. 착취당하는 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자신에 대해 생각할 의지나 능력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그땐 정말 하루 열명쯤 손님이 와도 힘든 줄도 몰랐거든요.”
성매매란 ‘직업’은 24시간 종일 근무제다. 손님이 오면 새벽이건, 국경일이건 가리지 않고 일해야 하고 아무리 아파도 내색조차 못한다. 고교생부터 칠순 영감까지 다양한 손님 중에 ‘난 널 돈 주고 샀다’고 주장하며 인형이나 동물 취급을 하는 이들에게도 반항할 엄두조차 못 냈다. 하루 종일 빛도 들지 않는 방에서 살며 성매매만 하는 환경에선 인격이나 인권은 개념조차 없었다. 담 너머에 자유와 풍요로운 세계가 있다 해도 모든 세상이 자신이 사는 척박하고 열악한 곳과 같다고 믿으면 개선이나 탈출의 의지도 생기지 않는다.
숙진씨는 스물여섯살 때 결혼도 했다. 술집에 나갈 때 만난 아이 셋 있는 이혼남이었다. 예민한 사춘기의 아이들에게 좋은 새엄마가 되는 것도 힘들었지만 남편의 습관적인 거짓말과 돈을 벌라며 다방에 나갈 것을 권유하고, 그 수입까지 가져가 버리는 것에 환멸을 느껴 3년 만에 이혼했다. 결혼생활에 대한 환상도, 장밋빛 꿈도 깨지고 다시 돌아올 곳은 집창촌뿐이었다.
30대 중반부터 ‘퇴행성’의 이름이 붙은 각종 병이 생기고 C형 간염에 허리디스크 등 몸은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으로 변해갔지만 그 생활을 벗어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3년 전, 일부 남성들에겐 최악의 법이란 성매매방지법이 시행되면서 그녀의 몸과 마음을 묶어둔 족쇄가 풀렸다. 최근 자신들이 성노동자라며 노조를 결성해 영업을 지속하겠다는 성매매여성들에 대해 숙진씨는 업주들의 탓이라고 말한다. ‘너희는 성매매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나가면 더 고생’이라고 끝없이 주입·세뇌하기 때문이란다. 자신도 처음엔 너무 두렵고 암담했지만 3년 동안 자활훈련을 받은 지난 지금에야 겨우 실낱 같은 희망의 빛이 보인다고 했다.
“자활프로그램 가운데 자신에 관한 글을 쓰는 시간이 제일 힘들었어요. 한번도 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서 글로 표현해본 적이 없거든요. 또 집중해서 강의를 듣거나 뭘 만들어본 적도 없어서 수업 중엔 머리 아프고 졸렸어요. 행사장에 함께 참가하라고 하면 ‘왜 해야 해?’라고 짜증이 났죠. 보통 사람들은 싫어도 참고 남들과 어울려 살지만 우린 그런 생활을 못해봤으니까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자서는 잘 못나가고 다녔던 길로만 다녔어요. 여전히 바깥 세상, 저를 보는 시선이 무섭고 두려워요. 공장, 다방, 술집, 집창촌 등 일한 곳은 많은데 전에 뭐했냐고 하면 할 말도 없고요. 곧 마흔살이 되지만 20년 간의 성매매 생활이 제 뇌기능을 마비시켜서 저는 지금 만 세 살이라고 생각해요.”
숙진씨가 자활프로그램 중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도자기 공예. 손으로 흙을 만지고 모양을 다듬는 시간이 너무 행복해서 수업이 끝난 후에도 늦도록 그릇을 빚는다. 자신이 디자인한 향초를 담는 그릇은 판매처에서 주문을 받을 만큼 인기. 개당 판매가가 1만원이라 자신이 받는 수익금은 몇천원뿐이고 손으로 만들어 많이 만들지도 못하지만 적은 돈이라도 통장에 쌓일 때 느끼는 뿌듯함은 표현하기 힘들단다.
“그동안 웃을 일도 없었지만 웃을 줄 몰랐는데 이제야 웃기 시작했어요. 동료들이 제게 ‘따뜻한 사람’이라고 인정해주는 것도 기쁘고요. 아직은 제 상처를 털어놓는 것도 고통스럽고, 다른 성매매여성들이 제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참 조심스럽지만 진심은 통하리라 믿어요. 제 마음과 생각이 긍정적으로 변하니까 제 몸도 건강해지는 것 같고, 결국 제 인생도 밝게 변하겠죠.”
길고 어두운 터널에서 이제야 벗어나 아직은 햇살에 눈이 부신 김숙진씨. 여전히 가난하지만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자존심’을 찾았다. 자신이 자신을 먼저 보듬고 사랑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행복하다.
[현장에서 만난 여성]멘토로 활약하는 탈성매매 여성들
여성가족부는 탈 성매매 여성 40명을 ‘동료상담원’으로 채용, 8월부터 성매매피해상담소와 지원시설 10개소에 배치했다. 2004년 9월 성매매방지법 제정 후 탈 성매매 여성에 대해 직업훈련 등 자활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은 제공돼 왔지만 사회적 일자리를 지원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 성매매 피해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서 성매매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이들이 성매매 피해 여성과의 소통이 원활하고 접근하기가 쉬울 뿐 아니라 지원을 받는 여성에게 역할 모델로 작용해 활동의 파급력이 클 것으로 여성가족부는 예상한다.
이 사업에 참여하는 동료상담원들은 상담소, 쉼터, 자활지원센터 등 성매매 피해자 지원시설에서 직접 성매매 피해 여성들에게 상담과 조언, 치유와 재활 지원 등의 도움을 주게 된다. 특히 이들은 자활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배운 간병, 미용 등 직업기술을 활용해 성매매 피해 여성에 대한 간병, 이미지 컨설팅 등 치유와 자활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