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이룸공부방 기획간담회 두번째 : 재생산X커먼즈 후기 하나, 소윤

올해 이룸공부방에서 기획한 두번째이자 마지막 간담회, 백영경 선생님과 함께하는 재생산 그리고 커먼즈 간담회가 8월 23일 금요일 이룸 사무실에서 열렸습니다.

 

공부방이 이 두 키워드로 간담회를 하게 만든 사건 그로 인해 궁금했던 것들은  두 가지 정도로 압축되는 듯 합니다.

첫번째는 청량리 집결지 재개발/폐쇄 국면에서 불량언니 작업장으로 이어지는 활동 속 고민의 활로를 주거·금융·기본소득·공동체 등 커머닝 운동의 시야를 빌려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했어요. 커먼즈 자체의 정의를 여성주의적으로 전환해보고 싶다는 욕구도 있었구요.

두번째는  2019년 낙태죄 위헌 판결 이후의 시간 그리고 대리모를 둘러싼 논쟁을 경험하며 빈곤한 여성의 재생산 경험을 앞으로 재생산권 운동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이룸의 언어로 풀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던 것 같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연구자 백영경 선생님이 와주셨지요!

선생님은 재생산과 커먼즈 알못이었던 우리가 두고두고 꼭꼭 씹어먹을 수 있을 잡곡밥 같은 명강의를 들려주셨어요.

두 이론을 성매매 현장과 연결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예감이 좀 더 뚜렷한 확신이 된 듯 합니다. 아직은 고민 단계이지만, 더 고민해봐도 좋다는 그런?

“이렇게 상식적인 고민을 이렇게 진지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두 차례의 간담회 준비모임 속기록을 받아보신 선생님의 한줄 평인데요 ㅎㅎㅎ

공부방의, 이룸의 현장에 몸으로 함께 울고 웃으러 달려와주실 분들이 어디에 계신지 그저 만나고 싶어서 이런 모임을 했던걸까 싶어지며 벅찼어요. (여기에는 쌓아놓은 귀한 관계들을 아낌없이 연결해준 공부방 현미의 조력이 있었던!)

하반기의 공부방은 이룸의 토론회, 북토크, 영화제 등 곳곳에서 살뜰히 함께하며 올해를 잘 마무리해보겠습니다. 내년도에도 성매매 현장과 연결할 수 있는 키워드의 확장과 네트워킹의 지속, 더 다양한 사람들과 폭넓게 만날 수 있는 강의 개최 등 공부방의 활동을 계속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오늘은 8월의 간담회를 참여자 후기 조각모음으로 알려봅니다. 첫번째로, 성실히 준비모임 발제를 하고 간담회 질문을 만들며 우리를 단단히 이끌어준 소윤의 꼼꼼한 메모를 공유합니다!

 


 

2019 이룸공부방 기획간담회 두번째 : 재생산X커먼즈 소원의 후기 보러가기
2019 이룸공부방 기획간담회 두번째 : 재생산X커먼즈 현미의 후기 보러가기

 

190823 이룸공부방 백영경선생님 간담회 조각후기/메모
작성: 소윤

 

[질문1] 재생산 신기술과 여성신체?
[질문2] 재생산이라는 개념이 지시하는 것이 무엇인가?
[질문3] 재생산을 임신-출산을 초과하는 넓은의미로, 그리고 권리개념으로 이해할 때, 권리의 주체가 반드시 대문자 여성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기억에 남는 부분들 요약

*재생산권리의 주체? 재생산을 권리개념으로 이해한다고한들….애초에 그것의 주체는 자유주의적인 의미의 근대적 주체로서 ‘개인’을 넘어서는 측면이 있다. 재생산이라는 문제는 개인에게 귀속되는 종류의 권리(ex: 소유권?)로 이해할 수 없음. 재생산이라는 것 자체가 (단지 한명의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뜻이 아니라) 한 사회의 ‘문화’를 생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에 개인 한명의 행위나 노동으로 환원될 수가 없고, 사회규범과 제도를 재조합하고 체현하는 신체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연루된 모든 행위자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접근가능함. → 재생산을 이야기할때 빼놓을 수 없는 특징 중 첫번째는 ‘감정’에 대한 것. 재생산이 뭐냐고 물을때 그것은 반드시 감정을 돌보는 일을 포함하게 된다는 점. (출산, 섹스, 임신, 양육, 간병 등의 행위…..) 그리고 두번째로는 ‘시간성’의 문제. 재생산의 과정은 굉장히 연속적이고 누적적인 시간 속에서 가능한 행위들이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최초의 순간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가 발생하기도 하고, 통제할 수 없는 우연적인 변수들의 영향도 많이 받기 때문에.

*재생산신기술의 발전의 결과로서, 섹스와 출산 사이의 필연적인 연속성이 점점 더 해체되고 분절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이러한 분절과 해체의 결과는 이중적이다. ‘자연적인 질서로서 모성성’의 판타지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 폭로함과 동시에 성별분업을 더욱 잘게잘게 단계별로 분업화(난자공여자-자궁대리인-아이를 양육하는 역할….)하기 쉬워지는 측면도 있기 때문에.

* 재생산이슈를 어떻게 명명하든지 간에(재생산’권리’?, 재생산’정치’?, 재생산’정의’?, 재생산’노동’?) ‘인간과 자연의 관계의 재구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제기로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즉, 앞서 말했던 ‘연루된 모든 행위자들과의 관계’에서 고려할 대상의 범위는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을 포함한다는 것임. → 농사를 짓는 일을 떠올려보기. 농부의 일이라는 것은, 농부 개개인이 혼자하는 일이 아니라 자연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연에 빚을 지며 이어나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임. → 여성의 노동에 지불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문제제기 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생산노동의 파괴성’에 대한 반성이 함께 가야하는 이유.

*자본주의적 시초축적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부불노동으로서 재생산은 “그건 여자들의 일이 잖아”라는 말로 정당화되었던 역사가 분명히 존재함. → 사적영역에서 “그건 여자들의 일이잖아”라는 말로 정당화되던 일들(집안일, 밥하기, 섹스, 출산 등…..)이 시장에서 ‘상품화’되고 그러한 상품화 과정이 자본주의적 ‘산업’의 형태로 자리잡았다고 할때, 이것이 ‘착취냐-노동이냐’라는 논쟁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왜냐하면, 여성에 대한 착취인 것이 맞지만, 여성에 대해서’만’ 착취인 것이 아니고, 여성들의 노동인 것도 맞지만 시장에서의 교환가치로 완전하게 환산될 수 없는(환산불가능성) 노동이기도 하기 때문. 예컨대 ‘대리모’의 노동의 교환가치를 어떻게 완전하게 환산한다는게 어떻게 가능한지?…. 성매매여성의 노동도 마찬가지로…..

*다시 말해, 생산은 좋은 것-창조적인 것이고, 재생산은 그렇지 않은 것이라는 이분법(서양철학사의 오랜전통?)에 질문을 던질때, 재생산도 생산만큼 긍정적이고 가치있는 노동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이야기에 그칠 것이 아니라, 기존의 생산개념 자체의 인간중심주의적인 파괴성과 착취적 성격에 대한 반성으로 넘어갈 수 있어야 함. → 그 동안 인간개념의 기준이 보편자로서 남성을 전제하고 있었음을 비판하는 작업과 동시에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말조차 넘어서야 하는 이중의 과제 → 신체와 과학기술의 관계에 대해서 앞으로 어떻게 사유할 수 있나? 자연을 단순히 ‘비-인간(인간 아님)’으로 정의하는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관계맺을 수 있는 방식은 없는지?

 

풀리지 않는 질문들??

cf) 대리모논쟁이나 성매매이슈에 대해 이야기할때 느껴지는 기시감? 성/착취다→ 그것은 폭력에 대한 피해다 vs. 노동이다 → 행위자의 행위성을 봐야한다 ……. → 착취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해서 그것이 곧바로 행위성 없음을 의미하는 것인가? ….. 생산노동에 대해서는 ‘노동착취’라는 말을 붙여서, 동시에, 한꺼번에, 하나의 단어처럼 말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도 뭐라고 안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런 현장이 생산노동이 아니라 재생산이슈(주로 ‘여자들의 일-성역할’로 정당화되던 일들)로 이동할 경우에, ‘노동/착취’는 동시에 말할 수 없는 문제가 되는 느낌?…… 왜때문에??….. 생산노동을 얘기할때는 아무도 ‘노동착취’가 서로 충돌하는 개념이라고 말하지 않지 않나??……대리모의 일에 대해서 그것은 노동착취다-라고 말하면 안되고, 노동이다-라고 말할것인지, 착취다-라고 말할 것인지 하나만 선택해야 할것 같은 느낌??…. 어디서부터 꼬인걸까??….뭐가 잘못된걸까???…… >> 요약하자면, ‘노동과 착취’라는 개념이 왜 어떨때는 하나의 단어처럼 인용되다가 또 어떨때는 반댓말-절대 같이 쓸 수 없는-양자택일의 말처럼 인식되고 해석되나??…..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생산노동/재생산노동이라는 구분 자체를 전복한다는건 어떻게 가능한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