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6일(목)는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이 주최하는 ‘여자가 원했다는 논리 “불처벌의 정치학” 토론회’가 진행됐습니다. 이룸의 오랜 회원으로서 언제나 연대를 해주시는 서연 님의 후기를 공유드립니다. (담당자의 대지각 사태로 죄송한 마음을 전하며 ㅠ)
초과하는 젠더 권력, 초과하는 여성들의 이야기
서연(이룸 회원)
서연 님이 보내주신 이미지를 함께 게시합니다!!
이룸의 20주년을 맞아, 열린 토론회 <여자가 원했다는 논리>는 그동안 이룸이 어떤 활동을, 어떻게 해왔는지 알 수 있던 자리였다.
우선 객석이 가득 찼었고 (일을 마치고 간신히 세이브 한 나는 남은 자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려야 했다!) 발제자, 토론자, 참석자 모두 못다 한 말이 그득그득 남았던 자리였다. 마무리 발언을 발제자와 토론자가 초 스피드로 마칠 수밖에 없었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사랑의 증표처럼 토론문 마지막 구절에 남겨진 이룸의 후원 계좌로 이룸에 대한 애정어린 마음을 달랬다!
9월 26일(목) ‘여자가 원했다는 논리 “불처벌의 정치학”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다.
결국 중요한 건, 젠더 권력
혜진님의 발제(여성의 ’음란‘과 빈곤에 대한 처벌, 성매매여성 처벌의 현실과 불처벌의 과제)는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서의 여성 빈곤을 어떻게 읽어갈 것인가, 또한 이것이 사회가 부정 하는 여성의 ‘음란’이라는 행위와 결부되었을 때 여성의 ‘빈곤’ 담론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라는 고민을 하게 했다. 결국 ‘음란’이라는 것도 허울일 뿐인데, 어떨 땐 옷을 입었다고 음란하다고 하고, 언제는 벗었다고 음란하다고 하고,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결국 ’음란‘도 권력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여성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스스로 자본주의 수행자로 기능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본주의 사회의 하나의 미끼나 도구가 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인지를 정확히 구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욕구가, 그리고 수행하는 상황이 성별 권력으로 짜인 판에 놓이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것 같다. 선택되는 것과 선택받는 것. 물론 이 경계가 희미해지는 지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희미함이 더 교묘함을 만드는 것은 아닌지 질문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경계는 매우 혼란스러우며, 순간순간마다 자신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착각에 놓여 있기도 할 것이다. 그 행위는 결국 자신을 수렁으로 빠뜨릴 수도 있고, 자본주의를 공고하게 할 수도 있으나 어떤 전복적인 지점을 만들어 내는 미미한 기폭제가 될 수도 있다. 나의 자기 계발이 자본주의를 탄탄하게 할 수도 있으나, 결국 둑을 무너뜨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 경계를 이용하여 전복적인 이미지를 만들 수는 없을까? 라는 고민이 들기도 했다. 나는 그 경계에서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지켜내는 여성들, 그리고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것 같다.
동은님의 발제는 (동의의 정치학) 동의 여부는 중요한 요소지만, ‘동의’만이 강조될 경우 ‘나의 동의가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인지’ 등이 고려되기 어려워진다는 질문을 던진다. 발제문을 들으면서 최근 유튜브에서 ‘동의 여부’를 희화화하여 제작된 콘텐츠 몇 개가 떠오르기도 했다.(보면서, 그런 말이 아니잖아… 라고, 중얼거렸던 콘텐츠들… 기억하고 있다) 발제자의 질문을 이어받아 토론자는 누구의 동의 역량만이 필요하고 강조되는지, 사회와 남성들의 동의 역량은 왜 질문받지 않는지 다시 재질문을 던진다.
마지막 효린님(사이버 공간의 성/폭력/착취/혐오 산업, 무엇이 불법화 되었고 무엇이 돈이 되는가?)에서는 ‘자발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 요소를 가진 피해 상황은 사회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지? 여성의 성적 실천이 사회에서 실현 가능한지, 특히 몸이라는 자원과 콘텐츠로 엄청난 수익과 산업이 발생하고 있는데 몸을 통해서 밥 먹고 살아야 하는 여성들을 어떻게 ‘구제’할/될 수 있는지(혹은 될 수나 있는 건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토론자는 발제문을 이어 받아 성적괴롭힘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면서 ‘성적’, 그리고 삭제의 지원 대상이 되는 ‘음란’의 범위에 질문을 던지며 권력과 위계에 안테나를 예리하게 세운다.
나는 왜 성별에 따라 몸이 돈으로 환산되는 방식이 다른지, 왜 몸이 각각 다르게 대우 받는지 궁금했다. 또 쾌락을 즐기는 몸과 쾌락을 주어야 하는 몸은 구분되어 있는지도 질문하게 되었다. 결국 여성을 성녀 또는 창녀로 이분화할 뿐만 아니라 자발과 비자발로 구분하고, 여성의 성적실천과 ‘음란’을 처벌하는 구조는 다양한 층위에서 축적을 통해 반복되고 있다. 이때 여성의 몸이라는 존재는 산업의 미끼가 되거나 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젠더 권력 속에서 특정한 이들의, 정확히는 자본(남성자본이기도 한)의 쾌락과 이윤을 창출하는 도구가 된다.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이날 발제와 토론을 관통하는 것은 적어도 나에겐, 여성의 몸을 ‘초과’하는 사회의 구조였다. 어떨 때는 그냥 몸인데 뭐 이리 복잡한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여성의 몸은 비정상적인 몸으로 낙인되어 있기도 하고, 수탈과 착취의 대상이기도 하여서 몸의 마디마디에는 젠더적 불평등과 그 안의 빈곤, 혐오, 수치심, 낙인, 쾌락과 권력 흔적들이 지문처럼 남겨져 있다. 하지만 꽤 낙천적인 난 그러한 몸의 흔적들이 어떠한 가능성이라고 믿기도 한다.
삶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것들이 있다. 처벌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행위들을 하는 여성들이 있다. 또한 어떤 낙인과 차별을 받을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고, 그 길에 남겨진 것들이 무엇인지, 질문이 필요하다.
나는 성판매 여성들이 누구를 먹여 살렸는지, 또 그 돈으로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 듣는 일을 좋아한다. 또 돈을 어디서 빌렸는지 등 여성들의 돈 이야기가 궁금하다. 그녀들은 가장이기도 하며, 누군가에게 돈을 빼앗기기도 했고, 자기만을 위해 쓰기도 했고 어처구니 없이 날리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온전히 희생해야 했거나 그냥 흐지부지 시시한 이야기로 끝나버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 여성의 몸에 초과하여 부여되는 권력과 낙인만큼, 초과하여 삶으로서 살아내는 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 몸들이 여기에 있다. 그동안 사회에서 처벌받아 왔던 여성들, 이야기들을 우선 듣기 위해서는 불처벌부터 해야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으려면 토론자의 말을 빌려와서 우리의 ‘청취역량’은 어느 정도까지 준비되었는지, 고민해 봐야 한다. 처벌의 대상인지 아닌지 물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듣기 역량은 어느정도인가?, 그렇다면 제일 첫 번째 필요한 스텝으로 이룸의 “불처벌”을 읽어보자.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룸의 20주년을 무척 축하합니다!
앞으로도 현장을 지키는 든든한, 이룸이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나도 이룸에 대한 애정을 담아서 마지막으로, https://e-loom.org/20th 접속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