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룸 탄생 비화 : 이제는 말해보련다.

[이룸 탄생 비화] 이제는 말해보련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던가? 10년 전에는 이룸이 없었으니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다. 기존의 단체들도 있었는데, 우리는 왜 이룸을 만들었고, 어떤 과정과 고민이 있었는지, 이제부터 이야기하려 한다.

 

새로 지은 건물 4층에서

이룸이 생기기 전, 한 단체에서 있었던 일이다. 때는 바야흐로 200312월 경 어느 날, 함께 일하던 활동가 한 명이 일방적인 해고통지를 문자로 받았다. 이유는? 국장의 사적인 이유와 판단이었다. ,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느냐고? 그러게 말이다. 그 소식을 알게 된 모든 활동가들이 황당해 했다. 국장 개인의 눈 밖에 나면 언제라도 하루 아침에 해고될 수 있는 거다.

 

활동가 전원이 해고 철회와 국장의 일방적인 처사에 대한 징계, 이렇게 비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조직의 변화 등을 조직의 운영위원회에 공식 제기했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시 전원 퇴사하겠다는 서명을 올렸으나 그 조직은 국장만 남긴채 문제제기 했던 모든 활동가들을 1231일자로 해고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해고자들의 억울함을 전하고 지지를 얻기 위해 운영위원들을 설득하고 후원인들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등 그 후로도 여러 작업을 했으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해고자들은 최후 방법인 언론공개를 앞두고 심각하게 논의하다가 우리가 그 조직을 버리자는 결정으로 마무리 지었다. 압박의 방식으로 변화된다 치더라도 이미 돌아갈 수 없고, 여성단체 안에서 이러한 일이 발생한 것 자체를 알리는 것이 부끄러웠다. 조직을 보호하려면 비상식적인 운영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음을, 세상살이가 꼭 그렇게 정의롭지만은 않은 것임을, 여성단체라고 하여 크게 다를 바 없음을,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가슴 아프게 깨닫게 되었다.

 

 

 

 해고된 이들은 무엇보다 성매매 여성 관련한 지원과 반성매매 운동을 하고 싶어 했던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었다. 싸움이 일단락되고 다시 모였다. 각자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제대로 된 여성단체민주적이고 평등한 조직을 만들 것인지 고민을 나눴다. 그리고 우리는 해체했다. 한 달 동안만.

 

은행나무 사거리의 지하방에서

한 달 동안 자기 전망을 정리해서 다시 모였다. 다른 사회복지 시설을 알아보겠다는 이도 있었고, 이쪽은 다시 쳐다보지도 않을꺼라며 다른 분야를 준비하는 사람도 있었고, 다른 곳의 연구 사업을 돕겠다는 등의 각자 삶을 모색해 왔다. 그런 사람이 아닌 사람들, 나머지 7명이 지금의 이룸 창립멤버다. 그들은 여전히 성매매 관련한 지원과 활동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충만했고, () 조직을 비판했던 만큼, 제대로 된 조직을 세상에 직접 구현해 보이겠다는 야심과 야망(!), 그리고 불타는 오기(!!)가 있었다.

 

그때부터 미친 듯이 회의해대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해질녁까지 노동시간 내내 회의로 점철되었다. 사무실도 없고, 돈도 없고, 가진 것이라고는 우리와 시간뿐이었다. 회의할 곳이 없어서 한 활동가의 집, 월세 내놨으나 비어 있는 지하방에서 머리가 터지도록 이야기를 했다.

 

하고 싶다는 반성매매 활동이 무엇인지 구체화하기 위해, 성매매가 무엇인지부터 시작했다. 여성운동사를 세미나하고 관련한 역사, 법을 공부했다. 해고 전까지 해왔던 활동들을 정리하고 다시금 한 발을 내딛기 위한 점검의 시간이었다.

 

 

 

 또한, 여성단체라면 여성주의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우리가 만드는 조직은 위계나 나이, 경력으로 차별되지 않는 평등하고 민주적인 조직이어야했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제 운영에는 어떤 방식으로 실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하고 또 논의했다. 더디 가더라도 함께 간다며, 공포의 만장일치는 이때부터였던가. 효율성과 속도보다는 과정을 누리겠다는 욕심은 이때부터였던가.

 

개인적으로 이때만큼 치열한 논의의 경험은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 도시락을 싸서 가기도 했고, 라면을 먹어가면서, 너구리 소굴을 만들면서도 지난하지만 의욕 넘치고 열정을 퍼붓는 시기를 보냈다.(딱히 할 일도 없지 않은가!^^) [이룸]이란 이름도 그때 지어졌다.

 

다른 단체들과 함께 생활한 봉천동에서

무언가 해보려하니 사무실 마련이 제일 먼저인 듯 했다. 드디어, 20043.아는 사람들이 많이 활동하던 다른 단체들의 협조로 사무 공간 한 켠을 같이 쓰게 되었다. 해고과정에서 우리를 지지했던 많은 이들이 단체를 만드는 것을 도와주었다. 후원회원이 되어주기도 하고 필요한 것들을 가져오기도 했으며 조언을 주기도 하였다. 활동가의 친구가 홈페이지를 만들어 주어 오픈했고, 전화를 개통하여 상담활동도 시작했다. 상담공간이 없었던 그때는 타단체 사람들이 없는 시간에 약속을 잡기도 했고, 겹치면 주변 찻집에서 만나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씩 사람도 모이고, 돈도 모이고, 우리들의 의지도 빛이 났다.

 

대학 식당을 무료로 빌려 진행한 후원주점으로 독자적인 상담방을 마련했고, 공개 세미나와 매주 1회 대학 캠페인을 시작했다. 월례강의, 생존자 모임, /가을 소풍, 그리고 엠티를 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성매매 여성을 지원하는 활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여관 밀집 지역 속의 신림동에서

그러나, 성매매 피해에 대한 지원을 위해서는 변호사도 필요했고, 병원도 가야하고, 경찰서도 동행해야 하는데 결국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때 궁여지책으로, 실질적인 지원은 이룸 활동가들이 하고, 이에 대한 돈은 다른 상담소에서 감당했다. 마치 하청 받아 움직이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빠르겠다. 상담소 인가를 받은 것이 아니므로 실적이 우리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었고, 우린 활동을 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라고 생각했으나 그것도 한계적이었다.

 

또한, 인건비를 받지 못하는 이루머들에게 활동과 생계를 따로 병행한다는 것이 참으로 곤란했다. 다들 투 잡을 하거나 주말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기 때문에, 모두에게 생존의 문제는 절박했다. 하나 둘 씩 생계가 활동을 발목 잡던 그 무렵, 이 문제 해결을 위한 한 활동가의 기도빨이 진정으로 먹힌 것인지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으나, 성매매 관련 활동가들을 지원하려고 설립했다는 봄빛여성재단이 이룸 홈페이지를 보고 방문하였다. 이때부터 1년 반, 국가보조금을 받기 전까지 활동가 5명에게 매달 50만원의 인건비와 50만원의 운영비를 후원받음으로써 활동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

 

쪄죽을뻔한 꼭대기층 신설동에서

정부지원을 받는 상담소의 설치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다. 성매매 피해지원을 하는데 있어서 정부지원은 성매매 문제의 국가적 책임면에서는 필수적이지만, 반성매매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는 다른 얘기였다. 소위 나랏돈 받으며 활동한다는 것이 활동의 제도화나 한계점을 만들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고, 그저 좋아서 하는 활동만 하게 되지 않을 것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로 성매매 여성을 지원하는 활동을 꼭 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논의도 있었지만, 상담소는 성매매의 현장임을 합의했고, 현장 없는 활동에는 다들 관심이 시들했다. 인건비도 인건비였고, 성매매 여성에 대한 지원이 정부지원금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현실적인 이유였다. 상담소 자격을 갖추지 않고 지원하는 것은 새로운 성매매방지법 제정으로 인해 불법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상담소 등록을 위한 준비를 했다. 상담소의 소장과 상담원 자격을 갖추기 위해 몇 명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다. 상담과 사무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면서 20055월에 상담소의 정부 인가를 받았다. 그럼으로써 2006년부터 정부지원금을 받는 상담소를 운영하게 되었고, 지원받기 전보다 활동을 펼치는데에 있어서 보다 많은 안정감을 갖게 되었다.

 

 

가정집을 개조한 용두동에서

 

 

2005년에 용두동으로 이사 온 이후 지금까지 이룸은 계속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청량리 센터를 병행하면서 지금까지 24명의 전/현직 이루머가 있다. 무작정 떠난 사람, 무작정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 애 낳고 돌아오겠다더니만 무소식인 사람, 애 낳으러 간 사이에만 일하겠다 했으나 5년 넘게 일했던 사람, 애 놓고 재빠르게 뛰어온 사람, 다른 단체에서 짤려서 온 사람, 면접에 만장일치로 입사했으나 근무 최소개월을 기록한 사람…, 그리고 현재 용두동을 지키고 있는 6. 이들이 모두 이룸의 그간 10년을 채워왔다.

 

추억은 다르게 쓰였을지라도,

10년간의 행과 행 사이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노고에 다시금 감동하고, 감사하다,

앞으로의 기록이, 기록되지 않을 역사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