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한꼭지]운수좋은 날_완두

운수 좋은 날

완두

지난해 10월, 성폭력상담소에서 활동하던 나는 퇴사와 동시에 성매매상담소에 입사했다.

“그거나 그거나 똑같은 거 아니야?”

라고 어떤 이가 물었다. 나는 “그렇지”라고 답했다.

“아유, 더 힘든 일을 하네”라며 토닥이던 이도 있었다. 당시엔 뭐더라, ‘내담자들은 들어볼 수 없는 말이겠구나.’였던가 뭐 그런 비슷한 생각이 스쳤던 것 같다. 그렇게 성폭력에서 성매매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나는 종종 그 차이를 묻는 사람들을 만난다.

 

공사를 막론하고 성별을 비롯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직업적… 으로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위치해 있는 여성은 각종 억압과 차별, 폭력, 착취를 경험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성폭력과 성매매는 다른 종류의 문제는 아니다.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중 잣대를 여과 없이 보는 데 이만한 주제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성폭력 피해를 주장할 때 여성의 성적 경험과 실천에 대한 보편화된 인식은 ‘합리적 의심’(넌더리가 난다) 이라는 낯짝으로 여성을 대하는 비인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피해자는 모텔에 가도, 술을 마셔도, 밤에 돌아 다녀도, 가해자와 연인관계라면 말할 것도 없이 ‘진짜 피해자’가 되는데 실패한다. 직장내불이익, 생명의 위협, 주변인에 대한 협박 뭐가됐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가해자의 요구에 응하거나 저항하지 않았어도 물론이거니와 여성이 가해 남성보다 체격이 있어도 문제다. 가해자에 대한 연민이나 괴로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혹은 피해회복을 위해 등 그 어떤 이유로든 합의를 생각하고 있다면 비난은 각오해둬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 여성이 성판매 경험이 있거나, 성판매 상황에서 피해가 있었다면 어떨까. 앞선 것들은 묻거나 따질 필요 없이 꽃뱀으로 낙인찍는 급행열차를 탄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먼저 죄인으로 심판받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사이 원인제공을 한 가해행위는 뿅!

 

많은 경우 가해자는 성폭력, 폭행, 협박, 갈취, 스토킹, 명예훼손, 심지어 피해자가 사망해도 ‘우발적’, ‘초범’, ‘증거불충분’, ‘전도유망한’, ‘사랑해서’, ‘연인관계라서’, ‘피해자의 저항으로 미수에 그쳐’ 등등…의 면죄부가 사실상 감형요인들로 준비되어있다. 그러니까 여성폭력으로 정당한 처벌을 받고 전과를 남기는 일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란 말이다! 결국 범죄의 타깃이 될지도 모른다는 일상적 공포와 가해자를 구별하고 적당히 조심하는 건 개인 여성의 몫이다. 그냥 개인적으로 응징하는게 빠르겠… 앞서 말한 편견과 낙인으로 인해 피해자 본인이 ‘피해’로 의미화 하는 과정도 만만찮다보니, 내담자들은 종종 죽지 않고 산 것에, 다른 피해와 비교하며 이만하기에 다행이라며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상담을 하다보면 피해를 피해로 보이게 하는 데 골몰하게 된다. 피해를 판단하는데 있어 애초에 주도권이 여성에게 없을 뿐만 아니라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받는 상황이 누적되는 현실에서 피해를 사건화 하는 과정은 사회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과정의 다름 아님을 깨우친다. 때문에 여성들을 만날 때 어느새 법과 제도, ‘피해/인정’, ‘가해/처벌’이라는 틀 안에서 사고하게 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하지만 성매매여성을 만나면서 난 이 부당함은 고작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거나 그거나 같다”고 짐작하던 것보다 현실은 더 모질었다.

 

‘반성폭력’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반면 ‘반성매매’ 라는 말은 듣는 사람에 따라 여러 의미로 해석되는 듯하다. 최근 이룸에 회원가입을 한 친구는 만나자마자 “다 원해서 하는 건 아니겠지만 자발적으로 하는 건?”하고 물었다. 또 한 번은 내담자가 “(단체 이름이)반성매매라서 상담하기 좀 그랬다.”고 말했다. 왠지 뻘쭘해진 나는 “찬성이고 반대고 이미 존재하잖아요. 뭐에 찬성이고 반대고는 몰라도 불리한 위치에 있으니까 지원이 필요하죠.”라며 횡설수설했다. 뭔지 모르게 흐르던 불편한 정적 쩝….

 

(유독)성폭력 사건에서 수치심은 성적 침해 여부의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하지만 수치심이 거래/동의로 간주되는 성매매 공간(뿐만 아니겠지만)에서 여성의 노동은 피해와 ‘당연하게’ 얽혀 있다. 때문에 ‘성매매여성’이라는 낙인은 신체적, 정신적, 성적 폭력뿐만 아니라 여타 다른 생활상의 어려움을 드러내고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경우에도 큰 걸림돌이 된다. 그 자체로 책임과 비난의 대상이 되는 정체성이 드러나진 않을까 하는 조바심과 위축이 사회적 자원과 복지 서비스의 접근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성매매여성의 ‘자활’을 생각할 때면, 최소한의 생계유지도 장담하기 어려운 불안정한 고용, 자아실현은 배부른 소리가 된 노동현실에서 밤길조차 누빌 수 없는 여성이 언제 직업선택의 자유와 경제력을 가질 기회가 있긴 했는지, 도대체 무엇으로부터의 자활이란 말인지 묻게 된다. 일반 노인여성이라면 불가능했을 의료지원이 성판매 여성이기에 가능한 아이러니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4개월째 접어들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 성매매상담소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여성이 안전하게 먹고, 자고, 섹스하고, 일하고, 놀고, 배우고, 나이 드는 과정에 촘촘히 박힌 지뢰를 발견하는 일이다. 강제된 빈곤을 개인의 기질로 치부하며 방조하는 사회의 무능을 몸에 축적하며 살아오고 살아갈 여성들을 만나는 일이고, 언제나 심판받는 존재로 서는 여성의 인간다움을 생각해보는 일이다.


▶영화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2014) 中

 

그날은 유달리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오랜만에 푹 자고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친구의 취업소식을 들었고, 버스도 지하철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탔던 날이었다. 그런 날 내담자로부터 문자가 왔다. 불법 추심 협박으로 불안해하던 그녀는 한동안 업주와 일수업자로부터 계속됐던 협박이 뜸해 평온한 나날을 보내던 차였다. 하지만 다시금 시작된 협박 전화에 불안한 마음을 내담자는 주변인들의 눈을 의식해 문자로 호소했다. 그날은 내담자의 생일이라고 했다.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녀는 생각했겠지, 좀처럼 행복할 틈을 주지 않는다고.

 

“괴상하게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왜 유독 성매매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는 말이 먼저 나오는지 모르겠다. 뭘 더 어떻게 얼마나 알아야 할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다. 내담자의 김첨지 같은 하루에 덩달아 가슴 졸이는 요즘이 무기력하게 느껴진다.

 

상담은 법과 제도의 틀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여성들의 경험이 모이는 장이다. 그 과정에서 상담자와 내담자는 변화와 성장을 실험하며 보다 많은 사회 구성원의 권리가 인정될 수 있도록 사회 곳곳의 변화를 요구하고 행동한다. 여성이 자기 경험을 말하고 얼굴을 내 보이는 일이 운을 점치는 일이 아닌 자기를 살리는 일의 시작으로 통하는 세상이 오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