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과 한겨레의 '여성운동 물먹이기' - 일다의 조이여울 편집장

김규항과 한겨레의 ‘여성운동 물먹이기’

[일다 2004-04-26 04:50]

한겨레의 <일다> 1주년 인터뷰를 거절하고

성폭력 사건이 사회로 불거지면 피해자와 피해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정치적인 음모설에 휩싸인다. 제주 도지사의 성추행 사건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을 때, 당시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은 마치 피해여성을 지지하고 성폭력 근절을 위해 앞장서는 양 행세하며 선거에 이용하려 했고, 민주당은 정치적 음모라며 피해자 측을 공격했다.

미국에서 북한 정권을 공격하기 위한 빌미로 ‘핵’ 다음 ‘인권’ 카드를 내놓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동안 정치적 이념을 떠나 ‘북한 인권’ 문제를 고민해왔던 소수의 활동가들은 미국이 북한의 인권을 걱정하여 북한자유법안을 만든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또한 통일운동, 민중운동 진영을 비롯해 좌파 지식인 진영은 ‘북한 인권’을 논하는 사람들을 싸잡아 ‘우파’라고 매도하고, ‘미국의 이익에 일조한다’는 비난을 보냈다.

여성운동계를 비롯한 소수자 집단은 늘 이처럼 겹겹이 쌓인 왜곡된 벽들의 무게를 실감한다. 그래서 여성문제를 이슈화하거나, 소수자 집단 자체 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데 조심스러워 진다. 그렇다고 정치적으로 악용 당하는 것이 두려워 성폭력 문제를 이슈화시키지 않거나, 북한인권에 대해 문제 제기하지 못하거나, 여성운동계 내에서 잘못된 부분을 비판하지 않을 수는 없다. 진정 양심이 있고 용기 있는 사람들이 그러한 역할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운동을 살리는 길임에는 분명하다.

그들이 ‘중산층 엘리트’ 운운하는 이유

민주당 소속인 제주도지사의 성추행 사건이 터지자 갑자기 여성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듯한 반응을 보였던 한나라당 측이나, 북한 인권문제가 대두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법까지 제정하고 있는 미국 측이, 정말로 여성과 북한 주민을 생각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난 21일 ‘여성운동 보수화’의 침묵을 깨라며 한겨레 신문에 인터뷰를 한 김규항씨가 정말로 여성운동과 여성 민중을 생각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란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2년 전 ‘박근혜를 사유하자’는 이야기를 꺼낸 최보은 프리미어 편집장의 말에 대해, 김규항씨는 ‘박근혜를 사유하면 안 된다’는 말 대신 “중산층 엘리트 여성운동 문제 있다”는 비판을 했다. 핀트 엇나간 그의 우매한 말이 힘을 얻은 것은 그 글이 실린 지면이 <한겨레21>이라는 점도 한몫 했다. 이로써 한 번도 박근혜를 사유해 본 적 없는 여성운동계는 갑자기 박근혜 지지자들이자, 배부른 여자들의 집단으로 매도됐다. 그가 “모든 여성운동이 다 그렇다는 게 아니다”라고 선심을 썼다는 것은 글을 보지 않아도 뻔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러한 첨언은 하나 마나 한 얘기다.

중산층 엘리트 운동이란 무엇인가. 기존 ‘계급’의 틀로 본다면 노동자들의 운동과 농민들의 운동을 제외한 모든 운동은 중산층 엘리트 운동이다. 수많은 시민단체들, 인권단체들, 환경단체들의 운동이 다 이에 속한다. 과거 민주화 운동도 다분히 중산층 엘리트 운동이었다. 그러나 김규항씨를 비롯해 좌파 지식인 남성들이 이들 단체들에 대해 ‘중산층 엘리트 운동’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는 걸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민중을 떠나 부르주아 엘리트 층의 이익만을 대변한다고 비난하는 경우는 더더욱 없다.

반면 여성운동에 대해 ‘중산층 엘리트 운동’이란 말을 갖다 붙이는 경우는 너무나 흔하게 보아왔다. 여성운동의 주체들보다 훨씬 더 ‘가진 것’이 많은 좌파 지식인 남성들은 감히 여성운동이 기득권의 운동이라고, 민중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해왔다. 그들이 양심도 없고 염치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뒤로 하고,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그들은 노동자 계급의 투쟁과 혁명만이 사회를 바꿀 수 있고, 계급이 해방될 때 곧 여성이 해방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 전제만을 고집하는 이들 입장에서, 성별 권력 구조에 대해 광범위하게 문제 제기하는 여성운동은 ‘계급 투쟁의 방해꾼’이자, 계급 전선으로 따진다면 필연적으로 ‘부르주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노동자 소외, 농민 소외를 논하는 논쟁과 운동방식에 여성노동자와 여성농민의 소외와 이슈가 포함되지 못하고, 사회주의 국가나 우리 사회 운동권 조직과 노조 안에서도 성폭력, 성매매가 자행된다는 사실에 대해선 모른 척 한다. 노동자건 농민이건 중산층이건 간에 여성들이 가정 내에서 남편으로부터 학대를 받고, 가사노동과 양육, 간병 등 보살핌 노동을 전담해 왔다는 사실을 모른 척 한다. 성차별 문제에 있어 자신들이 ‘기득권’이자 ‘가해자’라는 것을 반성하지 못하는 건 물론이다.

결국, 김규항씨를 비롯해 좌파 진보지식인이 여성운동을 향해 ‘부르주아 엘리트’ 운운하는 것은 사회의 성별 권력 구조를 읽어내지 못하거나 그에 대항할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며, 결과적으로 여성운동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결코 ‘여성 민중’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여성운동이 ‘부르주아 엘리트’ 운동이라는 자신들의 견해를 정당화시킬 때에만 ‘여성민중’을 논한다. 김규항씨가 여성운동의 미래와 여성민중을 걱정한다는 것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북한 인권을 걱정한다는 것만큼이나 가증스러운 일이다.

또다시 재미보고 싶은 한겨레

사실 진보진영에서조차 2년 전보다 훨씬 약발이 떨어진 김규항씨의 언사에 대해 지금은 일일이 대꾸해줄 필요가 없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망언이 실린 지면이 한겨레 신문이라는 것과, 그가 2년 전 자신의 마초 행각을 변명하기 위해 빌미로 삼은 것이 ‘여성정치세력화’를 둘러싼 <일다>의 문제 제기들이란 점에서 김규항씨와 한겨레 측에 한 마디 안 하고 넘어갈 수 없게 됐다.

한겨레의 김규항씨 인터뷰 기사 ‘여성운동 보수화에 침묵을 깨라’를 보고 가장 분노스러웠던 점은, 해당 기사가 지금까지 정말 힘들게 제기해 온 <일다>의 여성정치세력화 논의와 여성운동 내부에 대한 비판 이슈들을 재료 삼아, 한겨레 측의 새로운 시각인양 생색을 냈을 뿐 아니라 마초 남성 지식인의 여성운동진영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해주는 데 사용했다는 점이다.

여성정치세력화에 대한 성찰적 접근과 여성운동의 방향설정에 대한 고민과 비판 등 다양한 의제들을 설정하며 부지런히 일궈왔던 여성계 내부 논쟁에 대해 한겨레 신문이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겨레 신문은 해당 기사에서 다루고 있는 모든 주제들이 여성주의 진영에서 이미 논의되고, 비판과 더불어 방향제시가 이루어져왔다는 사실을 가린 채, 마치 김규항씨와 한겨레가 여성운동의 보수화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진보’인척 행세하고 있다.

한겨레 신문이 여성정치세력화의 방향에 대해 제언하고 싶었다면 적어도 ‘페미니즘=중산층 엘리트 여성운동=보수화’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는 김규항씨에게 달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겨레는 북한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시 미국 대통령이나 북한자유법안을 만든 이들의 견해를 물을 것인가?

공교롭게도 해당 인터뷰 기사를 쓴 기자는 여성주의 저널 <일다>의 1주년을 맞아 인터뷰를 하겠다고 요청을 해 온 기자였다. 언론인의 양심으로 인터뷰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2년 전 박근혜 지지 논쟁을 붙였던 것처럼 지금 이 시점에서 또 김규항씨를 등장시켜 유사한 형태의 재미를 보려는 한겨레의 의도는 뻔하다. 당시 ‘그 페미니즘’ 논쟁으로 한겨레 측은 재미를 톡톡히 봤다. 그로 인해 여성운동계가 부당하게 모욕을 당했어도, 우리 사회의 여성주의에 대한 편견이 강화됐어도, 그런 문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수많은 남성 인사들이 있지만, 그 중 한두 사람의 언행 때문에 남성 인사들 전체, 심지어 남성운동권 전체가 매도당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러나 여성 인사들 중 한두 사람의 언행으로 인해 여성계 전체, 심지어 여성운동계 전체가 매도당한다. 여성운동의 흐름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여성운동계가 어떤 타격을 입을 것인지 생각하지 않는 언론의 무책임함 때문이다.

한겨레가 나름대로 ‘진보’를 표방하고 있다면 더 이상 여성주의에 대해, 여성운동계에 대해 무책임한 자세를 보여선 안 될 것이다. 여성주의와 여성운동을 쉽게 폄하하는 태도에 있어선 조중동과 같은 보수 언론과 별 다를 바 없다. 여성문제에 있어서도 ‘진보’적이 되려면 여성주의 시각을 거저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란 사실부터 자각해야 한다. 여성들의 눈 높이에 맞춰보려 노력하고, 여성주의 담론에 대해 배우고, 지금까지의 성차별적 보도들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고 반성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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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편집장 조이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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