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혐오하는 사회..일다

여성을 혐오하는 사회

연쇄살인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것

조이여울 기자
2004-07-26 08:32:51
지난 한 주는 고통스러웠다. 딱 일주일 전, 연쇄살인범이 시체를 유기한 장소가 <일다> 사무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가 묵었던 곳이 바로 이 근처가 아니냐는 문자 메시지 등을 받고서 기사 마감을 하던 상근자들은 공포에 떨었다. 새벽까지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두려움과 분노로 제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노인과 여성들을 상대로 살인행각을 벌여놓고 자랑스럽게 ‘부유층에 대한 적개심’과 ‘여성혐오’를 논하는 살인자의 태도와, 그를 뒷받침해주기에 급급한 언론의 보도행태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도록 손을 쓰지 못하고 있던 경찰 행정력에 대한 불신과 ‘엽기살인’이라며 흥미롭게 바라보는 뭇 남성들의 시선, 그리고 지금 이 시간 나보다도 훨씬 더 공포에 떨고 있을 ‘매매되는 여성’들의 현실에 대한 갑갑함이 한데 겹쳤다.

‘여성들의 죽음’은 너무나 가볍다

같은 사건을 놓고도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사건은 얼마든지 다르게 포장된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십여 년 전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지존파’ 사건이 떠올랐다. 소위 ‘부유한 자’에 대한 계획적인 살인사건이자, 인육을 먹는 등의 잔인한 사건으로 알려진 ‘지존파’ 멤버들의 발언과 행각은 놀랍게도 언론을 비롯해 많은 이들에게 어필했다. ‘빈부 격차’가 심각한 사회 부조리를 거론하면서 이들을 영웅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던 것이다.

일각에선 살해 당한 피해자가 알고 보면 그렇게 부유한 자가 아니라는 식의 소극적인 반격을 했다. 그러나 당시 누구도 이들이 자신들의 살인 시스템을 ‘시험해보기 위해’ 살해 명단에 없는 한 여성을 강간하고 죽였다는 사실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이들의 맹목적인 살인에 절대로 면죄부를 줄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주위 분위기는 동정론이 우세했다. 게다가 감옥에 있는 살인범을 그의 어머니가 찾아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여론이 생기는 등, 내 기억 속에 ‘지존파’ 사건은 해당 사건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으로 인해 더욱 괴로웠던 일로 새겨져 있다.

십여 년이 지나 맞닥뜨리게 된 연쇄살인 사건과 이를 둘러싼 여론은 그 때보다도 더 큰 공포와 분노, 절망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아내에게 이혼을 당하고 이혼 경력 등으로 인해 한 여성에게 청혼을 거절 당한 것이 ‘여성혐오’의 동기이자 살해동기라는, 말도 안 되는 살인범의 주장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읊어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공포를 느꼈다. “여성들은 함부로 몸 놀리지 말고, 부유층은 각성하라”는 살인범의 말을 논평도 없이 전달해주는 언론에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남성이 ‘부르면 그 장소로 가야 하는’ 처지에 있는 여성들의 대책 없는 위험한 실상에 절망감을 느꼈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언론에서 ‘부유층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이 문제이며, 살인범은 이 같은 분위기를 이용해 자신을 정당화시키려 한다’는 정도를 짚었다는 점일까. 그러나 살인범의 자작시와 그림을 보여주며,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거나 “'살인마'의 가슴에 무엇이 물결쳤던가를 '증언'한다” 등의 언급을 하는 모습은 여전했다. 진정 범인이 사랑에 목이 말라서 노인과 여성들을 살해했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가.

연쇄살인범이 노인과 여성들을 살해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들이 ‘죽이기 쉬운 상대’이기 때문이다. 특히 보도방을 통해 매매되는 여성들은 익명을 보장 받으며 얼마든지 유인해낼 수 있고, 대부분 가족 등과 멀리 떨어져있어서 사라진다 한들 누구도 찾지 않을 가능성이 크며, 실종신고를 해도 경찰이나 검찰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집단이기 때문에 범행대상으로 삼기엔 ‘너무나’ 쉽다.

세상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성차별이 만연한 세상에선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 불만을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터뜨리는 이들과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도 불합리하다. 아버지의 폭력에 대한 분노로 인해 옆집 여자를 칼로 찔러 죽였다는 남자, 어른의 꾸지람에 대해 앙갚음을 하려고 그 집 어린 딸을 때려 죽인 소년 등을 보며, ‘가족사랑’ 타령을 하는 언론과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왜 가장 취약한 집단이 희생양이 되는지에 대해 묻지 않는가. 힘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범죄가 어떻게 정당화되거나 동정 받을 수 있는가.

여성혐오의 실체가 무엇인가

이번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보도나 이야기들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이 ‘여성혐오’라는 단어다. 사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들의 ‘여성혐오’는 '성차별'의 다른 이름이다. 수많은 남편들이 아내를 쥐어 패고 있으며, 더욱 많은 남성들이 여성의 몸을 매매하고 학대하고 강간한다. 이 때문에 여성들은 자유롭게 걸어 다닐 자유조차 없다. 아내폭력, 성폭력, 성매매로 대변되는 이 같은 대 여성폭력들이야 말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의 실체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범인의 살인행각에 대해 ‘여성혐오’를 논하는 맥락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전개되고 있다. 마치 ‘여성혐오’가 살인의 동기가 될 수 있다는 듯이, 때로는 정당방위라도 되듯이 언급하고 있다. 살인범이 ‘여성혐오’를 할만한 근거가 있다는 식이다. 가해자의 정신병적 기질이 확인되지 않는 한, 살인행각에 대해 ‘여성혐오’라는 이유를 갖다 붙이는 것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범죄를 감싸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성들을 혼내 줘야 한다’는 살인범의 태도는 기실은 너무도 익숙한 레퍼토리다. 최근 속칭 “원조교제” 대상이 되는 미성년자 여성 4명을 강간한 혐의로 잡힌 남자와, 바로 며칠 전 노래방 도우미들만을 대상으로 33차례 강도, 강간을 한 일당들도 비슷한 말을 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그 중 하나는 “자신이 여성들을 무려 122차례나 강간했지만 16건에 대해서만 징역을 살았다고 자랑하듯 진술했다”.

우리 사회에서 성매매 되는 여성들은 취약 계층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계층이고, 법과 정의가 이들을 포용해주지 않아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여성혐오’를 논하는 강간, 살인 가해자들은 이들에 대한 혐오감을 자랑스럽게 표출한다. 아니, 사실 상당히 많은 남성들이 그 논조에 동조하고 있다.

그러한 인식의 근저엔 여성의 몸이 당사자의 것이 아니라 남성의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있다. 한 남성의 소유여야 할 여성의 몸이 여러 남성에게 공유될 때 해당 여성에 대해 적개심을 표하는 것이다. 성매매 현장에서 여성인권을 위해 오랜 기간 활동해 온 한 활동가는 “성매매 현장에는 늘 폭력과 강간이 뒤따른다”고 말한 바 있다. 성차별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남성의 즐거움을 위해 희생되고 매매되는데, 한편으로 남성들은 이들 여성에게 ‘적개심’을 갖고 혐오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한 모순을 본 적이 있나.

이번 사건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고민하는가. 지난 한 주간이 만약 고통스럽지 않았다면 한 가지만 제안하고 싶다. 단 한 번이라도 살인범의 집에 일주일간 갇혀있었던 여성의 입장이 되어보라고. 그리고 나서 살인범과 그를 비추는 언론과 이번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여론의 추이를 지켜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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