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의 ‘노랑머리 창녀’가 성특법 전도사 조영숙을 만나다

[한국인권뉴스 2007. 1. 29]

"신영복은 현실화시킬 대안이 마땅치 않다면 우리들은 ‘노랑머리 창녀’처럼 힘겹게 견디어야 하는 삶의 모습들은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그 속에서 오히려 시각을 달리해 뭔가 배워야 한다는 겸허한 자세를 강조한 게 아닐까. 그런즉 그의 ‘설교야말로 폭력’이라는 표현은, 제3자들이 그들에게 함부로 가르쳐들지 말아야 한다는 엄포성 취지로 들리기도 한다.."

[칼럼]신영복의 ‘노랑머리 창녀’가 성특법 전도사 조영숙을 만나다

- ‘설교야말로 폭력’ 제3자는 그들에게 함부로 가르쳐들지 말아야

안 빈(논설위원)

신영복(전 성공회대 교수)은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20년간 복역하면서 겪은 자신의 경험담을 출소 후 강연이나 저서를 통해 종종 이야기하곤 했다. 그는 특히 자신이 만나 수인(囚人)중 이 사회의 맨 밑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기층민들에 관심을 많아 그들의 삶 속에서 민중성을 읽으려 노력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예컨대 그는 “집을 그릴 때 많은 사람들이 지붕부터 그린다. 감옥에서 주춧돌부터 그리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일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그린다.”는 식으로 특정한 현상을 민중들의 관점에서 보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던 모양이다. 감옥에 들어가기 전 신영복의 신분은 육군사관학교 경제학 교관이었지만 그곳에서는 거꾸로 기층민이 그에게 교사가 된 셈이다.

그의 이야기 중에는 요즘 우리네 언론에서 동네북처럼 자주 등장하는 ‘매춘’(성매매)과 관련된 것들이 몇 가지 나온다. 그 중 하나.

“감옥에서 만난 한 젊은이는 서울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13살에 서울로 간 누이동생을 10년 만에 창녀가 된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 젊은이는 서울을 누이동생을 창녀로 만든 도시로 인식하고 있다. 비록 거칠기는 하지만 누이동생을 창녀로 만들었다는 인간적인 분석을 하는 것이 사회학적 분석능력이다. 우리가 어느 도시를 판단할 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이 그 도시에 내팽개쳐 졌을 때 10년 후에 어떤 모습일까? 로 판단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그는 한 젊은이가 서울을 유독 싫어하는 이유를 눈여겨봤다. “누이가 그리 되었으니 그런 생각을 하는구나” 하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이 그 도시에 내팽개쳐 졌을 때 10년 후에 어떤 모습일까?”라며 도시란 공간이 함축하고 있는, 기층민에 대한 자본의 무자비한 폭력성에 혐의를 암시하고 있다. 그는 이를 ‘사회학적 분석능력’이라고 에둘러 표현하며 우리에게 자성을 요구한다.

또 ‘노랑머리 창녀’란 얘기가 있다. 대전에는 유명한 ''중동''이라는 창녀촌이 있는데 거세기로 소문난 ‘노랑머리’란 여자가, 자신을 억압하려는 골목건달들에게 피 칠갑으로 덤벼가면서 ‘자주국방체제’를 확립하고 당당하게 살아간다는 스토리다. 여기에 신영복은 이렇게 부언한다.

“만약 그 노랑머리라는 여자한테 ‘중산층여성의 정숙성’을 요구하거나 설교한다면 ‘그 설교야말로 폭력’이라는 것이지요. 그 사람이 발 딛고 있는 처지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으면서 그 사람 개인에 대해서, 그 사람의 생각에 대해서 관여하려는 것은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적어도 현재까지 드러난 신영복의 ‘창녀’와 관련된 몇몇 문건에서는 좀처럼 ‘온정주의’가 발견되는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그는 ‘부익부 빈익빈’을 강요하는 이 사회 구조가 그녀들을 포함한 기층민들에 대한 가해자인 만큼 거꾸로 사회가 그들에게 온정주의로 접근하는 발상은 마치 ‘병 주고 약 주는 것’처럼 앞뒤가 안 맞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신영복은 현실화시킬 대안이 마땅치 않다면 우리들은 ‘노랑머리 창녀’처럼 힘겹게 견디어야 하는 삶의 모습들은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그 속에서 오히려 시각을 달리해 뭔가 배워야 한다는 겸허한 자세를 강조한 게 아닐까. 그런즉 그의 ‘설교야말로 폭력’이라는 표현은, 제3자들이 그들에게 함부로 가르쳐들지 말아야 한다는 엄포성 취지로 들리기도 한다.

이쯤 되면 신영복이 ‘노랑머리 창녀’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픈 애정 어린 충고가, 성매매 근절 특효약(?)인‘성매매 특별법’의 제조 및 공급책인 주류여성계에게도 훌륭한 경종이 될 법 한데 현실에서 신영복은 생뚱맞게 영 딴판으로 애용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지난해 12월 14일 조영숙이 자신이 소장으로 있는 여성인권중앙지원센터에 올린 칼럼 “한해의 끝에서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가 그런 경우인데, 여기서 신영복은 느닷없이 인용에 등장해 애먼 고생을 하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여성인권중앙지원센터는 ‘성매매 방지와 피해자 보호’를 총괄하는 여성가족부 위탁기관이다.

칼럼에서 조영숙은 ''석과불식''(碩果不食, 씨가 있는 과실은 먹지 않는다)이라는 “화두의 주창자 신영복 교수님은 많은 이들에게 ''조급한 기대''와 ''성급한 실망''을 경계할 것을 당부하고 계신”다며 “많은(?) 예산과 인력이 투입된 성매매 피해자 지원활동의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을 것을 걱정하면서 위축되기도 하였”다고 여성인권중앙지원센터의 한 해 사업을 회고했다.

또 ''엽낙분본‘(葉落糞本, 떨어진 낙엽이 뿌리를 거름한다)이라는 신교수님의 또 다른 화두는 우리에게 쉽게 낙담하거나 조급해 하지 말아야 함을 가르쳐주고 계’신다며 “성매매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활동은 왜곡된 현실을 흔들어, 근본을 바로 세우기 위한 과정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으며 “그 과정이 많은 저항과 반발, 그리고 소란을 유발시키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매 순간 긴장과 성찰을 놓치지 않고 있는 현장활동가들이 바로 우리들의 희망“이라고 격려했다.

워낙 신영복이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소문났는지라 조영숙이 그를 칼럼에 즐겨 인용한 것이 그녀의 글에 무게를 싣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다만, 조영숙이 평소 신영복이 ‘매춘’과 관련된 어떤 주제의 이야기를 하고 다녔는지 사전에 알았다면 아마도 그를 인용함에 신중하게 재고하지 않았겠나 하는 추측을 해본다.

더욱이 “성매매 피해여성을 구해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을 자랑하며 “많은(?) 예산”을 쓰는 여성인권중앙지원센터에는 그 어떤 ‘피해여성’의 실체가 전해지는 게 아니라, 오로지 <중산층여성>인 소장을 비롯해 그들만의 목소리만이 자화자찬으로 가득하니, ‘노랑머리 창녀’에 대한 제3자의 어설픈 접근에 깊은 우려를 표한 바 있는 신용복이 혹시 이 칼럼을 보았다면 묘한 느낌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한편, 혹자는 필자에게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는 당신은 지금 신영복을 인용한 게 아니고 뭐냐고. 맞다. 그 점 동의한다. 그렇다면 필자의 현 칼럼과 조영숙의 칼럼 <한해의 끝에서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을 신영복에게 가져가 한 말씀 부탁한다고 하면 절충안이 되긴 하겠다.

문제는 국가보안법에 걸려 청춘을 20년간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던 신영복이 감옥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회고형으로 즐겨 강의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성(性)에 관한 한 국가보안법으로 일컬어지는 성매매 특별법이 서슬 퍼렇게 현재 진행형인데 그가 지난 시기처럼 기층민의 입장에서 대놓고 ‘노랑머리 창녀론’을 발언할 수 있을지 그건 필자도 감히 장담할 수 없다는 얘기다.

[관련자료]

한해의 끝에서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조영숙(여성인권중앙지원센터 소장)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해가 벌써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탄생 2006년이 되는 해지만, 성매매 방지와 피해자 보호에 나선 우리들에게는 성매매방지법 시행 2주년이 되는 해이자, 성매매방지 정책과 활동이 자리를 잡아가는 한 해였습니다.

올해 우리사회에는 ''석과불식''(碩果不食, 씨가 있는 과실은 먹지 않는다)이라는 화두가 많이 회자되었습니다. "석과(碩果)는 먹지 않는 것(不食)이기도 하지만 함부로 먹히지 않는 것(不見食)이기도 하다"는 부연설명과 함께 화두의 주창자 신영복 교수님은 많은 이들에게 ‘조급한 기대’와 ‘성급한 실망’을 경계할 것을 당부하고 계십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들은, ‘과연 성매매를 방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우려 반 걱정 반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또한 많은(?) 예산과 인력이 투입된 성매매 피해자 지원활동의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을 것을 걱정하면서 위축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엽낙분본(葉落糞本, 떨어진 낙엽이 뿌리를 거름한다)''라는 신교수님의 또 다른 화두는 우리에게 쉽게 낙담하거나 조급해 하지 말아야 함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가을에 나무가 낙엽을 떨어뜨리는 행위는 나무의 근본인 뿌리를 위해 거름을 마련하는 행위입니다. 그러기에 낙엽을 떨어뜨리는 행위는 끝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시작을 알리는 행위인 셈인 것입니다.

성매매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활동은 왜곡된 현실을 흔들어, 근본을 바로 세우기 위한 과정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이 많은 저항과 반발, 그리고 소란을 유발시키는 것은 당연합니다. 많은 해외전문가들이 법 시행 2년을 경과하는 한국사회를 바라보면서 경탄을 금치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참으로 건강한 씨앗을 품고 있는 꽤 저력 있는 사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저력의 밑바탕에는 전국 각지에서 씨앗과 뿌리를 튼튼하게 내리고 있는 현장활동가들의 땀과 노력이 있음을 압니다.

성매매가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씨앗으로서의 법의 제정과 뿌리내리기로서의 법 시행과정은 이제 겨우 2년을 지나고 있습니다. 긴 호흡으로 매 순간 긴장과 성찰을 놓치지 않고 있는 현장활동가들이 바로 우리들의 희망입니다.

2006.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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