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미 급진여성운동은 남녀분리주의, 국가주의다..

** 평등연대 제공 자료 **
http://cafe.daum.net/gendersolidarity

[한국인권뉴스 2006.02.11]
잘못된 길 ''미국식 급진적 여성운동은 남녀분리주의 국가주의다''

안 빈 (한국인권뉴스 편집위원)

여성운동(특히 급진적 여성운동)은 다수 여성들의 관심사를 반영하는가. 이에 대한 엘리자베트 바댕테르(파리 이공과대학 ‘에콜 폴리테크니크’ 철학교수)의 견해는 매우 부정적이다. 자신이 행동주의적 페미니스트이기도 한 바댕테르는 여성운동이 여성의 ‘희생자 자처하기’로 말미암아 여성운동 본래의 취지를 크게 벗어났다고 단언한다.

바댕테르는 특히 미국 여성 해방운동은 여성을 남성과 대립적으로 보는 본질주의적, 분리주의적, 국가주의적 성격이라고 파악하며, 여성은 남성 폭력에 의한 피해자라는 규정아래 투쟁하는 이같은 잘못된 방식에는 사회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의 ‘남성 지배’론이 일조했다고 비판했다.

바댕테르가 보기에 여성운동의 전술인 ‘희생자 자처하기’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발생하는 모든 차이점(차별이 아닌)을 일거에 소멸시키는 ‘요술지팡이’와 같다. 이런 방법이 때로는 이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파리 7구에 사는 부르주아 집안 여성과 파리 외곽에 사는 젊은 아랍 여자가 똑같은 투쟁거리를 가지고 있다고까지도 말할 수 있게” 터무니없이 비약된다.

다음은 엘리자베트 바댕테르의 책 ‘잘못된 길’ 서문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미국식 여성주의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고 있는 한국 사회에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하는 역작 ‘잘못된 길’ 일독을 권한다. 이 책을 두고 정희진(여성학, 서강대)은 한국에서는 급진적 여성운동조차 없었다고 강력하게 항변한 바 있다.(빈)

<1990년대 이후의 급진적 여성운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
“ 잘 못 된 길 ” (엘리자베트 바댕테르 저)

- 조연급으로 전락하는 남성들, 정복감에 부풀어 오른 여성들

전통적인 여성상은 점차 사라져 가고, 더욱 씩씩하고 강한 여성상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했으며, 이 세상을 장악해 갔다. 마침내 역할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여성을 조연급으로 취급했던 수천 년간의 폭군정치가 사라져 가고, 이제 여성은 영화의 주인공이 되고 남성은 조연급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런 역할의 전도는 반가운 현상이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남녀 경계선’ 을 찾고 있는 여성들에게는 분명히 귀한 에너지원이 되었다. 그런데 사실 ‘남녀 경계선’ 이란 단어도 문제가 있다. 그동안 남자에게 속했던 모든 것은 여자의 소유로 되었지만, 여자에게 속한 것들이 남자의 손에 넘어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복감에 부풀어 오른 여자들은 자신의 집과 세상을 장차 자신의 배우자와 함께 평등하게 나누어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 ‘남녀평등’ 의 실현은 진정한 민주사회가 되기 위한 최종 잣대였다.

-‘남녀 분리주의’ 내세워 투쟁 나선 미국 여성주의자들

한편 미국에서는 남성과 여성을 다시금 대립적으로 보는 본질주의적, 분리주의적, 국가주의적인 구호를 부르짖는 여성 해방운동이 새롭게 대두되고 있었다. (*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은 남성과 여성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남녀 분리주의’를 내세우고, 남성은 폭력을 휘두르고 여성은 그에 대한 피해자라는 생각 아래 남성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양식으로 여성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 1980년대에 이미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모든 종류의 남성폭력을 고발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남성들에 대한 불신감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남성폭력’은 다른 사회적 폭력과 동일시되었다. 남자들은 (여자들을 지배한다는 이유로) 죄인으로 모려 손가락질 받게 되었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해하고 있다. 게다가 많은 사회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은, ‘자연이나 문화에서 남성 지배는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라고 함으로써 ‘남성 지배’를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희생자 자처하기’는 모든 차이점을 일거에 없애는 요술지팡이

따라서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결론은, ‘여자는 항상 어디에서나 열등한 위치에 있고 실제적 또는 잠재적 희생물이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임신하여 아이를 낳는 분야’ 에서는 여성들이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을 여성들은 거의 인정하지 않는 듯 하다.(생식에 관한 신기술- 예를 들어 인공 수정 등등 - 의 발달로 인해 남성의 생식 활동 참가는 점점 더 감소하고 있다. 여기에서 생명 복제술의 발달로 인한 수컷(혹은 남성)의 필연성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이 감소되고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러한 사실을 기반으로 모든 결론을 도출해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

이런 ‘희생자로 자처하기’ 가 이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희생자라고 하면 선한 쪽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희생자가 항상 옳다는 이유 말고도, 가해자에 대한 가차없는 증오에 비례하여 피해자에게는 동정심이 유발되기 때문이다. 형벌을 내리는 사람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대중들이 피고석에 있는 범죄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 부르주아 여성과 프로레타리아 여성이 같은 투쟁거리를 갖는다?

그리고 ‘여성을 희생자화’ 하면서 여성의 실제적 위상과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공통점을 갖게 된다. 그런 식으로 하면, 골치 아픈 문화적, 사회적 또는 경제적 차이점들을 요술지팡이처럼 한번에 없애 버릴 수가 있다. 심지어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유럽’ 여성들의 상황과 과 ‘동양’여성들의 상황을 비교하면서 “도처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여성들은 증오와 폭력의 희생자가 된다” 라고 말할 수 있다. 파리 7구에 사는 부르주아 집안 여성과 파리 외곽에 사는 젊은 아랍 여자가 똑같은 투쟁거리를 가지고 있다고까지도 말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러나 실제 희생자와 가짜 희생자를 혼동함으로써 인해, 더 급박한 투쟁을 간과해 버릴 위험이 있다. 대대로 내려온 압제자에 의해 억압받고 그들과 대항할 힘이 없는 여자들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강조함으로써 결국 이에 동조하지 않는 신세대 젊은이들의 신용을 잃게 된다. 게다가, 우리는 차세대에 무엇을 제안하는가? 고작 ‘더 많은 여성 희생자 내세우기’ 와 ‘남성들에게 더 많은 처벌 내리기’ 가 아닌가?

-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다수 여성의 관심사를 반영하는가?

열광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능력한 여성의 이미지를 강조함으로써 우리의 일상생활에 변화를 줄만한 일도 전혀 없다. 여성을 단순히 무능력한 피해자로만 전제하고 있는 지금의 페미니즘은 오히려 남성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고 여성 모두를 똑같이 희생자로 보는 문제점이 있다. 결국 최근의 페미니즘은 애초의 목적이었던 투쟁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

이제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때가 왔다. 15년 전과 비교하여 실제적으로 어떤 구체적인 발전이 있는가? 현재 매스컴을 통해 자주 듣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실제로 여성 대부분의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는가? (1990년 이전에는 ‘자유분방한 섹스’를 추구했는데, 최근에는 ‘여자의 성은 성스러운 것’ 이라고 주장하면서 ‘충동적이지 않고 잘 길들여지고 질서 있게 진행되는 섹스’를 주장하고 있다.) 여성, 남성에 대한 패러다임을 어떻게 발전시킬 생각인가? 어떤 유형의 성생활을 주장할 것인가? [한국인권뉴스]

* 자료제공 : 한국양성평등연대(평등연대)
http://cafe.daum.net/gendersolidarity


평등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