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된 동생들을 구하고 싶다”

“감금된 동생들을 구하고 싶다”
기사입력 2008-05-23 18:06

[한겨레21] 7년 만에 성매매업소 탈출해 포주 고발한 강현주씨… “지금 내 꿈은 여성단체 활동가로서 구조 활동 나가는 것”

▣ 대전=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5월14일 오전 11시. 인터뷰 장소로 들어오는 강현주(33·가명)씨는 담담했다. 그러나 담담한 표정은 잠깐이었다. 이야기가 풀려나올수록 얼굴은 어두워졌다. 가끔 아무도 없는 방임에도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탈출한 뒤 생긴 버릇이다. 지금도 길을 갈 때 ‘삼촌’(성매매 여성들을 관리하는 남성을 부르는 말)들이 잡으러 올까봐 불안하다.

강씨는 24살이던 1999년 ‘방석집’이 밀집해 있는 대전 중구 유천동의 한 업소에 선불금 800여만원을 안고 들어갔다. 방석집에서는 매일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술을 마시고 손님들과 연애(성행위)하는 일이 반복됐다. 3개월만 바짝 일해서 돈을 벌고 나오겠다는 그의 생각은 순진한 것이었다. 강씨는 “늘 가게 밖에서 삼촌이 지키고 있어 마음대로 밖에 나갈 수 없었다”며 “그곳은 들어갈 때는 마음대로 들어가도, 나가는 건 마음대로 못하는 데”라고 말했다. 그는 2006년 5월 그곳을 탈출했다.

이듬해 1월 강씨는 업주 윤아무개(53)씨를 감금·횡령·성매매알선 혐의로 고발했다. 그러나 윤씨는 성매매알선 혐의로만 기소됐고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3999만원을 선고받았다. 검찰이 감금·횡령 혐의에 대해 기소하지 않은 데 대해 강씨는 재항고한 상태다. 강씨는 “그는 우리를 감금했지만, 법은 그걸 인정하지 않았고 가게는 지금도 장사를 하고 있다”며 “그 생활을 계속 하고 있는 동생들을 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당신이 일한 곳은 어떤 곳인가?

= ‘방석집’이라고 한다. 단란주점과 똑같이 방에 노래방 기계랑 테이블이 있다. 다만 소파 대신 방석이 깔려 있다. 맥주 10병에 10만원, 20병에 20만원이다. 룸 옆에 ‘타임방’이라고 하는 손바닥만 한(약 1평) 방이 있다. 술을 마시고 나면 거기서 연애한다. 그게 코스다. (손님은 모르지만) 손님을 받을 때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 맥주 1박스는 30분, 연애는 15분. 손님이 내는 돈이 20만원이라면 50분 안에 손님을 내보내야 한다.

시간을 못 맞추면 어떻게 되나?

= 방에서 나오면 삼촌이 발로 걷어차거나 머리를 때렸다. 시간 넘기는 애들이 많거나, 매상이 안 좋은 날은 단체로 벌을 섰다. 아침 7시에 영업이 끝나면, 다들 술이 떡이 된 상태다. 그 상태로 홀에서 벽 보고 3시간을 서 있어야 했다. 사장의 분이 그래도 안 풀리면 3층 숙소로 올라가서 ‘오토바이’(기마자세로 서있기) 벌을 섰다. 한 달에 서너 번은 벌을 섰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오늘은 벌을 서지 않을까, 오늘은 두들겨맞지 않을까, 오늘은 ‘진상’ 손님을 만나지 않을까, 불안했다. 아무 일도 없이 넘어가는 날, 하루를 넘겼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면서 잠을 잤다.

30분 안에 맥주 20병을 마시는 게 가능한가?

=쇼를 배웠다. 질 안에 병따개 집어넣어 맥주병 따기, 과도로 과일 깎기, 담배 집어넣어서 피기, 달걀 집어넣었다가 빼기 등이다. 병따개나 과도 등을 소독할 때 맥주 두세 병 정도를 쏟기 때문에 술을 빨리 마실 수 있다. 생달걀은 집어넣을 때 껍질이 안에서 깨지면 자궁을 다 들어내야 한다더라. 위험해도 이걸 안 배우면 그 술을 우리가 다 마셔야 한다. 손님이 술을 마셔봐야 얼마나 마시겠나. 쇼는 내가 살려고, 맞아죽지 않으려고 배운 거다. 또 그렇게 하면 매상이 잘 올랐고, 매상이 잘 오르면 사장이 예뻐했다. 그나마 사장이 칭찬하면 딴 애들도 무시를 안 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견디려고 살아남으려고 배웠던 것도 같다.

다 같이 숙소 생활을 했나?

= 건물이 지하 1층, 지상 3층이다. 1층에는 룸만 있고, 지하 1층과 2층에는 룸과 타임방이 같이 있다. 그리고 3층은 숙소다. 숙소에는 방이 다섯 개가 있는데 그중 두 방에 아가씨 10명씩, 20명이 생활했다. 거실에 TV가 있는데 일하는 날은 TV를 못 보게 했다. 라디오도 못 듣게 했다. 한 달에 두 번 쉬었다. 그때 TV를 볼 수 있는데, 뉴스는 못 본다. 성매매특별법이 생긴 것도 한창 법 생기고 난리칠 때 손님이 줄어서 안 거지, 그게 어떤 내용인지 제대로 몰랐다.

밖에는 못 나가나?

= 우리는 미용실도 못 갔고 목욕탕도 못 갔다. 미용실에 갔다가 한 명이 도망간 뒤로 안 보내줬다. 미용기구들을 사서 안에서 직접 했다. 손님들이 긴 머리를 좋아해서, 사장이 머리도 못 자르게 한다. 눈썹 깎는 칼로 조금씩 다듬기만 했다. 우리 가게 바로 옆 전봇대에 삼촌이 차를 대고 항상 지키고 있었다. 그 일대는 방석집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고, 집집마다 삼촌들이 다 서 있다. 거리를 지나가면 딴 집 삼촌들도 쟤가 어디 가는지 다 알고 일러주기 때문에 나가거나 도망가는 건 힘들다. 길 건너 슈퍼에 갈 수 있는 사람도 정해져 있고, 허락받고 가야 한다. 열쇠도 보통 때는 그냥 열쇠 쓰다가 영업이 끝나고 우리가 잘 때는 안에서 못 여는 열쇠(쉐프리)로 바꿔 단다. 휴대전화도 당연히 못 쓰게 했다. 아무튼 바깥이랑 완전히 단절된 생활을 했다.

성매매특별법 시행 뒤에는 경찰과 여성단체에서 구조활동이나 단속을 했을 텐데?

= 사장이 아가씨 몇 명을 뽑아 ‘특공대’를 조직한다. 경찰에 답하는 법을 가르친다. “어디 사냐”고 물어보면 “저기 어디 사는데요, 왜요?”라고 말하고, “왜 휴대전화가 없냐”고 물어보면 “요금을 못 내서 끊겼다”라고 말하고. “사장 누구야” 물으면 바지사장 이름 대고. 경찰들이 면담할 때 쓰는 질문지를 사장이 가져와서 답을 외우게 한다. 시키는 대로, 외운 대로만 답하면 된다. 경찰에게 숙소도 보여주지만 “애들이 술 마시고 피곤할 때 자는 데다”라고 얘기하면 경찰은 그냥 믿었다. 거기 붙박이장만 열어봐도 우리가 거기서 사는 걸 알 텐데. 경찰이 믿는 건지, 믿는 척하는 건지 나로선 답답했다.

여성단체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볼 생각은 안 했나?

= 단체에서 소식지나 명함을 나눠주면, 일단 받게 한 뒤에 그들이 가고 나면 삼촌들이 다 걷어가 쫙쫙 찢어서 가게 바깥 휴지통에 버렸다. 또 사장은 “여성단체가 한 명 구조하면 1천만원씩 받는다”고 말했다. 정말 그런 줄로만 알았다. 경찰과 한통속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가끔 그들이 지나갈 때 “나 좀 빼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할 기회가 없었다.

자유가 없는데.

= 밥도 마음대로 못 먹는다. 제대로 먹을 수가 없다. 애들이 전반적으로 살쪘다고 하면 단체로 굶긴다. 하루에 한 끼만 준다. 살 안 찌게 하려고 일 끝나면 일주일에 두 번씩 운동을 시켰다. 비가 오거나 추울 때는 숙소에서 단체로 1시간 동안 스트레칭을 시키고, 날씨가 좋으면 개천에서 경보를 해야 했다. 경보할 때도 애들을 조별로 나눠서 시키고, 삼촌들이 바짝 붙어 같이 뛰기 때문에 이때도 도망갈 생각을 할 수 없다. 몸무게 벌금도 있었다. 살이 좀 쪘다 싶으면 몸무게를 재본다. 52kg이면 “일주일 동안 2kg 빼”라고 말한다. 살을 못 빼면 벌금 20만원, 1kg만 빼면 벌금 10만원, 살이 찌면 30만원, 뭐 이런 식이다. 굶겨서 야식을 안 줄 때였다. 저녁 때 지나가는 김밥 아줌마한테서 몰래 김밥을 사서 화장실에 가져가 담배 한 모금 피우고 김밥 하나 먹고, 담배 한 모금 피우고 김밥 한 개 먹고 했다. 음식 냄새가 몸에 배면 들키니까 담배를 피우면서 먹었다. 라면을 숨겨뒀다가 밤에, 그것도 화장실에 가서 몰래 먹었다. 젓가락이 없어서 아이섀도(붓 형태의 눈썹 색조 화장도구)를 젓가락으로 썼다. 어떨 때는 라면을 다 부숴서 거기에 물을 부어 마셨다.

군대 같다. 왜 그렇게 사장 말을 잘 들었나? 반항은 안 해봤나?

= 2002년이었을 거다. 월드컵을 할 때라 분명히 기억한다. 단골손님이 계산을 하는데 돈이 모자랐다. 돈을 뽑으러 갔다 온다기에, 내가 같이 나갔다. 시간이 좀 오래 걸렸다. 삼촌이 내가 손님이랑 도망가는 줄 알았는지 동네방네 나를 찾으러 다니더니, 나를 발견하고 가게로 데려가 마구 밟았다. 보통은 때려도 얼굴은 안 때린다. 일을 해야 하니까. 근데 이때는 내가 도망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가차 없었다. 온몸이 붓고 멍투성이였다. 사흘을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었다. 3층이 숙소인데 거기서 뛰어내릴까 생각도 하고, 별별 생각을 다 했다. 그때 맞은 기억 때문인지, 지금도 걸어다니다가 삼촌이 붙잡으러 올까봐 계속 뒤를 흘긋흘긋 본다.

불만을 말하면 사장은 “다 니네 정신이 해이해져서 그렇다”며 벌을 세웠다. 2000년인가는 애들과 같이 사장에게 뭘 좀 시정해달라고 건의했다. 애들 쭉 모여앉아서. 그랬다가 삼촌들이 와서 발로 걷어찼다. 손님을 호객할 때 앉는 의자를 일주일 동안 치워버려서, 다리가 아파 죽을 뻔했다. 우리가 신는 구두 굽 높이가 20cm이기 때문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리가 아프다. 그 안에 계속 있다 보면, 사장 말이 곧 법이다. 사장이 정말 ‘파워’가 센 사람이라고 느끼게 되고 반항할 수 없게 된다.

어떻게 도망나온 건가?

=한 달에 한 번 정도 애들을 모아서 병원에 갔다. 한 달 전부터 그때 도망가야겠다고 결심하고 병원 가자고 애들에게 말했다. 병원에 갈 때도 삼촌이 꼭 붙어서 가기 때문에 병원 가는 애들이 많아야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곳에서 해결하기 위해 건물 안에 안과, 내과, 치과 등이 다 있는 곳으로 간다. 난 2층 안과에 갔다. 삼촌이 딴 애들을 내려놓기 위해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탄 채 문이 닫혔다. 곧장 내달렸다. 추리닝 차림에 지갑도 없었다. 500m 정도를 마구 뛰어 택시를 타고 톨게이트 없이 갈 수 있는 다른 도시로 갔다. 예전에 도망가면 톨게이트에 사장이 사람을 푼다고 말했기 때문에…. 뛰면서도 내가 빠져나올 수 있을까 했는데 이렇게 빠져나올 수 있어서 다행이다.

사장을 형사고발했는데, 성매매알선 혐의만 인정되고 나머지 감금이나 횡령은 아예 기소가 되지 않았다. 재판 결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여전히 그 가게는 영업 중이다. 사장 처벌이 어떻든, 일단 가게 문을 닫게 해야 한다. 사장이 가게를 닫으면 어쨌든 일을 그만두고 싶어하는 애들은 그만둘 수 있으니까. 그 안에서 일어나는 폭행 등도 멈출 테고. 지금 내 꿈은 여성단체 활동가다. 구조활동 나가서, 가게에 있는 동생들을 빼내고 싶다. 사람들은 유천동에서 벌어지는 일들, 강제로 일하는 성매매 여성의 문제가 다 옛날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또 다들 원해서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아닌 사람도 많다. 특히 유천동은 더 그렇다. 군산처럼 불이 나서 여성들이 또 그렇게 죽어야 바뀌는 건지…. 나 혼자 자유롭게 바깥공기를 마시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다.

7년을 일했다. 모아둔 돈은 없나.

= 내가 상대한 손님대로 해서 8:2로 수익을 배분한다고 하는데, 얼마를 벌었는지 장부를 보여준 적도 거의 없다. 한 달에 한 번 100만원 정도 받았다. 90만원일 때도 있고, 110만원일 때도 있다. 그 중에서 가게에서 사용하는 휴지 등을 사는 ‘공금’을 30만~40만원 정도 걷었다. 세탁소비 10만원도 나갔다. 그러고 나면 남는 돈은 얼마 안 된다. 은행을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돈을 저축할 수도 없었다. 1998년에 세 얻어서 가게를 시작한 사장은 2년 뒤인 2000년에 건물 전체를 사들였다. 자기 집도 대전 ㅎ아파트에서 잘 사는 사람들이 산다는 둔산동 ㅋ아파트 50평대로 옮겼다. 매매가만 8억원이다. 그가 우리를 착취해 배불리 사는 동안, 나에게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