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단체, 운동의 독자성 견지해야..

여성운동이 제도화된다

여성단체, 운동의 독자성 견지해야

문이정민 기자
정부의 돈으로 운영되는 여성단체가 정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지난 13일,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에서 주최한 ‘여성운동의 제도화, 그 후 20년: 호주의 경험을 중심으로’ 쟁점토론회에서 이 같은 문제제기가 불거져 나왔다. 이 토론회에서 정경자(Social Policy Research Center, University of New South Wales, 호주) 박사는 20여 년 동안 정부의 재정적 지원 등을 받아온 호주 여성운동단체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정박사는 “호주가 성별권한척도(GEM: Gender Empower -ment Measure) 4위 국가라는 것을 믿기 어려울 만큼 여성운동이 약화돼 있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이미 여성운동은 죽었다’고까지 비판할 정도. 정박사는 이렇듯 처참한 호주 여성운동 현실의 원인을 ‘제도화’에서 찾고 있다. 여기서 ‘제도화’란 “여성운동이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 남기 위해 기존 조직, 국가나 정부의 지원을 요구, 이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경자 박사는 “정부에게 여성문제의 해결에 대한 책임을 인지시키고 법 제정 등을 통해 여성운동 조직에 대한 지원을 의무화 한 것은 오랜 여성운동의 성과”임이 분명하지만, “여성운동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낳은 부작용 역시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여성단체, 정부업무 담당기관으로 전락

정박사가 5개월 동안 痔恙П만?진행한 호주의 여성단체는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급진적인 여성운동조직의 하나로, 성폭력 이슈의 급진적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아직 ‘강간 위기센터’라는 단체명을 사용하고 있다. 1974년에 설립된 이 단체는 초기의 열띤 논쟁에도 불구하고 결국 1975년부터 연방정부의 기금을 받았다.

이후 재정을 정부에 의지하면서 이 단체의 정치적 활동은 급격히 감소했고, 상담기관으로서의 역할만이 강화돼 갔다. 감사관들이 이 단체의 정체성을 유일한 24 시간 전화상담소로 규정하면서 활동을 다른 영역으로 확장하지 말라고 제안한 것. 결국 이 단체는 독립적인 운동단체로서의 위상을 상실한 채, 국가의 성폭력 업무를 저렴한 비용으로 담당하는 하나의 기관으로 전락했다.

이는 각종 상담업무에 과부하가 걸려있는 한국 여성단체들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상담활동에 소위 ‘프로젝트’(정부의 지원금을 받고 수행하는 사업)가 많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상담’ 활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사회적 이슈를 발굴해온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이하 여성의전화)은 최근 “정부지원 받으면서 독자적 목소리를 내기 힘들 수 밖에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여성의전화의 경우, 제도의 틀 속에서 운동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견지해나가기 위해 고민해왔으며 상담소와 본부의 분리를 선언했다. 정부의 재정지원은 상담소에 국한하고 여성의전화 본부는 재정이나 구성인원 등 모든 면에서 분리 운영을 통해 운동의 독자성을 견지해보려는 시도다.

“이런 일 하러 단체 들어왔나”

한편 ‘제도화’의 역사 속에서 여성운동가들의 정체성 변화도 중요한 문제다. ‘제도화’는 조직을 형식적이고 위계적인 구조로 만들었고, 업무량의 과다로 기력이 소진한 활동가들이 아주 운동단체를 떠나게 만들기도 했다. 정경자 박사가 현장 연구했던 단체 역시 대부분 3년 미만 근무한 활동가들로 이뤄져 있는 실정이었다. 정박사는 “호주에서는 여성운동단체라고 하기보다 ‘WOMEN SERVICE CENTER(여성 서비스센터)’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또 호주활동가들을 인터뷰해보니 그들은 스스로를 ‘여성주의 상담원’ 혹은 ‘여성 서비스 영역 종사자’라고 표현했다”고 말했다.

김영삼 정권 이후 상당부분 정부지원금에 의존해 재정을 운영하고 있는 한국 여성단체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여성단체 상근자인 A씨 역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그는 “정부 지원을 받는 사업이 많아지면서 보고서, 감사를 대비한 회계 업무 등에 할애하는 시간이 절대적이다. 밤새도록 이런 업무에 열중하고 있다 보면 내가 이런 것 하러 단체 들어왔나 싶은 생각이 든다”면서, “단순히 업무량의 과다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업무, 어떤 활동을 하느냐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제도화의 가장 큰 문제는 운동조직의 ‘급진성’을 퇴색시킨다는 점이다. 정경자 박사는 “운동조직들은 그 시대의 예리한 칼날로서 정부를 비롯한 기존 조직에 비판과 감시의 기능을 담당해왔다. 제도화는 무엇보다 이러한 급진적 성격을 약화시킨다. 특히 국가의 지원을 활용하면서 운동조직이 이슈화한 문제들이 다른 관점으로 정의된다”고 지적했다. 호주의 경우 정부의 재정지원을 통해 대중 여성들에게 안정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긴 했지만, 오히려 대중적인 지지는 약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여성운동의 의제들, 여성주의적 시각은 급속도로 주변화되고 있다.

이에 대해 토론회에 참가한 여성부 관계자는 “여성이슈가 주변화된 이유가 단지 제도화 때문이라고만 볼 수 있는가. 이슈 자체가 없기 때문은 아닌가”라고 질의했다. 이에 대해 정박사는 “호주에서 ‘Family First’를 슬로건으로 내건 보수정권이 들어섰을 때 정부는 여성 이슈 중 재정지원을 가정폭력에 집중했다. 가정폭력을 ‘가정’에 국한된 문제로 본 것이다. 정부 재정에 의존하고 있던 여성운동조직들 역시 살아남기 위해 초점을 그렇게 맞출 수 밖에 없었다. 여성주의적 입장으로 접근했을 때 정책에 반영시키거나 설득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 시각이 이렇게 주변화되는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여성운동의 힘 어디서 오는가

“이제는 정부지원을 받는 막바지 시점에 왔다.” 현재 호주 여성운동가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라고 한다. 이러한 호주 여성운동의 현실은 한국 여성운동계에 시사하는 바 크다.

정경자 박사는 “그 동안 운동 단체에서 하던 많은 사업들이 프로젝트 사업으로 정부의 재정지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운동계 내부에서 이러한 운동의 변화된 여건이 가져온 것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운동단체의 확장, 지부 개설, 더 많은 프로젝트를 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성찰하고, 조직 내부와 운동가들에게는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운동계 전체에는 연대를 야기시켰는지 분열을 초래했는지 생각해 볼 일”이라는 것.

또한 제도화 과정 속에서 여성운동가 출신 관료(femocrat)가 늘어가고 있는 점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했다. “효과적인 활동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성 운동계의 독립성과 자율성, 그리고 여성운동의 대중적인 힘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정박사는 이런 대중적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금 여성들이 무엇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지에 관심을 늘 기울여야 한다”면서 “여성대중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원이 바로 운동성의 뿌리”임을 상기시켰다.

이에 조순경 여성연구원장은 “여성운동의 힘은 어디서 오는가, 정부지원의 돈이냐, 권력 행사자리냐, 아니면 대중여성들의 의식이냐. 이것을 지금 물어야 할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또 “현재 여성단체들의 문제를 지적하는 데 있어 분명 성역이 있다”며 “조직 내부에 문제가 있다면 즉각적으로 회복해 건강성을 담보해야 한다. 여성운동의 주요기능은 복지 서비스가 아니라 ‘비판’이다. 그런데 정작 여성운동 자체를 비판하지 못하면서 사회, 정부를 향해 비판해봤자 무슨 설득력이 있겠는가”라고 지적했다.

출처: 여성주의저널 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