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이슈 사라진 여성운동 어디로 가나>

<대형 이슈 사라진 여성운동 어디로 가나>

[연합뉴스 2007-03-05 09:49]

호주제 폐지·성매매 방지법 등 숙제 풀려
여연 등 '여성빈곤 해소'에 역량 집중키로

(서울=연합뉴스) 현윤경 기자 = 이달 8일은 창립 99주년을 맞이하는 '세계여성의 날'이다.

역사적인 100주년을 1년 앞둔 현재 비록 지역별 편차는 있지만 여성의 평균적 지위는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세계 각국에서 여성 총리 등 정치지도자가 나오고, 미국과 프랑스 등 강대국에서 여성 대통령 탄생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85년 '한국여성대회'를 개최하면서 세계여성의 날을 기념하기 시작한 한국 역시 여성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불과 20여 년 만에 눈부신 약진을 했다.

여성계의 숙원이던 호주제가 폐지됐고, 성매매 방지법이 시행에 들어갔다. 이제 '여풍'이라는 단어가 정치, 법조, 군대 등 여성에 대한 진입 장벽이 높은 분야까지 점령할 만큼 여성의 사회 진출도 활발하다.

하지만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여성운동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전환점을 맞이한 여성계를 진단하고, 앞으로 여성운동의 방향에 대해 전망해 본다.

◇높아진 여성 위상= 한명숙 총리의 임명으로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가 탄생하고, 의회에 여성 의원 비율이 두 자릿수로 높아지는 등 최근 들어 여성 약진은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최근 단행된 법조계 인사에서도 신임 여성 판사와 검사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것도 날로 커지는 '여성파워'를 보여준다.

올해 1월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연수생 중 판사 임용이 예정된 여성이 전체 90명 중 66.4%인 58명을 차지했고, 검사 임용이 예정된 연수생도 전체 100명 중 44명이나 됐다.

최근에는 공군 제8전투비행단의 박지연 대위가 공군 사상 최초로 여성 전투기 편대장으로 임명돼 금녀의 벽을 하나 더 허물었다.

지난해 7월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50.1%를 기록해 처음으로 50%대에 진입했다.

여성의 대학(전문대 포함) 진학률도 사상 처음 80%대인 80.8%로 늘어나 여성 인력의 고급화가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가운데 고소득 전문직종에서 새로 생긴 안정적 일자리 10개 중 6개는 여성이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높아진 여성의 지위에 걸맞게 법과 제도적인 정비도 활발하다.

대표적인 여성 차별 제도로 꼽혀온 호주제 폐지 법안이 통과됐고, 성매매 방지법 시행으로 우리 사회의 왜곡된 성 의식을 바로잡는 계기가 마련돼 여성운동의 이정표가 세워졌다.

◇"여성운동은 위기"= 하지만 여성 지위 향상과 호주제 폐지와 성매매 방지법 시행이라는 큰 성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여성운동은 위기를 맞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무엇보다 여성운동의 대오를 하나로 묶어주던 호주제 폐지와 성매매 방지법이라는 큰 숙제가 사라진 것이 역설적으로 여성계의 위기 의식을 촉발시켰다는 분석이다.

김기선미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 정책국장은 "큰 이슈가 사라지면서 여성운동의 과제가 갈수록 추상화된다"면서 "여성계가 호주제 폐지 이후 '빈곤의 여성화' 해소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지만 대중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지 못하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1970년대부터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에 헌신해 온 한명희 구로인력개발센터 관장 역시 "여성에 대한 차별이 명시적이었던 과거에는 지식인 여성부터 하층 여성까지 공동으로 차별에 맞섰다"면서 "하지만 이제 계급과 계층에 따라 여성의 스펙트럼이 워낙 다양해지며 이들을 하나로 묶으며 대중적으로 공감대를 얻는 운동은 불가능해졌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지난 연말 여성가족부의 성매매 방지 회식비 지원 캠페인 당시 벌어진 여성가족부 폐지 온라인 서명 운동에서 보듯 여성운동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도 여성운동가들을 당혹게 하고 있다.

여성계는 이러한 반감이 일부 마초주의적 네티즌 사이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본다. 예컨대 대학의 여성학 강의 시간에 일부 남학생들이 앞자리에 진을 치고 앉아 여성운동을 냉소하는 질문을 쏟아내며 여성학 강사들의 진땀을 빼놓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명희 관장은 "여성운동이 남성에 대항한 투쟁이 아니라 남녀가 공존하는 사회로 가기 위한 운동이라는 것을 설득하는 데 소홀했던 것이 아닌가 반성해야 할 측면이 있다"고 강조했다.

한 관장은 "뿌리 깊은 한국의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들도 어릴 때부터 가정을 짊어져야 할 존재라는 부담을 지는 등 억압을 받아왔다"면서 "여성운동의 목표가 남녀 모두 소외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임을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운동의 최전선에 서있는 활동가들이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지 못한 것도 위기를 만드는데 일조했다.

김기선미 국장은 "요즘 시대는 밤새워 일하는 게 아니라 긴 호흡을 가지고 차분히 공부하고 사유해 정책을 만들어내야 하는 시대"라면서 "하지만 지금까지 여성운동은 눈앞의 과제에만 급급한 채 전체를 보는 안목을 키우는데 소홀했다"고 인정했다.

그는 또 민주화 운동을 하던 386세대 여성운동가들과 절차의 민주성을 중시하고 감성적인 2000년대 학번 운동가들의 소통이 어려운 점도 여성운동 내부에서 극복할 과제로 꼽았다.

◇대안은 생활 밀착형 운동= 전환점에 선 여성운동은 생활 밀착형 운동으로 위기를 돌파해 나갈 계획이다. 추상적으로 구호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파고드는 운동으로 대중의 공감대를 넓혀나가겠다는 것이다.

진보 여성단체인 여연은 '빈곤의 여성화' 타파라는 구호를 내걸고 실질적인 지원이 절실한 하층 여성들을 위해 조직의 역량을 집중키로 했다

여연은 이를 위해 올 한해 '여성희망 쑥쑥 캠페인'을 진행한다. 척박하고 오염된 환경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피어나 주변을 푸르게 뒤덮는 쑥처럼 우리의 삶에 파고들어 삶을 피폐화시키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풀뿌리 지역 여성운동을 시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여연은 연말 대선을 앞두고 여성들의 삶의 현장에서 모인 정책 요구를 각 대선 후보들이 공약에 반영하도록 제안하고, 여성 빈곤 문제가 사회의 핵심 의제로 떠오를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을 벌일 예정이다.

한국여성민우회 역시 일상 생활을 파고드는 여성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올 한해 회원 1만 7천여 명을 대상으로 '기꺼이 불편해지기'라는 이름의 캠페인을 전개한다.

자기 컵 가지고 다니기, 내복 입기, 재래시장ㆍ동네가게 이용하기, 면생리대 사용하기, 걷기 생활화하기, 일주일에 하루 TV 끄기, 젓가락 가지고 다니기 등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환경운동으로 속도와 편리 위주로 흐르는 현대사회의 생활태도를 반성하자는 취지다.

ykhyun14@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