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강제노동·성매매… 1200만명 신음 중
[세계일보 2007-04-24 07:18]
◇브라질 아마존 분지의 한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 노동자들이 작업에 앞서 감독관의 지시를 듣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사람들은 ‘노예’라고 하면 흑인이나 쇠사슬, 채찍질에 터진 등짝 등 극단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다. 이 때문에 노예는 이미 옛날 얘기라고 생각하곤 한다. 신분제도에 따른 노예는 거의 사라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경제적인 이유나 인신매매에 의해 노예 아닌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21세기 선진국에서까지 이어지는 현대판 노예의 실태를 살펴본다.
아프리카 가나의 소년 마울레하웨(12)는 고기잡이배를 타고 있다. 엄마가 그를 고기잡이배 선장에게 48달러(약 4만5000원)에 팔아넘겼기 때문이다. 그 돈은 가나 회사원 두 달치 월급으로, 한 가족이 석 달 동안 마실 물을 살 수도 있다. 친척들은 그가 먹고살 기술을 배울 기회를 잡았다며 축하해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기대와 달리 마울레하웨는 구타와 악천후 속에 목숨 건 고기잡이를 해야 하는 노예로 생을 마감할 가능성이 크다.
리투아니아에서 온 지에라(19)는 영국 히드로공항 카페에 앉아 남자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말을 런던에서 보내자던 남자 친구는 “살 게 있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때 갑자기 나타난 건장한 남자들이 지에라를 납치하듯 데려갔다.
이들은 지에라를 성폭행한 뒤 런던의 성매매업소에 팔아넘겼다. 남자 친구가 자신을 런던에 데려온 뒤 이들에게 팔아넘겼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됐다. 지에라처럼 영국 성매매 업소에 팔려오는 동유럽 여성은 한 해 약 4000명에 달한다.
영국 BBC방송은 전 세계 곳곳의 ‘현대판 노예’ 실태를 보도하고 그 인권 유린의 현장을 고발했다. 현대판 노예는 강제노동, 아동노동, 강요된 성매매, 인신매매 등 다양한 형태로 이뤄진다.
유엔은 노예를 ‘어떤 사람에게 소유권을 갖고 그에 따른 지배력을 행사하는 상태나 조건’이라고 정의한다.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인신매매에 의한 강제 노동과 성매매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현대판 노예는 국경과 경제체제를 막론하고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종족 간 갈등이 끊이지 않는 아프리카 대륙에는 광범위한 노예시장이 형성돼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노예 제도가 유지돼 매년 수만명이 노예의 운명으로 태어난다. 갈등 관계에 있는 부족들은 경쟁 부족민을 납치해 노예시장에 내놓고 반정부 투쟁을 벌이는 무장세력들은 어린이들을 납치해 전투에 투입한다. 국제노동기구(ILO) 관계자는 “아프리카는 아동 강제 노동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주장한다.
아시아에서는 강제 노동과 성매매가 많이 이뤄진다. 일부 국가에서는 군부대나 건설현장 등에서 강제노동이 이뤄진다. 중국에서는 상당수 교정시설 수감자들이 ‘노동을 통한 교화’를 명목으로 강제 노역을 해야 한다. 아시아 지역은 특히 인신매매를 통한 성매매 여성 공급처로 악명 높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속한 미주·유럽 대륙도 큰 차이는 없다. 북미에는 중남미에서 흘러 들어오는 인신매매 거래망이 곳곳에 뻗어 있어 매년 수만명이 미국·캐나다의 농장과 공장에서 강제노동을 한다. 영국 등 서유럽은 동유럽에서 흘러 들어온 성매매 여성 착취가 부쩍 늘고 있다.
세계 각지 산업현장의 강제노동 수요가 늘면서 그 공급 규모도 커졌다. ILO는 세계적으로 약 1230만명이 노예 아닌 노예생활을 하는 것으로 추산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그 수가 2700만명에 달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아시아와 중남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은 강제 노동자 수가 유독 높은 것으로 조사된다. 강제노동자들은 매년 약 310억달러의 부를 창출하는데, 이 가운데 절반인 150억달러가 선진국 시장에서 창출되고 있다.
강제노동 시장 규모만큼이나 국제 인신매매도 늘고 있다. 유엔은 약 25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인신매매되며, 이 중 120만여명이 어린이인 것으로 보고 있다. 유엔마약범죄국 통계에 따르면 세계 인신매매 시장 규모는 300억∼400억달러에 이른다.
현대판 노예 문제가 심각해지자 국제사회가 나섰다. 유엔은 지난 3월26일 “세계화로 인한 현대판 노예 무역 증가는 심각한 문제”라면서 이를 막기 위한 국제기금 조성을 제안했다. 개별 국가들도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큰 효과는 거두지 못하는 실정이다. 강제노동 가운데 약 20%가 군대나 교정당국 등 국가기관에 의해 이뤄진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현대판 노예들을 ‘해방’시킨다 하더라도 사후 처리가 쉽지 않은 것도 문제다. 이들은 대부분 10∼2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가족과 떨어져 지냈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가족이 누군지,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이들은 갈 곳도, 오라는 곳도 없다. 게다가 오랜 세월 몸에 밴 강제 노동으로 자립 능력마저 없어졌다. 국가나 비정부기구 모두 이들을 구제하는 데 역부족이다. 결국 이들은 최악의 생활환경을 전전하다 다시 노예시장에 발을 들이기 십상이다. ‘보이지 않는’ 노예의 사슬은 이들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 셈이다.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 관계자는 “현대판 노예들은 해방되더라도 부모나 고향을 찾아 되돌려 보내기 어렵다”며 “설령 돌려보내더라도 이들을 사회·경제적으로 재활하도록 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안석호 기자 sok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