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칼럼]똑바로 나를 보라 2 후기_별

똑바로 나를 보라 2 후기 (별)
 
 
 
1. 똑바로 나를 보라 2

 
성노동자권리모임 지지에서 각본, 연출, 연기한 『똑바로 나를 보라2』 가 변방연극제에서 상영되었다. 장맛비가 내리던 7월 25일 미아리예술극장으로 연극을 보러 갔다.
 
스스로를 ‘주체적이고 전문적인 성서비스 노동자’로 명명하는 주인공 나용자는 대학원을 다니며 작가를 지망하고 있다. 그녀는 마사지 업소에서의 성노동 경험을 토대로 자전적인 글 ‘똑바로 나를 보라’ 를 출판한다. 이 책의 출판 기념회는 그녀가 대결하고자 하는 노동운동, 여성운동, 철학을 의인화한 사상가들과 미지의 독자들, 그리고 그녀 자신이 각축하는 장이 된다. 이것이 연극의 무대 상황이다.
 
나용자가 무대에서 무엇보다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주체성이다. 그녀는 억압과 착취, 폭력과 피해, 도덕의 언어가 지긋지긋하다. 그녀는 인신매매나 감금, 구타를 당하지 않았고 성폭력을 당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성과 사랑을 타락시키지도 않았다. 현대인들이 노동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그녀는 노동할 뿐이다. 그런데도 왜 나는 불법적인 존재여야만 하는가? 이것이 그녀의 문제의식이다
 
불법. 법의 금지와 처벌은 무엇보다 그녀의 주체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성노동은 강도, 사기, 폭행, 살인과는 다르다. 당연히 사회를 향한 그녀의 요구사항은 성매매 합법화가 된다. 관객이 무대 위에서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분명 이러한 논리이다.
 
나용자의 증언은 가치가 있다. 기존 운동의 언어에 내재한 낙인을 가격하며 나용자를 불법적 존재로 명명하는 법의 무의식과 금기를 불편하게 한다.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가 젠더로서의 여성에게 부과한 성과 노동의 경계를 재고하게 한다. 폭력과 트라우마로 일축되어온 성적 경험이 개인 삶의 얼굴을 하고 다가오도록 한다.
 
그러나 나용자의 증언에는 누락된 것이 있다. 그녀가 성노동 현장에서 무엇을 경험했는지다. 이쪽과 저쪽세계, 성노동 현장과 그것을 감추어야만 하는 공간으로 이분된 삶을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또한 그녀 그리고 우리가 우리앞에 놓여진 이 경험으로 왜,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나누어야 하는지에 관한 논의이다. 이러한 정치적 경험론이 결여된 채로 ‘주체적 전문적 성서비스 노동’이라는 한 줄 요약이 선언될 때 관객은 왜, 어떻게 그 경험에 찬성하거나 반대해야 하는지 모르는 채로 남겨진다.
 
연극은 이런 상태를 사용하여 성노동에 대한 자신의 주체적인 정의를 관객들에게 밀어 부친다. 그러므로 연극은 형식상 찬반토론이지만 사실상 관객이 나용자에게 동의할 수밖에 없도록 짜여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연극에서 가능한 공동의 귀결은 이러한 성격의 것에 국한된다.
 
한 사람의 생애 전반을 추동하는 행위성의 해석은 운동의 결을 만드는 핵심적인 작업이다. 행위성은 곧 권력의 장이고 모순-법칙이라는 아이러니로만 움직인다. 이 아이러니를 단순화하며 획득한 말끔한 주체성은 공허하다. 연극은 껍질을 다 까고 자그마해진 주체성을 자신의 해방을 위한 제1과제라고 여겨지는 합법적 노동자 정체성을 확보하는데 남김없이 써버린다. 연극은 나용자를 비인간에서 인간으로 도약하게 하기 위하여, 법의 테두리 안으로 진입하여 시민권을 얻게 하기 위하여 우선적으로 노동자 정체성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21세기 한국사회에서 노동자 정체성과 노동의 속성. 이것은 이것대로 얘깃거리가 있다.
 

2.

『서비스 이코노미』에서 이진경은 국내 성노동을 젠더화, 섹슈얼리티화, 프롤레타리아화된 서비스 노동의 네 가지 전범ㅡ군대 노동, 국내 매춘, 군대 매춘, 이주 노동ㅡ 중 하나의 유형으로 분석한다. 인류의 성적, 인종적 위계는 특정한 노동 양태로 현상되며, 다시 이러한 노동의 양식은 곧 위계화된 특정 집단을 위해 구성된다는 것이 이 책의 논리이다. 이진경은 이 노동들을 가리켜 죽음정치적 노동이라고 한다. 살기 위해서는 이 노동을 해야 하며 이 노동을 하는 한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배제하는 포함’, ‘생명권력의 구성적 차원으로서의 죽음정치적 노동’의 원리다.
 
이 책에서는 줄리아 오코넬 데이비슨을 인용, 성노동이 ‘인위적인 저임금 경제를 유지하는데 기여했으며 빈곤 여성의 대안적 복지체계로 기능했다’고 쓰고 있다. 성별화된 정치경제체제를 통해 가족을 부양하는 모성,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성을 재생산하는 것과 성노동을 선택하는 행위성은 연결되어 있으며 가부장제 자본주의는 근대화 과정에서 이 노동, 이 집단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영자’를 ‘능동적인 동시에 수동적인 행위자’로, ‘일련의 상해와 폭력의 힘들에 의해 변형되는 동시에 그 힘들을 변화시키는 존재’로 간주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나용자를 떠올린다. 오롯이 주체적으로 노동자이고자 하는 나용자는 정상적이고 생산적인 임금노동자로서 적합할 것이나 시스템에 진입하기 위하여 시스템 자체를 승인해버림으로써 저항의 입지를 좁히는 자가당착의 과제를 안고 있다. 성노동의 낙인을 완화하면서도 가부장적, 자본주의적, 죽음정치적 노동에 저항할 수 있는 위치성을 길러내기 위해서 어떤 방식이 가능할 것인지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다.
 
성노동 운동의 언어가 노동운동, 여성운동, 인권운동이 축적해온 억압, 폭력, 윤리의 언어를 적대하고 비껴가면서 확보하고자 하는 담론의 영역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관계를 배제하는 주체성만으로 획득된 노동자 정체성으로 권리의 언어를 어떻게 뒷받침 할지 연극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다.

최근 국제 엠네스티 대의원 총회에서는 성노동 전면 비범죄화 정책이 통과되었으며, 국내에서는 성매매 처벌법 21조 1항 위헌 제청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엠네스티의 정책은 사법 및  경찰력을 대상으로 짜여져 있을 뿐, 성매매 업소의 고용이나 성구매 과정에서의 폭력에 관련된 정책은 담고 있지 않다. 폭력에 대한 문제제기는 권리와 맞닿아 있다. 처벌법이 사라진다면 보호법이 사라질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라면 열악한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완충작용을 해줄 수 있는 다른 것들에 대한 구체적인 상들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3.

파국과 폭력의 시대에 우리가 인간이기 위하여 가능한 것들을 상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성노동자 당사자의 주체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성별화된 노동, 젠더, 성 자체와 길항하는 새로운 주체성의 형식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공동의 운동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런만큼 관객들의 여러 후기들을 모아 똑바로 나를 보라 3 가 탄생한다면 어떤 이야기들이 담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