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를 넘어서는 말하기 – 절대강좌 2강 후기

정희진님, 웃음코드로 강의를 열어서 이룸에 대한 폭풍같은 지지와 알쏭달쏭 고민거리를 제공해 주셨습니다. 으하하.
강의를 들은 밀사님이 후기를  보내오셨어요~

2강 5/27(월)은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숭배와 혐오 : 성판매여성에 대한 형벌로서의 혐오범죄
여성학 강사, <페미니즘의 도전> 저자이신 정희진 선생님의 강의였습니다.

후기가 초큼 긴데요,, 그래서 강의에 대한 부분만 색깔 글씨로 올릴게요,, 이제 밀사의 후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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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성노동자권리모임 지지의 활동가 밀사입니다. 선생님께서 강의 중간에 반은 우스갯소리로 '20대 분들은 성매매를 둘러싼 운동 안 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는데, 네 그 사람이 저입니다! 아이고. 부끄럽네요.
지지에 들어가 활동을 시작한 지도 어느새 햇수로 3년째, 이제 겨우 만 2년을 꽉 채울락 말락이네요. 그동안 뭐 제대로 한 것도 없는데 고민에 고민만 거듭하다 여기까지 흘러왔어요. 활동을 시작하기 전의 전 뭐 개풀 아는 거 하나 없는 그야말로 백지 상태였어요, 성노동과 성매매, 성산업 문제에 대해서 말예요. 이후 무작정 부딪히고 실수하고 사고 치고 흐트러지고 (그러니까 마치 술게임을 일단 거듭 지고 마셔가며 배우는 것처럼) 그러는 동안, 성매매를 사유하는 저의 태도나 가치체계, 인식틀, 이런 것도 파도처럼 쌓이고 무너지고 휩쓸리고 다시 덩어리로 엉겨들기를 반복했어요. 그야말로 격랑의 시기였다고나 할까요. 앞으로도 딱히 다르지 않을 것 같긴 해요. 운동을 한다는 게 또 그래서 매력적인 거 아니겠어요? 🙂
 
아아, 정말이지 다들 공감하시겠지만 성매매 문제는 진짜 너무 어려워요. 뭐랄까 최종보스 느낌 나고 막 그래요. 어려우니까 이번 이룸 강의도 신청하시고 그러신 거겠지요? 저도 그래요. '성노동 운동은 반성매매 운동이랑 반대편 아니야? 왜 성노동 운동 활동가가 이룸 강의를 듣지?'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혹시 계시려나 싶기도 한데요, 저의 경우 뭣도 모르던 활동 초기에는 은연중에 반성매매의 이야기를 미워하는 마음 같은 게 있었는데, 지금은 성노동 운동과 반성매매 운동이 결국은 같이 가야 하고, (솔직히 개인적으론 성노동/반성매매 이렇게 갈라진 '진영'으로 인식되는 것도 너무 싫어요) 오랜 시간 소통을 깊이 쌓아 나가며 많은 활동들을 함께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동안 많은 선배 활동가들이 현장에서 활동하고 언니들과 함께 하시며 쌓아 온 날카로운 현실 인식과 성산업의 지형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많은 것들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런 연유로 그런 고민들을 나누고 함께 공부를 하고 싶어 이룸의 강좌를 신청한 것도 있고요, 무엇보다도 퀴어와 성매매의 이야기를 하나의 윤곽으로 묶는다는 그 자체가 너무 기쁘고, 기대되고, 흥미로워서, (한국에서도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등을 비롯한 상당수의 성소수자들이 성노동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성매매 의제도, 성소수자 의제도, 결국은 사회가 사람들에게 정형화된 정체성과 역할을 끊임없이 요구해 왔으며, 그것을 이탈한 사람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단죄하며 주변부로 밀어내 왔는가의 문제에서 같은 줄기를 지니고 있으니까요) 지체 없이 강좌를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정말 후회 없는 선택이었어요. 이제 겨우 3분의 1 들은 거지만 정말로 그런 생각이 막 들어요.
 
2강 정희진 선생님의 강의는요, 정말로 숨가빴어요. 선생님께서는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그야말로 쏟아붓듯이 풀어내셨고요
(어느 정도였냐면, 선생님 강의를 실시간 녹취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들 정도였어요),
전 맨 앞자리에 앉아서 강의 듣느라 사실 뒤의 분들을 잘 보진 못했는데,
강의실에 계신 분들 각각의 미묘한 긴장감과 달뜬 마음 같은 것들이 등 뒤에서 막 느껴지더라고요.
선생님 입담이 너무 좋고 재밌으셔서 몇 번을 폭소했는지 몰라요. 정말로 즐겁게 들었어요.

그런데요, 신기한 건요, 그렇게 유쾌하고 즐거운 와중에 한편으로 가슴 한 켠이 묵직하게 찡한 게 있었다는 거예요.
선생님께서 강의 듣는 동안에 필기 하지 말라고 그러셨는데, 막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오해해서 듣고 그걸 그대로 적는다고,
근데 저는 그냥 막 제멋대로 이것저것 필기하고 그랬거든요. 으헝. 아깝잖아요, 좋은 말씀 많이 들려주시는데.
아무튼 그 묵직하고 찡한 게, 처음에 선생님 말씀 받아들으며 적었던 몇 문장에서 비롯한 바도 있는데,
"제가 (제 삶에서) 소수자성을 느끼게 되는 측면은 저의 '관심사'예요.", "저는 저에게 '독특하다'고 말하는 게 정말 싫어요."
그리고 "모든 인식은 희망이고 투사죠. 그러니 진리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가 바로 그것이었어요.
아마도 이 말씀들이 제 개인적인 맥락에서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정희진 선생님의 강의는 우리가 성매매를 사고할 때 기본적으로 담지해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성매매 문제를 자신의 프레임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일 때 어떻게 해야 최대한 왜곡을 줄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배우며 커다란 얼개를 잡아보는 그런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선생님께서는 이에 대해 두 가지 전제를 제시하셨어요.

하나는, 성매매에 대한 총론이나 일반론은 있을 수 없다는 것.
성매매는 남성중심주의-이성애주의-가부장제의 연속선상에 존재하는 것이자 그 자체이기도 하기에,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너무 많고 다양해서 사건 자체를 일일이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성매매를 바라볼 때 시작점을 근절, 반대에 두면 안 된다는 것.
대신 성매매 안팎의 구체적인 상황의 문제를 보아야 한다는 것.
"성매매 근절"이라는 표현이 가능해지는 그 자체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 
 

이에 대해 흐름을 먼저 잡은 뒤, 이 안팎으로 정말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가셨어요.
노동을 '목적의식적으로 대상을 변화시키는 행위'라 규정짓는 것이 여성의 일을 포함,
얼마나 많은 노동과 노동성을 배제시켰는지에 대한, 마르크스의 노동론에 대한 비판,
흔히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으로 우리네 노동이 쉬이 분리되는 '몸과 마음의 이분법'에 대한 비판,
더불어 남성의 노동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으로 분리되는 한편 여성의 노동은 사실상 '어느 부위를 얼만큼 파느냐',
곧 노동할 때 몸의 성애화를 얼마만큼 요구받는가의 문제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처한 계급이 낮을수록 여성의 몸은, 여성은 더욱 급격하게 성애화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셨어요.

 
"성판매 여성에 대한 숭배"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어요.
제가 늘 고민하던 주제였는데,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고민이 좀 더 명료해진 기분이 들어 기뻤어요.
그 숭배는 성판매 여성을 '구원의 대상', '동정의 대상'으로 인식할 때 생겨난다는 것.
한편으로 '해방된 여자'에 대한 숭배도 함께 한다는 것, 그리고 이는 페미니스트 숭배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것, 등등.
"성판매 여성에 대한 숭배 없이 문학과 영화는 존재하지 않았어요." 라고 말씀하실 땐 뭔가 마음이 복잡한 한편 통쾌한 기분이 들면서,
알쏭달쏭한 가운데 가슴 속이 확 시원해지는 기분이었어요.
남성들의 성판매 여성을 향한 혐오는 언뜻 그녀들을 곧장 향한 것처럼 보여지지만, 결국엔 자기연민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서는
'가부장제는 남성의 무능을 야기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함으로써 유지되는 체제'라는 제 오랜 생각을 떠올려냈어요.

 
또한, 어떤 대상을 향한 혐오와 숭배는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그 대상을 '누가', '어떻게' 결정하느냐의 문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합의한 상식'인 이데올로기, 그것을 사회가, 사람들이 수용했을 때,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어떤 대상을 향한 혐오와 숭배, 호와 불호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셨죠.
그리고 어떤 대상을 향한 혐오(+숭배)가 발생하고 그것이 사회적 문제로 기능할 때,
이것을 운동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고민하고 대응하느냐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셨어요.

첫번째는, 혐오/숭배, 호/불호의 현상 이전의 기본 담론을 건드리는 것. 그런데 이는 근본적인 만큼 어렵고 위험하단 것.
두번째는, 일단 혐오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처하는 것. 그런데 이에 너무 집중하게 되면 다른 타자화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

운동이란 것은 결국 이 두 사이를 위태롭게 넘나들며 조율의 자리,
가장 효과적으로 정확하게 문제적 대상/현상을 타격하느냐의 문제일 텐데, 어떻게 첫번째의 방법을 전략적으로 구성하고 실천할지,
어떻게 두번째의 방법을 타자화와 자가당착의 함정에서 비껴가며 운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겠다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결국, '차이를 누가 결정하는가'의 문제라는 것. "누가" 주체인가. 누가 이 기준을 정하고, 강요하는가.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결정한다는 것.
여기서 '나'를 초월적 주체로 상정하고 타자들을 어떤 '이름'으로 규정하느냐의 문제.
성판매 여성과 나 사이에 뭐가 그리 차이가 있는가, 넘어서서 그게 '왜' 차이인가, 질문해야 한다는 것.
선생님께서는 "질문에 답하지 말라, 질문에 질문하라."는 말씀으로 강의를 마무리하셨습니다.
 
선생님의 강의 중 저에게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역시 '성노동'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이었어요.
제가 성노동 운동을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더 집중해서 듣게 된 점도 있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는 '성판매 여성들이 하는 일은 당연히 노동이다.
그런데 이것을 '성노동'이라고 명명하는 방식으로 기존의 노동 방식과 개념에 포섭되려는 시도에는 반대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예전에 읽었던, 선생님께서 한겨레 토요판에 기고하신 '생존자라는 말도 싫어요 내가 죽다 살아났나요?'라는 글이 생각났어요.
이 글의 마지막에서 선생님께서는 "나는 성 판매가 기존의 노동 범주에 포함되기보다는 노동 개념의 변화를 촉진하는, 새로운 문제제기의 언어가 되기를 바란다. 대다수 민중에게(나에게) 노동과 폭력, 괴로움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진실로 동감했던 기억이 나요. 이것은 저의 오랜 화두이자 고민이기도 하거든요.
폭력의 문제와 노동의 문제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 노동 개념도 인권 개념도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무너지고 재구성되는 가변적 개념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늘 있어 왔고, 그렇다면 내가 '성노동'을 고민할 때 이 담론을 앞으로 어떻게 이끌어가야 할까, '성노동은 노동이다'라는 구호를 넘어 성노동 운동을 하는 주체들이 말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고민이 지금도 있지요. '성노동'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는 시간은, 다시금 저의 고민을 찬찬히 차분히 되짚어보는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정희진 선생님의 강의는 저에게, 제가 이제껏 들어본 모든 강의들을 통틀어 가장 즐겁고 명쾌한 한편 깊은 먹먹함이 여운으로 남은, 그런 강의였어요. 이런 표현을 섣부르게 쓰는 것은 굉장히 외람된 일이지만, 정말 선생님의 많은 말씀에 공감했고, 이 공감은 단순히 제 생각과 가치관을 넘어, 겹겹이 쌓여 저란 존재를 이루고 있는 총체적인 시간, 기억의 영역까지 건드린 것이었어요. 더불어 제가 하는 운동, 나아가 제가 하는 운동에 맞닿은 다른 운동들 (사실상 '모든 운동'들이겠죠) 에 대한 고민을 보다 날카롭게 벼릴 수 있었던, 그 의욕을 다시금 단단히 다잡게 했던, 그런 감동적인 강의였습니다. 정말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이런 멋진 강의를 듣게 될 수 있었다는 데에, 정희진 선생님 그리고 이룸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퀴어+성매매', 다음 강좌도 정말정말 기대되어요! 학교 다닐 땐 출석도 제대로 안 하고 과제도 시험도 내팽개치는 놈팽이였던 저이지만, 남은 네 강좌도 정말 열심히! 안 빠지고 끝까지! 들을 거여요. 절 보시면 반갑게 인사 나누어주세요. 6월 한 달 계속될 이룸 절대강좌에서도 물론이고, 앞으로도, 우린 언제든 또다시 스치고 만나고 악수하고 얼싸안을 수 있을 테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