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님, 웃음코드로 강의를 열어서 이룸에 대한 폭풍같은 지지와 알쏭달쏭 고민거리를 제공해 주셨습니다. 으하하.
강의를 들은 밀사님이 후기를 보내오셨어요~
2강 5/27(월)은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숭배와 혐오 : 성판매여성에 대한 형벌로서의 혐오범죄
여성학 강사, <페미니즘의 도전> 저자이신 정희진 선생님의 강의였습니다.
후기가 초큼 긴데요,, 그래서 강의에 대한 부분만 색깔 글씨로 올릴게요,, 이제 밀사의 후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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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였냐면, 선생님 강의를 실시간 녹취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들 정도였어요),
전 맨 앞자리에 앉아서 강의 듣느라 사실 뒤의 분들을 잘 보진 못했는데,
강의실에 계신 분들 각각의 미묘한 긴장감과 달뜬 마음 같은 것들이 등 뒤에서 막 느껴지더라고요.
선생님 입담이 너무 좋고 재밌으셔서 몇 번을 폭소했는지 몰라요. 정말로 즐겁게 들었어요.
그런데요, 신기한 건요, 그렇게 유쾌하고 즐거운 와중에 한편으로 가슴 한 켠이 묵직하게 찡한 게 있었다는 거예요.
선생님께서 강의 듣는 동안에 필기 하지 말라고 그러셨는데, 막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오해해서 듣고 그걸 그대로 적는다고,
근데 저는 그냥 막 제멋대로 이것저것 필기하고 그랬거든요. 으헝. 아깝잖아요, 좋은 말씀 많이 들려주시는데.
아무튼 그 묵직하고 찡한 게, 처음에 선생님 말씀 받아들으며 적었던 몇 문장에서 비롯한 바도 있는데,
"제가 (제 삶에서) 소수자성을 느끼게 되는 측면은 저의 '관심사'예요.", "저는 저에게 '독특하다'고 말하는 게 정말 싫어요."
그리고 "모든 인식은 희망이고 투사죠. 그러니 진리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가 바로 그것이었어요.
아마도 이 말씀들이 제 개인적인 맥락에서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성매매 문제를 자신의 프레임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일 때 어떻게 해야 최대한 왜곡을 줄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배우며 커다란 얼개를 잡아보는 그런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선생님께서는 이에 대해 두 가지 전제를 제시하셨어요.
하나는, 성매매에 대한 총론이나 일반론은 있을 수 없다는 것.
성매매는 남성중심주의-이성애주의-가부장제의 연속선상에 존재하는 것이자 그 자체이기도 하기에,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너무 많고 다양해서 사건 자체를 일일이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성매매를 바라볼 때 시작점을 근절, 반대에 두면 안 된다는 것.
대신 성매매 안팎의 구체적인 상황의 문제를 보아야 한다는 것.
"성매매 근절"이라는 표현이 가능해지는 그 자체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
노동을 '목적의식적으로 대상을 변화시키는 행위'라 규정짓는 것이 여성의 일을 포함,
얼마나 많은 노동과 노동성을 배제시켰는지에 대한, 마르크스의 노동론에 대한 비판,
흔히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으로 우리네 노동이 쉬이 분리되는 '몸과 마음의 이분법'에 대한 비판,
더불어 남성의 노동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으로 분리되는 한편 여성의 노동은 사실상 '어느 부위를 얼만큼 파느냐',
곧 노동할 때 몸의 성애화를 얼마만큼 요구받는가의 문제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처한 계급이 낮을수록 여성의 몸은, 여성은 더욱 급격하게 성애화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셨어요.
제가 늘 고민하던 주제였는데,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고민이 좀 더 명료해진 기분이 들어 기뻤어요.
그 숭배는 성판매 여성을 '구원의 대상', '동정의 대상'으로 인식할 때 생겨난다는 것.
한편으로 '해방된 여자'에 대한 숭배도 함께 한다는 것, 그리고 이는 페미니스트 숭배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것, 등등.
"성판매 여성에 대한 숭배 없이 문학과 영화는 존재하지 않았어요." 라고 말씀하실 땐 뭔가 마음이 복잡한 한편 통쾌한 기분이 들면서,
알쏭달쏭한 가운데 가슴 속이 확 시원해지는 기분이었어요.
남성들의 성판매 여성을 향한 혐오는 언뜻 그녀들을 곧장 향한 것처럼 보여지지만, 결국엔 자기연민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서는
'가부장제는 남성의 무능을 야기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함으로써 유지되는 체제'라는 제 오랜 생각을 떠올려냈어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합의한 상식'인 이데올로기, 그것을 사회가, 사람들이 수용했을 때,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어떤 대상을 향한 혐오와 숭배, 호와 불호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셨죠.
그리고 어떤 대상을 향한 혐오(+숭배)가 발생하고 그것이 사회적 문제로 기능할 때,
이것을 운동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고민하고 대응하느냐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셨어요.
첫번째는, 혐오/숭배, 호/불호의 현상 이전의 기본 담론을 건드리는 것. 그런데 이는 근본적인 만큼 어렵고 위험하단 것.
두번째는, 일단 혐오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처하는 것. 그런데 이에 너무 집중하게 되면 다른 타자화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
운동이란 것은 결국 이 두 사이를 위태롭게 넘나들며 조율의 자리,
가장 효과적으로 정확하게 문제적 대상/현상을 타격하느냐의 문제일 텐데, 어떻게 첫번째의 방법을 전략적으로 구성하고 실천할지,
어떻게 두번째의 방법을 타자화와 자가당착의 함정에서 비껴가며 운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겠다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결정한다는 것.
여기서 '나'를 초월적 주체로 상정하고 타자들을 어떤 '이름'으로 규정하느냐의 문제.
성판매 여성과 나 사이에 뭐가 그리 차이가 있는가, 넘어서서 그게 '왜' 차이인가, 질문해야 한다는 것.
선생님께서는 "질문에 답하지 말라, 질문에 질문하라."는 말씀으로 강의를 마무리하셨습니다.
제가 성노동 운동을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더 집중해서 듣게 된 점도 있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는 '성판매 여성들이 하는 일은 당연히 노동이다.
그런데 이것을 '성노동'이라고 명명하는 방식으로 기존의 노동 방식과 개념에 포섭되려는 시도에는 반대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예전에 읽었던, 선생님께서 한겨레 토요판에 기고하신 '생존자라는 말도 싫어요 내가 죽다 살아났나요?'라는 글이 생각났어요.
이 글의 마지막에서 선생님께서는 "나는 성 판매가 기존의 노동 범주에 포함되기보다는 노동 개념의 변화를 촉진하는, 새로운 문제제기의 언어가 되기를 바란다. 대다수 민중에게(나에게) 노동과 폭력, 괴로움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진실로 동감했던 기억이 나요. 이것은 저의 오랜 화두이자 고민이기도 하거든요.
폭력의 문제와 노동의 문제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 노동 개념도 인권 개념도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무너지고 재구성되는 가변적 개념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늘 있어 왔고, 그렇다면 내가 '성노동'을 고민할 때 이 담론을 앞으로 어떻게 이끌어가야 할까, '성노동은 노동이다'라는 구호를 넘어 성노동 운동을 하는 주체들이 말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고민이 지금도 있지요. '성노동'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는 시간은, 다시금 저의 고민을 찬찬히 차분히 되짚어보는 소중한 시간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