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이룸공부방 기획간담회 두번째 : 재생산X커먼즈 후기 셋, 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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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산과 커먼즈-with 백영경 선생님 간담회 조각후기/현미]

 

이번 간담회에 함께한 백영경 선생님은 페미니스트 문화/의료인류학, 과학기술(사회)학의 관점에서 다양한 연구와 활동을 하시는 분이다. 개인적으로 몇 년간 이러저러한 자리에서 뵈었을 때 학제 간 경계, 연구-활동의 경계를 넘나들며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많이 던져주시고 접합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었다. 또한 다른 이의 문제의식을 잘 끌어내 북돋아주는 모습이 어디에서나 전천후라고 느꼈는데, 그래서 이룸 공부방과의 케미는 어떨지 두근두근한 마음이었다. 결론적으로, 케미는 폭발한 것 같다^^.

선생님께서는 공부방이 사전에 드린 질문지에 따라 ‘조각 생각’들을 풍부하게 풀어주셨고, 그건 마치 색색의 천들을 패치워크하는 예술가의 손놀림 같았다. 우리가 좌충우돌하며 불안하게 붙잡고 있는 질문들이 매우 상식적이고 중요하니 앞으로도 잘 이끌어나가라는 격려가 마음에 오래 남을 것이고, 싹틔우고 싶은 제안이다.

재생산 개념을 설명할 때, 선생님은 싹틔우는 활동에 비유해 재생산의 시간성과 환산불가능한 영역을 지적해주셨다. 농사가 농부의 활동으로 이뤄지지만 그것만은 아니라는 것, 부모가 자식을 키우지만 자식이 알아서 자라는 점도 있는 것, 자식이 부모를 키우는 점도 있다는 지적을 통해 임금이나 어떤 대가로 정확하게 계산되지 않는 인간 활동의 영역이 있고, 관계 그 자체의 생성과 유지가 목표이기에 기존의 ‘생산노동’ 개념에 포괄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거다. 생산과 재생산 공히, 인간의 노동이란 자연을 비가시화하며 착취해온 측면이 있다는 지적도 기억에 남는다. 이를 통해 나는 생산노동에 ‘비추어서’ 재생산노동을 사고하는 학문 담론장의 오래된 습관을 성찰해볼 수 있었다.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한다면서 자본주의적 질문을 던져온 것은 아닐까?

그런데 선생님은 서구의 1970년대 가사노동 임금화 투쟁을 잠시 다루면서, 한 번 끝까지 제대로 환산해보는 시도도 역으로 필요할 수 있다고 했다. 여성의 신체/성에 대한 착취 뿐 아니라 자연과 노예노동, 이주노동에 대한 사회의 착취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시초축적’의 역사다. 따라서 그것들을 함께 문제 삼을 때, 가치를 생산한다는 생산노동이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전유해온 ‘부불과 저평가된’ 영역들이 드러날 수 있고, 재생산에 남성이 기여해온 부분과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이 이야기될 수 있다. 재생산 개념을 통해 오히려 생산 개념을 다시 고민해 볼 수 있었고, 여성의 일로서뿐 아니라 “재생산 자체를 다시 보는 재생산 문제”라는 화두를 만날 수 있었다.

최근엔 재생산 개념을 생식 순간에 가두지 않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성관계-임신-출산-양육 과정이나 (가사노동을 통한)노동자의 재생산 문제로 인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지형에서 나는 재생산이 무엇보다 ‘관계와 상징/사회질서의 재생산’이라는 언급이 인상 깊었다. 단지 먹고 씻고 잔다고 해서 다음날의 노동자로 재생산되지 않는다는 것, 정서적인 위로와 감정적인 충족을 받아야 가능한데, 이 정서적 돌봄에 대한 요구와 필요는 너무나도 ‘케바케’라서 상품화된 서비스나 기술로만 대체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교육, 의료, 주거 같은 사회적 영역에 대한 문제제기로 다가왔고, 간담회가 개최된 시기를 관통하던 조국 논란도 떠올랐다. 물질적 지원, 기회를 확대하거나 공평하게 분배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보는 구도에서 우리가 교육을 통해 생산하고 싶은 사회적 관계가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는다는 고민이 들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어서 “여성의 일이라는 건 성을 직업적으로 판매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항상 누군가를 위로하고 정서적인 충족, [살 만한 세상/내가 괜찮은 인간이라는] 사회질서를 느끼게 하고 확인하게 하는 그 측면이 따라붙는다고 생각”한다고 하셨을 때는 어떤 감탄과 슬픔이 느껴졌다. 미투 운동이 사회 각 영역/조직에서 광범위할 수 있었던 것도 어느 자리에 있는 여성이라도 겪고 느끼는 그 감정노동의 (성)착취적 성격, 남성 중심적 사회질서의 확인/자연화에 대한 저항이라는 진단에는 미투 운동을 남성 사회란 적폐의 시멘트를 뚫고 발아한 “특정한” 씨앗(『미투의 정치학』)이라 평가한 정희진 님의 언급이 겹쳤다. 정희진은 미투 운동에서도 아내폭력 피해 여성, 성판매여성의 피해 경험이 발화되기 힘들었던 것을 한계로 지적했다. 그렇기에 성판매 활동의 감정 착취적 성격,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의 재생산 문제가 더욱 정교화되어 연구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섹스 뿐 아니라 성산업에서 팔리는 ‘유흥’, ‘흥을 돋구는 여성 접객원’의 활동(ex:테이블 노동)에 대한 이룸 활동가의 연구가 더욱 소중해지는 것이었다^^.

여성/자연/생명을 착취하지 않고 다르게 살기 위해서는 뭔가를 쌓고 확장하고 성공하는 삶보다는 “똔똔한 삶”에 대한 재조직이 필요하다는 지적(데이비드 하비도 그래서 ‘단순재생산’이 중요하다고 했다고)에도 여러 고민들을 나누었다. 똔똔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영역’으로서 커먼즈 개념과 운동의 다양함을 소개받았는데, 여전히 ‘커먼즈’ 개념이 전근대적 공동체적 지향으로 나아가기 쉬운 것은 아닌지, 우리의 근대성에 공존하는 전근대성을 어떻게 분석할 것인지 질문들이 나왔다. 선생님도 커먼즈가 사회의 완충지대로 기존 질서를 완전히 망하지 않게 유지시킬 수도 있지만 그걸 발판으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만들 수 있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양가적 의의를 짚어줬다. 어떤 매개와 완충지대를 만들 것인가? 금융자본과의 직접적 연결로 ‘자유로운 파산 불가능한 주체(김주희 선생님의 논의들)’가 되어가는 성판매여성들의 현실에서 ‘공공성’, ‘시민성’이 무엇인지를 재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했고, 이룸 공부방의 활동이 공공영역을 다르게 창출하는 꾸준하고 똔똔한 하나의 모색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