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호]’진보적인 왕언니’를 소개합니다!

 

‘화톡이라는 블로그를 아시나요? 업소 일하는 언니들을 위한 정보 블로그입니다.

업계 늬우스, 사채, 보증 등의 법률 문제에 대한 정보 등 이 쪽 업계에 유용한 정보들이 많은데요,

그 외에도 이 쪽 경험자의 에세이가 올라오고 있어요.

진보적인 왕언니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필자는 이렇게 자기소개를 하시네요.

 오랜 세월 업소 생활을 통해 산전수전공중전 다 겪고 손털고 나왔음.

큰 딸이 살림밑천이라는 소리 젤 싫어함. 완전 까칠함.

지금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며 대한민국 어딘가 살며 학교 다니는 여자.”

왕언니는 업소에서 일하면서 겪은, 그리고 나와서 경험한 일들에 대해 정말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계셔서 공감가는 부분이 많아요.

밑의 QR코드를 찍으시면 화톡 블로그로 바로 들어가실 수 있어요! 

 

별별신문

[18호]금연필패담: 우리는 왜 금연에 실패하는가?




이놈의 담배원래 몸에도 안 좋지만 세금이 오르면서 내 통장에도 안 좋은 물건이 되어버렸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금연을 꼭 실패하는 걸까요?

 



진이언니

술 한 잔 하면 피게 되고, 할 말 없으면 피게 되고, 주변에서 많이들 피고, 스트레스 받으면 피게 되고.. 그래서 나는 한 번도 끊을 생각을 안 했어.

 

복경언니

일을 하면 필 수 밖에 없지. 주변에서 다 펴대는데. 나는 일 쉬고 고양이 키우느라 끊었어. 고양이한테도 간접흡연이 안 좋다더라고. 일하면서는 안 필 수가 없어. 그리고 손님들 담배 많이 펴. 담배 피는 손님 그 냄새 맡으며 괴로워하느니 같이 피는 게 낫지.

 

민지언니

밥 먹고 나서 이럴 때보다도 혼자 있을 때. 갑자기 외로움도 아니고 가슴이 훵하니뭐라고 말 못하겠는. 이럴 때 아, 담배하나 피고 싶다 꽂히면 무조건 펴야 해. 가게에서는 손님 있어도 스트레스, 없어도 스트레스. 하루에 돈 몇 만 원 벌어서 담배만 사는 거예요. 인간관계 때문에 피우는 건 어릴 때 얘기고, 사십대 지나 오십대 다가오니 돈 스트레스 받지. 가계부 적으면서 수입보다 지출이 많을 때 꼭 담배 한가치 펴요.

 

현정언니

담배 끊으려고 해본 적? 난 없어!! 아는 언니가 전자담배 피면 담배 생각 안 난다길래 사서 한동안 폈었는데 다시 돌아갔어. 심심할 때 펴. 눈뜨자마자 피고, 밥 먹고 나면 피고, 아침에 잠 깨려고 피고. 습관이지 뭐. 못 피면 아픈 것 같애. 스트레스 오잖아. 막 조급해져. 피고 싶다는 조급증. 담배는 주변에서 피면 백퍼 피게 돼있는 것 같아.

 

정아언니

내가 지하에 일했고 지상에서도 일했잖아. 지상에선 좀 안 피게 되는데 지하에선 손님 없으면 계속 피는 거야. 바깥이 보이냐 안보이냐의 차이지. 지금 일하는 데는 잘 안 보이고 들어가 있는 가게이다 보니까 계속 피는 거야가슴이 훵하니뭐라고 말 못하겠는. 이럴 때 꽂히면 무조건 펴야 해. 가게에선 손님 있어도 스트레스, 없어도 스트레스. 하루에 돈 몇 만원 벌어서 담배만 사는 거에요. 인간관계 때문에 피우는 건 어릴 때 얘기고, 사십 대 지나 오십 대 다가오니 돈 스트레스 받지. 가계부 적으면서 수입보다 지출이 많을 때 꼭 담배 한 까치 펴요.

 

현정언니

담배 끊으려고 해본 적? 난 없어!! 심심할 때 펴. 눈뜨자마자 피고, 밥 먹고 나면 피고, 아침에 잠 깨려고 피고. 습관이지 뭐. 못 피면 아픈 것 같애. 스트레스 오잖아. 막 조급해져. 피고 싶다는 조급증. 담배는 주변에서 피면 백퍼 피게 돼있는 것 같아.

 

정아언니

내가 지하에 일했고 지상에서도 일했잖아. 지상에선 좀 안 피게 되는데 지하에선 손님 없으면 계속 피는 거야. 바깥이 보이냐 안보이냐의 차이지.                                                                         

 

별별신문

[10호]우리도 노동자이다

 



 


 


 


 


 


우리도 노동자이다


 


 


 


 



성노동과 성폭력의 경계로부터


 


 


성폭력 피해자가 판사로부터 학벌과 노래방 도우미라는 직업을 지적당하는 2차 피해로 인해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노래방을 다니는 사람이면 강간


 


을 당했어도 유혹한게 되는가 라는 유서의 내용이 기사화되긴 했지만, 수사과정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빈번히 일어나는 작금의 부끄러운 현실이다.


 


또한 키스방에서 일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상황들은 배제된 채 굴욕적인 수사를 겪었고 자살 시도를 두 번 하게 되었다. 성폭력 그 자체보다도 도리어


 


무고한 것은 아닌지 취조당하는 분위기에 주눅 들고 공황 상태로 제대로 진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의 심리 상태에 대한 고려나 배려 없이 진술이


 


막히면 윽박지름을 당했다. 성폭력 피해 내용이 얼굴 드러내놓고 남성 형사들 틈에서 까발려지고 덤으로 대질신문이랍시고 가해자랑 닿을 듯한 옆자리


 


에서 말을 섞으면서 조사 받았다. 그런데 나는 그 끔찍했던 고통 이전에 성서비스 노동자성에 대하여 더 절실히 밝히고 싶다. 성노동자들이 처한 장시


 


간 노동과 건강권을 담보하면서 획득하는 수입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 고민해보고 판단했으면 한다. 떠올리고 싶지 않을뿐더러 아픈 과거이지만 용기


 


내어서 반추해보고자 한다.


 


 


 


 


감정 노동, 육체노동을 동반한 성서비스


 


 


내가 처음 성서비스에 종사하게 된 것은 수능시험 직후였고, 고교 시절 겪었던 충격적인 일들로 일종의 도피처와 독립 자금이 필요했다. 다방 업주는


 


내가 미성년자인걸 인식하고도 고용관계를 맺었다. 이른 오전 출근하여 계단과 홀 청소를 시작으로 일과는 작되었고 일일 수십 잔의 커피와 차를 마시


 


며 속이 울렁거리고 쓰렸다. 저녁때부터는 술접대도 하면서 매상 압박을 받았고 온갖 종류의 불쾌한 스킨쉽을 겪었다. 현기증과 구토 증세로 고생하면


 


12시간 넘게 일한 그 다방에서 나는 월급 십원도 받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유인즉 짧게 일하고 그만두기 때문에 구인 광고비를 다시 지불해야 하니 월급에서 제하겠다고 했다. 노동부에 호소해봤자 다방 종업원을 홀대할 것


 


이 뻔했고 체불 임금을 해결하려면 나부터가 다방 종사자임을 밝혀야 하는데 그럴 용기도 없었다.


 


가정폭력을 피하고자 선택한곳이 다방이었는데 첫 직장에서 임금을 떼이니 너무 서러워서 울고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로터리TV를 유일한 낙으로 여기며 저녁에는 룸살롱으로 출근했다. 당시 나는 실명을 사용하였는데 마담은 내 딸도 **인데 불쾌하니까 너 다른 이름


 


써야지, “부모님이 주신 성스러운 이름으로 이런 일 하는거 아니다라면서 핀잔을 주었다.


 


영업 부장은 종업원들이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는 무식한 애들이라고 모욕하면서 성상납을 관행이자 의무라면서 모텔로 한명씩 데려갔다. 신입이 올


 


때마다 모텔로 끌고가는 그 작태가 경멸스러웠지만 따르지 않으면 일을 배정해주지 않았다.


 


룸은 출퇴근이 비교적 자유롭긴 하지만 지각비라는 명목을 부과하며 실상은 출근을 강제하고 있었고, 2차를 거부하면 아예 룸에 넣어주지를 않아서 1


 


TC만으로는 하루 평균 한테이블밖에 일을 못했다. 원래는 출근 순서대로 테이블을 배정해주기 마련인데 1차만 하겠다고 선언한 노동자들에게는


 


손님들이 2차까지 염두해서 왔다가 못 간다고 하면 불쾌해 할것이란 이유로 뒤로 밀려지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하루에 일을 한건도 하지 못해서 차비


 


와 시간만 낭비할때도 발생하게 되거나 진상 처리반이 되었다. 나의 경우는 고시원이 아닌 보증금 마련하여 독립하는것이 목표였던만큼 한푼이라도 모


 


으려고 미용실도 안가고 옷구입도 최소한으로 아꼈는데 나에 대한 투자를 덜하니까 수입도 비례적으로 감소하였다.


 


손님 비위를 조금이라도 거슬리거나 꼬투리 잡혀서 몇십 분내로 퇴장당하면 TC비도 받지 못한다. 다른데서 거나하게 취해서 룸으로 오는 손님들은 진


 


상인 경우들도 많아서 신고식이라고 옷을 벗게 명령해서 수치심을 주기도 했다. 이 일을 한다고 해서, 이런 수위의 추행까지 당연한 일의 범주로 보아


 


야 하는건지 회의감과 자괴감이 심했다. 유흥업소 노동조합의 결성과 서비스 직종의 연대가 절실했다.


 


일부 언론에서 소위 업소 여성들이 명품이나 부대비용으로 빚을 지는 이유를 단지 낭비벽으로 몰아부칠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TC2차비도


 


당일 지급이 아닌 다음날인데 간혹 마담이 갑자기 그만두면서 떼먹기도 하고, 아는 언니는 손님하고 개별적으로 만났는데 2차비를 떼이고 깨진 소주병


 


으로 위협을 당했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자신의 성매매가 불법이어서 차마 신고는 하지 못한다고 2차 성매매때 변태스러운 관계를 요구하거나 폭력을


 


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성매매 비용까지 법인 카드로 결재하면서 접대비 명목 절세 혜택을 받는데 어이가 없었다. 업소에서는 손님이 없는 시간


 


대에는 성노동자들에게 탈세를 위한 영수증 조작을 시키면서 부려댔다. 회사라면 마땅히 이런 시간들도 근로시간으로 확보가 되겠지만 업소는 대기시


 


간은 철저히 무시되고 보전 받지 못한다.


 


 


 


 


성노동자들의 연대로 단결권 행사를


 


 


나를 성폭행 하고도 성매매였다고 주장하는 업주가 운영하는 키스방은 룸보다 더하였다.


 


경찰 단속에 대비하여 매니저들(키스방 종사자들)로 하여금 일방적인 각서를 쓰게 하고 주민등록증을 확인해서 주소까지 확보해두었다. 일할 때의 복


 


장은 교복풍으로 정해져있으며 스타킹은 반드시 착용해야 하고 업주는 유사성행위를 부추겼다.


 


키스방은 여타의 폭력 상황 노출과 위험도, 건강권을 담보한 성서비스보다도 고도의 정신적 노동까지 요구되었다. 손님들이 주점을 거쳐서 마지막 코


 


스로 성관계를 목적으로 오는 곳이었다. 성노동자들에게도 노동자성이 명확히 인정되고 4대보험 가입권도 생긴다면 산재율은 타업종보다도 훨씬 높게


 


책정될 것 같다. 사건사고율은 막연한 추측보다 훨씬 많을것이고 특히 성산업 관련하여 신고되지 않은 성폭력 사례는 평균 신고율보다 저조하리라고


 


예상한다. 합법적인 일이 아니다보니 중간에서 앓선비로 착복해가는 비율이 크더라도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다. 이런 착취의 실태와 성매매를 강요하


 


는 업주의 행태를 고소하였다. 하지만 업주는 치밀하게도 적절한 CCTV설치로 수색을 교모하게 피할수 있었다.


 


성폭력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억울함도 컸지만 이대로 묵과한다면 업주의 성폭력이 누군가에게도 미칠것 같아서 고심끝에 고소를 하였지만 힘든 여정이


 


었다. 원스톱 지원센터의 존재를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고 신뢰관계인 동석도 가능하다는걸 미처 몰랐다. 법정에서까지 2차 피해가 노골적으로 일어나


 


는데 비공개적인 경찰서에서의 수사과정은 더욱 심할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성노동자의 위치에 처하게 된 사회 구조적인 문제는 무시된 채 개


 


인의 윤리성으로 치부해버리는것에 허탈함을 느낀다.


 


성폭력 생존자가 아닌 키스방 씩이나 일하러 가놓고 업주를 고소하는 비양심적인 사람 취급 받는게 너무 억울하였다. 성노동자들에게 성폭력 신고가


 


돈때문일거라는 막연한 낙인부터 전제해버리면 호소할데가 없어진다. 설사 어렵게 인정받는다고 하여도 보호법익이 적다는 등으로 가해자에게 형량이


 


감경되는 요인이 되어서도 안된다. 오히려 성노동자들이 처한 불리한 상황을 이용하여 협박하는 것은 가중 요인이 아닐까 싶다. 성폭력 피해를 겪고도


 


이중의 고통으로 힘든 시기를 마주하고 있는 성노동자들에게 적극적으로 기관에서 도움 받을 것을 권해본다. 나는 그 일을 겪고 2년이나 지난 시점에


 


서 약물과 심리 치료를 시작하였지만 홀로 감당하기에는 성노동자로서의 사회적 위치는 너무도 취약하고 저조하다. 성노동자도 기본권의 주체라는 당


 


연한 명제를 이 사회는 부정하고 있는것 같다.


 


사회적 소수자들이 편견과 굴욕을 견디고 투쟁하여 권리를 쟁취해왔듯이 성노동자들도 헌법상 보장된 노동3권을 당연한 기본권으로 누릴 수 있는때가


 


오리라고 확신한다.


 


 


 


이번호 ‘인생보따리에는 해방님이 글을  써주셨습니다

별별신문

[9호]To. 성매매여성 지원단체

 

별별신문이 야심차게 준비한 휴가비를 쏜다! 쏜다! 쏜다! 에 접수 된 유일한 원고는 평소 성매매 여성을 지원하는 단체에 대해 의심과 기대를 갖고 계신 이레님의 편지글입니다. 업소 일을 하면서 느끼는 마음과 성매매여성지원단체가 어떤 태도로 여성들을 만나야 하는지 새겨들을 말들이 많네요

 


 


 

 

To. 성매매여성 지원단체


 


 


그냥 한번 발을 들이면 자의든 타의든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는또는 나왔다 하더라도 다시금 되돌아가고 하는 반복적인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과 같은 자연적 순리라 한번쯤.. 그리 여기지는 않으셨는지그런 솔직한 질문을 본인들에게 한번쯤은 해보셨는지도움 받는 입장에 놓인 이들에겐 도움 주는 이들의 진정성에 가장 크게 작동되기에 늘 의심스럽거든요. 저처럼.. 성매매 여성들은 각종 피해들을 많이 당하지요. 그래서 호의라는 단어와 멀어지게 될 수밖에 없어요.. 무조건적인 호의를 베푼 사람 중에 나를 이용하지 않은 이가 없었기에.. 저희가 사는 세상의 호의란 그런 것이거든요. 근데 여성단체나 반성매매 단체 언니들이던 유흥업소 종사자들이 최소한의 피해라도 줄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려 한다는 호의를 이해할 수가 없는 거예요.. 단체 언니들 여럿 만나봤지만 결국엔요 저희가 느낀 감정은 그런거였어요. 같은 여자로서 더 이상 남자들의 성적 유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쉼터에서 자활 훈련을 통해 탈성매매 여성으로서 당당히 살아가도록 돕겠다취지가 그거더라구요저희가 도와달란 것도 아닌데 콘돔이나 사탕들구 찾아와서 자발적 의사로 왔어도 피해자는 여성이다. 같이 손잡고 악순환을 끊어내자고 하는데. 그건 호의도 아니구요.. 저희가 원하는 것도 아니기에 업소에 찾아오는 단체언니들 말엔 그 누구도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 거예요아가씨들 마음속에 뭐야같은 여자로서 우리가 몸 팔아 돈버는게 창피하다는 거잖아 결론은.. .. 재섭어..’ 이렇게들 얘기하게 된다구요


 


우리 언니들 참 사연들 가지각각이지요개중엔 명품이나 황새따라가려다 가랑이 찢어진 언니들두 물론 너무 많지요그래도 그 마음속은 다 비슷하답니다^0^


겉보기엔 걸걸하고 깡패처럼 싸늘한 시선으로 늘 공격 태세로 경계하잖아요자신을 감추고 최대한 웅크린 상태에서 늘 사방에 적을 살피는 사파리의 맹수들과 똑같이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생채기 받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라고 여겨주심 될 듯.. 나와 가장 가까운 옆사람과 늘 보이지 않는 경쟁 속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남들 눈엔 절친, 내 마음엔 칼날보다도 날카로운 비수인 동료라는게.. 얼마나 슬픈 현실인지 그 삶 대신 살아보지 않는 한 절대 모를 거예요.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다 보니 마음이 얼어붙은게 아니라 강철로 단단하게


굳어버린 거예요..


 


 


 


내가 베푼 건 친절이었으나 되돌아 오는 건 배신 뿐인 화류계그 울타리 안에 갇힌 언니들 마음속에는 매일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하며 가슴에 메아리가 울린다는 걸 그 되돌아 오는 메아리에 술이 술을 부르는 거지요일하면서 먹는 술.. 일 끝나고 내 한풀이 용 술..


집창촌에 어떤 언니들(저 포함) 포주 몰래 종이컵에 커피처럼 술을 마셔야 영업이 더 잘되요.. 이유는.. 아시리라우리는 평범하다는 기준을 잘 모르겠어요. 담배피고 여잔데 몸에 그림 있고 몸파니까 평범하지 않은 줄 알았는데 다 청산하고 살아보려는데도 글렀대요.


 


전혀 평범하지 않대요.. 그럼 좌절하고. 그냥 본래의 나로 되돌아 가고 싶을 뿐이예요이리사나 저리사나 알아주는 이 없고 욕도 똑같이 먹잖아요그래서 포기가 참 빠르기도 해요. 포기가 빠르다고 내일을 꿈꾸며 살지 않는다는 건 아니에요… ‘언젠가는.. 나도 언젠가는 빚 다 갚고 나가야지돈도 조금 벌어서 꼭 나가야지.. 나갈 거야.. 그런 날이 온다면.. 근데 정말 내게도 그런 날 올까…? 나 처음 이 일 시작할 때 딱 1년만 고생하고 돈 모아 손털고 작은 가게 하나 장만해 그리 살려 했는데.. 저 언니처럼 서른 넘어 이일 하는 일 없을 거야


했었는데나 지금 그때 그 언니보다 더 나이 들어 버렸네.. 그래도 꼭 나가고 싶다. 여기서 나가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야지언젠가는오겠지.. 올 거야..’ 이렇게 막연히 내일을 그려요.


 


정말 힘들때요 난 위로가 되고픈데 상대방은 혼자 있고 싶어이런 말 가끔 자주들 하잖아요.. 겪어보니까 알 것 같아요돌이킬 수 없는 상처는요 위로의 말 그런거 소용없더라고요.. 귀에 솔직히 안 들어오더라구요여튼요.. 사람 눈이요.. 사람 눈은 절대 거짓말을 못 하는 것 같아요.. 누군가를 꼭 도와주고 싶은데 상대방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냥 눈으로 말하세요.. 스치듯 짧고 간결하게요. 그럼 언젠가는 그 쪽에서 사소한 말이라도 먼저 건넬지도 몰라요.. 속는 셈 치고 해보세요~


From. 이레


 

별별신문

[5호]“7년”의 편지


이 기사는 주희(가명)님께서 기고하신 글입니다.


 



그 광고지 몇 장들..



저는 아이들을 유학을 보내놓고 많은 외로움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여동생이 알려준 중국 연락 전화번호를 위안삼아 하루에도 몇 번씩 다이얼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쉽게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며칠에 한 번씩 이따금씩 연결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눈물이 흘러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습니다. 미안함과 그리움과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 경제적 어려움으로 보내긴 했지만 그 역시 해답은 아닌 듯 했습니다. 아이들이 없는 공간 그 역시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손을 놓고만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적지 않은 월세와 하루하루 일수를 찍고 있었습니다. 일수를 며칠만 밀려도 초인종 소리에 민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날을 꼼짝없이 방에 숨어있었는데 한 시간 가량 초인종을 눌러댄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불안하게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던 중 고지서 한 장이 날아왔습니다.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벌금 이백만원을 납부하라는 거였습니다. 청천벽력같은 얘기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광고지 몇 장을 뽑아 가지고 와서 열심히 탐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큰 박스 광고란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쯤 지났는데 제 눈을 사로잡는 글귀가 들어왔습니다. 선불가능숙식제공 이라는 문구와 연락처가 있었습니다.


 


배달하고, 일수찍고, 예쁜 옷도 사 입고



저는 숨도 쉬지 않고 다이얼을 돌렸습니다. 경기도 모 지역에서 일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무조건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분은 저의 집 근처로 오시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분과 저의 집에서 식사를 한 뒤 경기도로 떠났습니다. 가게는 지하이고 꽤 넓었습니다. 벽이 돌로 되어있어 참 시원했습니다. 깨끗했고 주인 언니의 인상은 서글서글하고 손님한텐 참 예의바르게 행동했습니다. 다방을 처음 운영한다 했습니다. 선불금은 몇일 있다 준다기에 그러자고 하고 지하에 있는 숙소로 갔습니다. 숙소에는 20대 초반의 아가씨가 짐을 싸고 있었습니다. 짐이 꽤 많았습니다. 가방으로 5개쯤 되는 것 같았습니다. 보아하니 이 아가씨도 저하고 함께 온 삼촌이 데리고 온 것 같았습니다. 삼촌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주인 언니의 험담도 빼놓지 않고. 저는 이튿날부터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숙소가 지하인데다 모기가 많아 잠을 설쳤더니 몸이 무겁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침 8시부터 가게의 전화벨은 쉼 없이 울려댔습니다. 군청 앞에 위치한 탓인지 배달도 많고 손님들도 점잖았습니다. 아침 8시가 되면 주인아저씨가 카맨으로 등장을 하십니다. 저는 주인아저씨하고 배달을 다니다 아침 11시쯤이 되면 주인언니하고 배달을 다녔습니다. 주로 저 혼자 일을 해야 했습니다. 보자기는 주방이모가 쌓아놓고 비교적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가게였습니다. 오후에는 입금제로 일하고 있는 언니 한분이 출근을 하십니다. 이 언니는 서울에서 왔다했습니다. 이곳이 고향처럼 좋다고 했습니다. 평생 이곳에서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나이는 저보다 두세살 위인 것 같은데 키가 작아 동안으로 보였습니다. 이 언니는 주로 커피말고 냉커피냉 위주로 배달을 갔습니다. 주인 언니와 배달을 가면 먼 곳으로 가는지 한참 있다 오곤 했습니다. 베테랑이라 요령껏 일도 잘 했습니다. 그에 비해 저는 초짜라 재미있기도 하구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수입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예쁜 옷도 사입을 수 있고 밀린 일수도 찍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서울에서의 생활도 모두 잊어버리고 이곳이 좋아졌습니다. 오전과 오후에는 주로 배달을 가고 짬짬이 티켓을 나가고 저녁 8시부터 새벽 2-3시까지는 노래방에서 일을 했습니다. 힘들지만 수입이 생기니 재미있었습니다.


 



 


보면 볼수록, 진한 사랑애가 붙어나는



저는 그러는 사이 가깝게 지내는 오빠가 생겼습니다. 고물상을 운영하는 분이었는데 그냥 이유 없이 좋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랑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 오빠가 저의 힘든 타지 생활을 지탱하게 해준 힘을 줬던 것 같습니다. 이 오빠는 손님과 많이 달랐습니다. 참 편했습니다. 제게 돈이 없어도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오빠였습니다. 휴일이면 개울가에 가서 물장구를 치고 놀았습니다. 무엇보다 운전하는 모습에 반했던 것 같습니다. 돈은 없지만 소탈하고 꾸밈없는 착한 심성이 저를 매료시켰던 것 같습니다. 매일 봐도 지겹지 않았고 보면 볼수록 더 진한 사랑애가 붙어나는 기분 아마도 모를 겁니다. 그 오빠는 재혼이었고 자녀가 4명이나 있었습니다. 여느 남자같으면 가정이 우선이었겠지만 이 오빠는 제가 우선인 듯 했습니다. 저를 만나면 행복해했고 편안해했습니다. 저 또한 편의를 주고자 티켓비를 물지 않는 퇴근 후에 만나 밀애를 즐겼습니다. 제가 힘들어하고 푸념을 늘어놓으면 다 들어주고 말없이 웃고만 있습니다. 저는 이런 그가 좋았고 저희들의 관계는 몇 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아침 8시가 되면 배달이 시작되고 첫 거래처는 문구점이었습니다. 이 거래처는 하루도 빠짐없이 커피 3잔을 시키고 한 잔은 저를 마시라고 배려를 해주십니다. 기분이 좋으면 수첩이나 볼펜 같은 것을 선물로도 주시고요. 하지만 이 손님의 마음잡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중후한 50대 후반의 재력도 있고, 아무튼 참 외로운 분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배달이 들어오면 늘 긴장됐습니다. 커피를 타는 사이 손이라도 만져주면 심장이 멎은 듯 행복했습니다. 문구점은 부인이 운영하고 계셨고 이 분은 군청 근처에서 사무실을 운영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분에 대한 내 감정은 시들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저는 커피 3잔을 쌓아가지고 계단을 올라 그의 사무실로 갔습니다. 하지만 그분 밖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점점 불안해진 저는 침착하게 커피를 탔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커튼을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안경을 벗더니 저를 안으려고 했습니다. 저는 안 되겠다 싶어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무척 바뻤습니다. 그 이후론 그 거래처에서는 커피를 주문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저는 티켓다방의 시작을 아무 의심 없이 돈만 벌면 된다는 생각만 갖고 7년간 계속했습니다. 남은 건 상처뿐. 가족에게도 돌아갈 수 없는 현실. 암담한 미래. 잠자면 잊혀지겠지 하고 잠만 자면서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별별신문

[4호]독자기고글

  이 글은 현정(가명)님께서 기고하신 글입니다

돈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여차저차해서 생긴 빚들에 치이고 있었고, ‘선불금’이라는 존재를 알았을 때는 조마조마하면서도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로 생각될 지경이었다.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천 언니집에 얹혀 살기 시작한 이틀째부터 인터넷을 검색했다. 쏟아지는 방대한 정보량에 놀랐는데, 모두들 한결같이 가족 같은 분위기에 아가씨 편의를 봐준다고 친절히 설명이 되어 있었다.

별로 예쁘고 날씬하지 않은 20대 후반이라는 내 주제를 알기에 —;; 언감생심 강남 쪽은 클릭도 하지 않고 강북만 둘러보고 대략 시청 쪽에 있는 룸으로 낙점했다. 유리방, 3, 방석집 이런 거 저런 것도 몰랐던 나는, 고작해야 술집에서 옆에 앉아 기분 맞춰 주는 일을 할 뿐인데도, 준다는 선불금이 얼마나 될까 고민하며 ◯부장이라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이가 몇살인지만 물어보고 가게로 와보라고 해서 화장이랍시고 이것저것 좀 찍어 바른 다음에 익숙하지도 않은 길을 물어물어 찾아갔다.통화가 끝나고 나서부터 계속 마음이 조마조마한 것은 왜였는지도 모르겠다.

암튼 인터넷 사이트 소개사진에는 가게가 샤방샤방해 보였
는데
, 완전 싸구려 재질과 조악한 디자인의 가게를 마주하고서야 내가 진짜 ‘유흥업소’라는 곳에 들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저 돈이 필요해서 여기까지 온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인지 ◯부장과 함께 룸에서 면접 비스무리한 것을 보면서도 자꾸 위축이 됐다. 내가 예쁘지 않으니까, 내가 어리지 않으니까 그냥 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이 끊이지 않았는데 오늘부터 일을 할 수 있으면 하라고 하는 ◯부장의 말이 그저 고맙기만 했다.

신기하게도 이름도 묻지 않았다.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있어서 이름을 물어보면 본명을 얘기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도 잠깐 했었는데, 일을 하는데 어떤 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것이 희한하기만 했다. 선불금은 친구보증이 있어야만 해준다는 말에 며칠 일해보고 받자 라는 생각에 그러자고 했다.

 

 

저녁 7시쯤 면접을 보고 문 열 때까지 쉬라면서 대기실로 데려다줬다. 벽에 걸려있는 홀복, 굴러다니는 굽 높은 구두, 가게에서 쓰는 물건들이 쌓여있었고, 지저분하긴 해도 꽤 넓은 곳이었다. 어색하고 뻘쭘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 앉아 있긴 했는데, 도무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초조한 마음이었다. 조금 있다 여자 한 명이 들어왔다. 예쁘지는 않아도 제법 귀엽고 매력적인 얼굴이다. 일 시작한지 일주일이 안 되었다며, 여자는 자기 이름을 말하고(룸에서 쓰는 가명이 분명한) 뉴질랜드에서 공부하다가 한국 들어와서 알바하는 거라는,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 그러냐고 대꾸했지만 나는 정말 그 여자가 뉴질랜드에서 공부를 했는지 어쨌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고 지금까지도 진짜였다고 믿지도 않는다. 가게 문을 여는 8시가 다가오자 다시 4~5명의 17~19살로 보이는 여자들이 대기실로 우르르 들어왔다. 다들 친구사이 같아 보였고 소위 ‘까졌다’고 부르는 10대 여자애들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화장을 하며 수다를 떨다가 이들은 이내 밖에 나가서 가게홍보 전단을 뿌린다고 ◯부장과 함께 나갔다. 나는 오늘 처음이라서 제외인가 보다. 얼굴 까고 밖에서 저런 일까지 해야 한다니 걱정이다. 내가 거부할 수는 있는 건가.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그리고 대기실에 모인 여자들은 다들 나보다 어리고 예뻤다. 자신감이 점점점 없어졌다. 전단지 돌린 애들이 들어오고 대기실에 있는데, 누군가 대기실에 찾아왔다. 홀복을 파는 방문판매원이였다. 벽에 걸려있는 홀복은 주인이 있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었는데 그 중에서 골라 입거나 새것을 사라고 했다. 벽에 걸려있는 주인 없는 홀복은 너무 노출이 많고 더럽기도 해서 새 홀복 하나를 골랐다.(이놈의 신상욕심!) 현금이 없었는데 오늘 계산에서 뺄 수 있다는 친절한 말에 욕심을 부렸다. 화장을 고치고 홀복을 입고 앉아있으니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가게는 순번과 지명이 결합된 형태였는데 출근한 순서대로 순번이 매겨지고 테이블에서 필요한 여성 수에 한 두 명이 더 가서 지명을 받는 방식이었다.

내가 초짜라 그런지 첫 손님이 들어올 때는 날 제외했다. 다음 손님은 단체손님으로 8명 정도가 들어왔다. 지명이랄 것도 없이 나를 포함한 모든 아가씨가 들어갔는데 번듯한 옷차림들을 한 직장인 같아 보였다. 내 코가 예쁘다는 말을 하길래 그래도 ‘못난 얼굴은 아닌가보다’라는 마음에 안심이 되었다. 담배를 가져오라고 해서 룸 밖으로 나와 카운터에서 담배를 사서 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웨이터가 나를 가로막았다. ‘담배 저 주세요. 안 들어와도 된대요.’ ! 진짜 초라하고 비참한 기분이었다. 내가 별로라는데 뭘 어쩌겠냐 싶지만, 오늘 산 홀복값이며 돈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데 이게 뭔가 싶어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12시를 넘기자 초조함에 바닥까지 갔는데 죽으란 법은 없나 보다. 또 단체손님이 왔고 다행히도 두 시간을 끊었다. 오늘 공은 안쳤다는 안도감에 음치라고 소문난 내가 노래까지 하나 불렀다. 직장에서 왔음직한 단체 손님 중 부장이라는 사람은 난리가 났다. 10대로 보였던 아가씨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고 ‘가슴이 수박’이라면서 실실거리고 자꾸 껴안고 치마 속으로 손을 넣으려고 한다. 시선을 돌리고 10년 동안 안 피웠던 담배도 꺼내 물었다. 내 옆에 앉았던 남자는 참 점잖은 사람이었다. 내 몸을 전혀 만지지도 않았고 이름이 뭔지, 왜 이 일을 하는지 물어봤다. 내가 했던 질문의 답은 지금 생각나지 않는다. 이름은 그냥 둘러댔다.

신고식이라는 것도 없고 질펀하게 주물러보려는 진상도 없던, 그런 하루가 끝나고 카운터 언니한테 내가 받은 돈은 홀복비 4만원을 제하고 4만원 남짓이었던 것 같다.

신촌에 있는 친구집에서 자기로 했기에 신촌까지 택시를 타고 갔는데 친구집에 도저히 못 가겠다는 생각이 들어 근처 찜질방으로 들어갔다. 몸을 씻고 수면방에 누웠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 그날 택시비와 찜질방비를 제외하고 26,000정도를  손에 쥐고서 하루를 곱씹어보자니 나는 정말이지 다른 세계에서 이동한 것 같았다.

벌써 10년이 다되어가는, 내가 처음 일을 시작한 하루는 그렇게 새벽 다섯 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별별신문

[1호]인연의 틈새에서






 


2008년, 그녀는 결혼을 한다고 청첩장을 보내왔다. 청첩장을 받아들고‘내가 가도 될까, 그녀는 나를 남편에게 뭐라고 소개할까, 나를 소개할 때
그녀는 남편 앞에서 당황하지 않을까’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녀의 새로운 삶에 축복을 해주고 싶었지만 내가 그녀의 과거를 들춰내는
존재이지 않을까란 생각으로 혼란스러웠다. 난 왜 이렇게 그녀의 과거가 걱정이 되었을까.


 


 


그녀와의 인연


2005년, 그녀가 A집결지에서 아가씨로 일하고 있을 때 우린 처음 만났다. 난 일주일에 한번씩 A집결지를 돌아다니며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들을 지원하는 일을 했었다. 빨간불빛이 새어나오는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나와 그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
는 듯 했다. 난 항상 그 유리문을 두드렸지만, 그녀는 내게 냉랭했고 무섭게 유리문을 닫아버렸다. 눈을 마주하지 않았고, 왜 왔
냐고 퉁명스럽게 귀찮은 듯, 일하는데 방해된다고 밀쳐냈다. “절대로 너에게 마음을 열지 않을 거야! 니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
아? 무엇을 해 줄 수 있겠어?”라는 모진 눈빛을 받으면서도 내가 할 수 일이라곤 매주 같은 시간 가게에 들러 멋쩍은 인사를 건네
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초조한 목소리로 일하는 중에 임신이 되어 수술을 하러 가야하는데 같이 가 줄 수 있냐는 전화를 해 왔
다. 수술을 마치고 마취에 취해 잠들어 있는 그녀를 보면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일을 시작하여 사람들 틈에서 악착같이 살아
남아야 했던 그녀의 시간들을 상상해 보았다.‘ 돈을 벌어 힘든 가정을 돌보면서 부모 대신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그녀의 무거운
짐들이 얼마나 버거웠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난, 그녀의 삶 앞에 마주하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조금씩 내가 들어갈 틈을 내어주고 있었다.


 


다른 방식의 삶, 그 길목에서 다르게 만나기


2011년 어느 날, 자식 둘을 낳아서 엄마의 역할로 바쁜 그녀는, 불쑥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그녀의 결혼 후에 우린 서로의 삶
을 사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주 가끔씩은 ‘결혼 생활은 잘 하고 있을까, 남편은 잘해 줄까, 남편은 때리지는 않을까, 시댁에서는
잘 해줄까’라는 궁금증이 일었다. 전에도 A집결지에서 만나 친하게 지낸 여성들 중에 결혼한 여성들은 몇몇 있었다. 잘 지내고 있는지 재잘재잘 수다를 떨고 안부를 묻고 싶은 마음과 함께 한 켠에는 조심스러움과 걱정이 있다. ‘나만 궁금한 게 아닐까?
그녀들도 나를 반가워해줄까? 아님 나라는 존재는 그녀들에게 있어‘과거를 들춰내는 사람’으로서 단지 잊고 싶은 존재일까?’
복잡한 마음이 교차했다. 나는 그녀의 삶을 지지하고 싶고, 나 역시 그녀를 통해 지지 받으면서 삶을 살아가는 친구이고 싶다. 누
구나 험하고 외로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때가 있지 않은가.
떨리는 마음으로 우린 다시 만났다. 그녀의 아기를 보면서 이제는 나와 그녀 둘만의 관계를 넘어 그녀의 아기들까지 관계가 확장
이 되는 것 같아서 흐뭇했다. 과거 우리의 대화는 이모, 삼촌, 가게 아가씨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뤘지만 현재 우리의 대화의 주
제는 다양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내가 하고 있는 심리상담, 우리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 결혼, 남자, 살림과 육아, 부모님과 가족관계
에서 겪는 일상적인 일들… 일상의 소소한 꺼리들이 우리들의 수다 주제였다. 그녀는 편안해보였다.‘ 남편의일이잘될까, 아이
들은 어떻게 교육시킬까’하는 등의 일상의 걱정들은 눈앞에 있지만 그 일상이 살아가게 하는 힘인 것처럼 느껴졌다. 앞으로도
그녀와 나는 인생의 고된 숙제들을 앞에 두고 끙끙대며 어떻게 해야 할지 발을 동동 구를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이렇게
만나서 서로의 삶을 나누고 힘을 주고, 인생의 숙제를 하나씩 하나씩 해 나가면 되지 않을까? 인생을 살아가는데 든든한 친구
하나를 얻었는데 뭐가 걱정일까?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삶 속으로 더 깊이 들어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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