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몹시] 노년성판매경험여성을 만나자 – 구술생애사 논문들과 <15소녀표류기>(최현숙)

1.

지난 4월 몹시와 5월 몹시는 시리즈물입니다. 주제는…….. 노년!!! 이룸은 요즘 노년 여성들을 만날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시작은 매우 사사로운 것이었습니다. 신년 워크샵에서 ‘나는 갑자기 할무니들을 만나고 싶어졌어. 노년?’이라고 툭 뱉은 것이 화근이 되어(제가 왜 그랬을까요…) ‘노년 여성 인터뷰 사업’이 뚝딱 기획되고 말았습니다.
‘우왕 할무니 조아, 이야기 재밌쪙’ 했던 처음 마음과는 달리.. 아직도 노년 사업은 번지르르한 이름하나 얻지 못하고 그저 ‘노년 노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지못미…..)

4월, 5월 몹시는 이 노년 사업을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사업과 사업간 MOU랄까요, 혹은 노년 아래의 산하 사업으로서 몹시랄까요. 여튼 여성들을 만날꺼고, 이야기를 듣고 싶으니까 그럼 구술사 작업을 하는 것일까?? 근데………………….. 그럼 구술사가 뭐징?-0- 알아보잣! 해서 만들어진 뽑아본 자료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경계’에서 – 용산 성매매 집결지 중‧노년층 여성의 이주체험을 중심으로(원미혜, )
‘과정’으로서의 구술사, 긴장과 도전의 여정(이나영, 2012)
여성주의 연구에서의 구술자료 재구성 – 탈성매매 여성의 생애체험과 서사구조에 대한 사례연구를 중심으로(이희영, 2006)

얘네들을 함께 읽는다고 뾰로롱 뭔가 잘 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대충 구술사가 뭔지 맛은 본 것 같습니다.

2.

그리고 4월에 읽은 구술생애사 방법론에 관한 논문들에 이어서 5월에는 최현숙씨의 <15소녀표류기> 1,2권을 읽었어요.

표류기의 여행기/이야기들은 자못 거칠고 날것이어서, 소설이나 영화를 읽을 때의 미끈한 쾌락과는 다른 감각들을 던져 줍니다. 표류기의 작가는 듣는 자이며 받아쓰는 자, 번역하는 자입니다. 그는 작품의 미학이 아니라 ‘할머니’들이 전시하고 구술하는 늙고 낡은 육체와 언어의 시간성, 그 혼란스러운 법칙을 따르고자 합니다. 이렇게 구술자와 청자는 이 이야기만을 위한 한 쌍의 임시적이고 즉흥적인 기관을 형성합니다. 이 공동의 이야기꾼들은 익숙했던 서사들을 비껴나가며 몸과 자아로 놀이를 합니다. “왜 하필 그런 내용을 그런 방식으로 말하는”가는 그녀들 고유의 권한이자 역량으로 그녀들에게 돌려주어집니다.

독자는 이렇게 존재하게 된 이야기의 공간 안에서 자신의 몸이 겪는 느낌들, 감정들과 대면합니다. 다른 형식은 다른 주체를 요청하기에 독자는 세상에서 가장 비루한 노파의 모습을 한 예언자, 샤먼, 마녀를 해석하는 방법을 스스로 훈련해 나가야 합니다. “구술 자체가 정치적 에너지이자 연대의 제안”이기에, “듣고 쓴 사람과 읽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실천”을 고민하게 됩니다.

이야기하는, 이야기된 할머니들은 때로 노동 그 자체가 됩니다. 페이지들은 빼곡히 쌔가 빠지는 노동의 기록으로 채워집니다. 여성은 노동으로만 만들어진 정체성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여성은 관계로 수렴해버리는, 관계로 결정되는 오직 타자를 향한 헌신에의 욕망만을 지닌 존재로 자신을 재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녀들은 반짝이는 것에 홀려 길을 잘못 들기도 하고, 거짓 이력을 만들어 내며,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을 꾸며냅니다. 이들의 “노동과 살림과 놀이와 투쟁”을 목격하는 일은 참 체력을 요하는 일이었습니다. 같이 숨차하고 같이 버거워하다간 에라 모르겠다 삶 그 자체를 인정해버리곤 하면서요.

서사/내러티브는 이야기하는 존재, 이야기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나타내는 오랜 흔적일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 관해 이야기하고 이야기되면서, 그렇게 서로를 이야기 속으로 짜 넣어가면서 존재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부르는 이름은 이야기가 담긴 항아리 위에 붙여진 라벨 같은 것이 아닐까요? 인간은 이야기의 그물코, 모자이크 안에서 그의 이름으로 언급되고 회자되고 기억될 때 그저 흙덩어리가 아니라 일말의 깊이를 유지하고 있는 입체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 김미숙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그 이름은 그냥 납작합니다. 그녀의 주름을 본다 할지라도 아무도 그것에 관해 말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녀의 이름이 더 이상 어디에서도 어떤 방식으로도 인용되거나 참조되지 않을 때 그 삶은 윤회도 부활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김미숙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김미숙이라는 이름은 한 개별자의 총체를 상기시킬 수 있는 마법의 단어로 변모합니다.

내러티브의 어원은 말하기이고, 이해하기라고 합니다. 왜 인간은 ‘순서대로’ 말할까요? 왜 인간은 단 한 순간 모든 생을 모든 곳에서 동시에 살거나 알거나 할 수 없고, ‘차례대로’ 자신의 가능한 모습들을 하나씩 하나씩 경험할까요? 그 이유는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을 것이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이유일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인간의 시간적 조건은 노인을 중요한 인물로 만듭니다. 노인은 곧 완전히 펼쳐져 펼쳐짐이 중단될 한계까지 아슬하게,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펼쳐진 사람입니다. “팔순의 몸을 빌려 입은 다섯 살배기 여자아이” 라는 표현처럼 이야기하는 동안 그의 몸은 생의 어떤 순간으로도 회귀할 수 있습니다. 대화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아주 오래된 의식이 아닐까요.

이렇게 15소녀표류기를 읽으며 앞으로 만나게 될 할머니들이 몹시 기다려지게 되었습니다!
최현숙 씨가 “(가난한) 사람은 무엇으로 행복해지는가?”를 탐구하며 여성들을 만나셨듯이, 이룸의 탐구를 해 나가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