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이룸토론회] “사회적 재난과 성매매-코로나19 상황에서 성매매여성들이 겪는 어려움” 참여자 후기, 첫번째

 

성매매여성의 현실을 통해 본 코로나 시대의 시민권

작성:  소윤

 

1. 들어가며

 

지난 3월 29일, ‘코로나19 상황 속 성매매여성의 현실’을 제목으로 이룸의 비대면 토론회가 열렸다. 그 동안 이룸의 후원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내가 처음으로 참석한 비대면 행사였던 만큼 기대도 되고, 신기한 마음으로 유투브 링크에 접속했다. 이날 토론회는 크게 두 파트로 진행되었는데, 먼저 이룸의 활동가들이 약 일년 간의 시간동안 성매매-성산업 현장에서 만나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수행한 인터뷰 및 설문조사의 분석결과를 발표했다. 그리고 이후에는 해당 발표에 대한 현장활동가(빈곤사회연대 김윤영/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정용림/청소년자립팸 이상한나라 한낱) 및 여성주의 연구자들(덕성여대 차미리사교양대학 김주희 /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백영경)의 토론이 이어졌다. 나는 이룸 활동가들의 발표를 들으면서 성매매여성들에게 ‘코로나-이후’라는 시간성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지를 다시 한번 질문해보게 되었다. 사실, ‘코로나-이후’라는 말을 들으면 ‘이후’의 의미는 곧잘 ‘단절’과 동의어로 인식되곤 한다. 그러면서 코로나 이전과 이후가 얼마나 극적으로 변화하였는지, 코로나가 바꾸어 놓은 풍경들이 얼마나 ‘새로운’ 현상인지를 강조하는 담론들을 생산하곤 한다.

 

하지만, 이날 이룸 활동가들의 발표에 따르면, 코로나 이후를 살아가는 성매매여성들의 시간은 (‘이전 시대’의 상황과의 ‘단절’로 경험되기보다는) 코로나 19 이전부터 누적되어온 익숙한 문제들이 더욱 심화되거나 복잡하게 굴절되는 연속적인 지평에 가까웠다. 예를 들어, 이룸 활동가들이 만난 46명의 성매매여성들 중 31명이 코로나19 상황에서 성매매여성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꼽았으며, 대부분의 여성들은 이러한 어려움에 대응하는 개인화된 생존전략으로 (1) 업소의 이동, 업종의 변경이나 (2) 대출, 대부업에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성들이 마주하는 이러한 현실은 코로나19로 인한 전혀 새로운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상황은 일찍이 2000년대부터 금융의 민주화가 ‘성공’한 신자유주의 한국사회에서 대부업과 성산업이 공모하여 빈곤여성들을 신용(credit)의 주체로 만들어온 과정에서 반복되어온 문제들이기 때문이다(자세한 논의는 김주희의 논의 <레이디 크레딧>을 참고하라).

 

 

2. 방역의 선별성과 마스크 시민권

 

그렇다면, 전세계적인 판데믹이라는 전무후무한 국면 속 ‘면역’이라는 관점에서 발견되는 한국사회 성매매-성산업 현장의 특수성이란 어떻게 논의될 수 있겠는가? 김주희의 토론에 따르면, 코로나 시대의 성매매-성산업 현장에서 제기되는 쟁점은 다름아닌 ‘마스크의 시민권’이라고 논한다. 김주희는 오늘날 공적영역에서 ‘마스크’를 쓰거나 벗는 행위가 언제나 이미 젠더화 되어왔다고 지적하면서, “얼굴이 구별적 상품이 되는 성매매 산업 안에서 여성들은 결코 마스크를 쓸 수 없”다고 말한다. “더 정확하게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마스크를 쓰거나 벗을 수 없” 다는 것이다(<2021 이룸 토론회- 사회적 재난과 성매매: 코로나19 상황에서 성매매여성들이 겪는 어려움> 자료집의 76p 참조).  김주희의 토론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한국은 ‘K-방역’의 이름으로 상당히 엄격한 수준(공적영역에서 마스크 미착용 시 벌금을 부과하는 등의 조치)의  통제를 시행함에도 불구하고 성산업의 현장만큼은 공적영역의 ‘예외’ 사례로 취급되고 있으며, 성매매여성의 ‘일’ 이란 것은 방역의 매뉴얼을 어기는 것이 허용되는 매우 특수한 직종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러한 사실들로 인하여 해당 일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코로나 감염 ‘고위험군’에 해당하는 개인으로, 나아가 개인을 넘어선 일정규모 이상의 집단으로 생산된다는 점에서, ‘인구(population)’로 존재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가장 문제적인 것은 이러한 감염 고위험군의 인구로 생산되는 성매매여성들이 국가와 맺는 관계인데, 이 여성들은 긴급재난지원금의 대상에서도 배제될 뿐만 아니라 동선공개시 ‘성매매 여성’이라는 게 드러날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선별진료소를 방문하는 것 자체부터 장벽(‘화밍 아웃 ’-화류계 여성임을 원치 않게 알리게 된다는 “화류 커밍아웃”의 줄임말-의 가능성)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화밍아웃’의 두려움은 작년 5월,  퀴어들이 경험했던 선별진료소 방문과 관련한 문제들(동선공개와 익명성 보장의 문제. 선별진료소 방문 사실이 알려질 시에 노출될 수 있는 사회적인 낙인과 혐오의 문제)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어쩌면, 판데믹 시대의 ‘방역강국’의 면역기술이란, 미셸 푸코의 말대로 어떤 인구는 더 많이 살게 만들면서 동시에 어떤 인구에 대해서는 죽게 내버려두는 방식(make live, let die)으로 작동중인 것은 아닐까.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면서 ‘태아’의 불가침한 생명권을 주장하기까지 하는 생명중심주의의 시대의 ‘방역’이란, 알고 보면 언제나 이미 살려 둘 만한 생명과 그렇지 않은 생명을 ‘선별’ 하는 역사와 맞물려 작동중인 것은 아닌가.

 

 

3. ‘코시국’의 유흥업과 성매매가 재현되는 방식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성매매여성이 죽게 내버려진 인구로 존재할 때 “‘역병’이 창궐하는 마당에 한남들이 ‘유흥업소’를 방문했다”는 사실 그 자체는 사회적으로 쉽게 도덕적인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즉, 코로나 시대에 ‘성구매자’로 범주화될 수 있는 한국남성에 대한 도덕적인 비난과 조롱은 생각보다 ‘쉽고 빠르다’. 예컨대, 최근에 유명아이돌 정모씨가 유흥업소를 방문했다는 기사가 오르고 그 기사에 대한 SNS 상의 반응을 관찰해보면, ‘코시국’에 업소를 갔다는 점 자체는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 마땅한 일’ 로 인식되는 풍경이다. 실제로 해당 기사가 공개된 이후, 유명 아이돌 정모씨는 방영하기로 예정 되어있던 TV프로그램 MC에서 ‘자진’ 하차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코로나 시기에 ‘유흥’을 목적으로 한 행위들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일로 인식되는 과정에서 여전히 제기되지 못한 질문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도덕의 권위를 빌려서 성산업-성매매가 이뤄지는 공간자체를 ‘범죄화’ 하는 논의에서는 ‘업소폐쇄=문제해결’이라는 식의 등식을 통해 역설적으로 성매매여성들이 어떻게 해서 그 공간에 연루되게 되었으며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을 통해 주체화 되고 있는지를 토론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물론, 성매매여성들을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요보호 여성’으로 범주화 했던 ‘윤락행위등방지법’은 2004년의 성매매특별법(성매매처벌법과 성매매방지법)이 제정된 것을 계기로 삭제되었다. 하지만 성매매특별법상에서 여전히 ‘강제적으로 인신매매당한 자’와 ‘자발적으로 성을 판매한 자’라는 대립적인 이분법 속에서 ‘순수한 피해자’의 지위를 정의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윤방법의 폐지 이후에도 아직까지 남아있는 ‘성녀/창녀’ 이분법과 그것에 기반한 여성내부의 위계화라는 역사는 성매매여성들이 코로나상황에서 최소한의 ‘자기 보호’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현실이다. 이 같은 현실은 ‘업소를 폐쇄’ 한다고 해서 곧바로 사라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성매매-성산업에 대한 도덕주의적인 접근은 오히려 여성들이 경험하는 두려움을 (이미 주어진 자연적인 감정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구성물로 바라보기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4. 성매매여성이 권리의 주체로 인식되기 위한 조건?

 

그렇다면, 이렇게 여러가지 쟁점들이 복잡하게 얽힌 코로나 시대에 성매매여성이 권리의 주체로 ‘재현’된다는 것은 과연 어떻게 가능할까? 나는 이룸 토론회의 마지막 토론인 백영경의 논의(‘성매매여성의 ‘고통’이 사회적 고통이 되려면’)는 이렇게 성매매여성들이 권리의 주체로 인식되기 위한 ‘재현의 조건’을 질문하는 논의였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지난 일년 동안 코로나를 계기로 돌봄노동의 현주소라거나 요양병원 노동자들의 열악함, 가정-사적영역에서 심화되는 여성들의 이중노동 등에 관한 논의들이 활발히 촉발되었다. 그리고 이런 논의들은 ‘공정한 재분배로서 사회정의’를 주장하는 걸 넘어서서, 분배패러다임의 언어로 포착되지 못하는 현실들에 대한 대안적인 접근을 전망하는 것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돌봄노동, 재생산의 위기와 가치를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보자-라는 담론들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성매매여성들의 ‘일’ 만큼은 그러한 돌봄의 형태로 재현되거나 인식되지 못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즉, 성매매여성의 일이 한 사회를 재생산하는 필수노동으로서 돌봄으로 재현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백영경에 따르면,

“…개념으로서의 돌봄노동이 감정과 섹슈얼리티를 포함하여 폭넓은 차원을 다루는 것에 비해서 현재 필수적이라고 인지되는 돌봄노동은 자본주의 경제를 돌아가게 하기 위한 영역이나 비생산적인 인구를 시설 관리하는 영역에 국한되어 있을 뿐 돌봄노동의 의미는 매우 협소 하게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애틀랜타 총기사고 이후 일부에서 강조하듯이 성 노동과 돌봄노동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것은 그 업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존재를 더욱 취약하게 만들 뿐이다.”

“돌봄노동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 과정에서 돌봄노동을 신비화 하거나, 이성애 핵가족을 중심으로 사고하거나, 사회적으로 위협을 주지 않는 안전한 담론 영역으로 한정하는 일은 결국 성매매여성들의 설 자리를 더욱 좁힐 뿐이다. 현실의 여성의 삶에서 성을 판매한다는 것은 실제로 돌봄의 한 형태이자 수단일 수도 있다는 점, 많은 돌봄노동이 노동과정에 몸과 감정이 연루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종류의 착취나 낙인의 소지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일이다.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왜 돌봄이 아니란 말이냐는 주장도 필요한 때이다.”  

(<2021 이룸 토론회- 사회적 재난과 성매매: 코로나19 상황에서 성매매여성들이 겪는 어려움> 자료집의 84-85p 참조).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은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의 몫은 (단지 이룸활동가들 뿐만이 아니라) 여성학적 지식생산에 참여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포함한) 동시대 페미니스트들, 그리고 각자의 현장에서 행동하고 있는 활동가들 모두가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토론자의 문제의식에 동의한다. “성매매여성의 일은 왜 돌봄이 아닌가? 이것은 왜 돌봄이 아니란 말인가?” 이룸의 토론회를 통해 제기된 이 질문이 단지 자신의 관심사가 성매매-성산업인 여성학 연구자, 활동가만의 소유물로 남기보다는 여성학적 지식생산, 여성주의 활동의 장(field)에서 당연하다고 여겨온 지식들, 앎들, 믿음들, 사유들에 대한 전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좋겠다.

 

후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