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코 치즈코 만남 후기2] 남성 페미니스트_부깽

 

이룸과 우에노 치즈코와의 만남의 자리에, 유일하게 이루머들과 함께 했던 '남성'.
우에노 치즈코의 영향을 받으면서 페미니스트의 정체성을 만들어갔던 그는 이 날도 우에노 치즈코의 모든 일정을 함께 다니는 열의를 보였다. 이룸의 후원자이자, 반성매매 입장을 갖고 있는 남성 페미니스트로서, 그에게  우에노 치즈코의 간담회 자리가 어떻게 들렸을지에 대한 소감이 듣고 싶었다. 내가 본 부깽은 오랫동안 남성으로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검열하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고, 강렬하게 행동했다. 여성에 대한 혐오가 어디 요즘 뿐이랴, 그러나 여성혐오가 하나의 현상으로 대두된 요즘이야말로 남성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성들의 고집스러운 말하기 방식과 성차별적인 내용에 지쳐있을 때, 누구보다 페미니즘을 고민한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우에노 치즈코의 강연을 들으면서 느낀 점들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에 부깽에게 글을 제안했고,  그는 남성 페미니스트, 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 글을 보내왔다.

  

                                  남성 페미니스트                                          
-부깽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 사건과 관련해서 SNS에서 남성들의 ‘나는 잠재적 가해자입니다’라는 자기반성이 이어졌다. 이러한 발화는 젠더간의 비대칭성을 드러내는 것보다, 저항하고자 했던 젠더 비대칭성을 재-공고화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고백하는 남성은 자기성찰이 가능한 주체로 재정립되지만, 여성은 남성의 자기반성 속에서 남성의 자기성찰을 위한 사건으로 타자화되어 피해자로써 재현된다. 공교롭게도 여성 혐오가 작동하는 방식은 이 자기 고백의 메커니즘과 다르지 않다.
여성 혐오는 사회적 구조 안에서 동작하고 있음에도, 이러한 자기 고백은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소급해 버린다. ‘특권을 고백하는 의식’은 사회 질서의 구조를 드러내기 위한 투쟁을 개인적인 자기 수양으로 옮겨버렸다.[1]
 
여성 혐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기반성을 넘어선 입장을 필요로 한다. 입장은 단순히 하나의 시각에 머무는 정지상태의 자기성찰이 아니다[2]. 끊임없이 주변을 중심으로 탈바꿈시키는(사유하는) 동적인 상태를 말한다. 당신의 젠더가 무엇이든 간에 그 고민을 삶 속에 지속해서 녹여 낸다면 어떤 가능성이든지 개연성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취한 입장은 페미니즘이다.  
 
 “나는 (남성) 페미니스트이다.”
 
나는 페미니스트의 요건으로서 생물학적 성이 한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코드화된 사회적 존재로서의 젠더가 요구된다고 본다. 이것은 ‘남성’에 괄호 치기를 가능하게 한다. 이 괄호 안의 ‘남성’은 남성/여성이라는 권력 체계를 지탱하기 위한 극단적 이분법으로만 읽혔을 뿐이다. 우에노 치즈코가 지적한 젠더 비대칭을 구조화하는 그 ‘남성’에 다름 아니다. 괄호치기는 고정된 성별 정체성 바깥에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읽어내고 권력화 된 이분법, 젠더의 비대칭성과 투쟁하는 것이다. 이 권력에 대한 투쟁은 권력의 구조를 드러내게 될 것이고 ‘차이’는 ‘~과 다름으로써’ 열등한 것, 부정적이고 분할적인 것이 아니라, ‘~과 다름으로써’ 지금과 다른 대안적 가치들을 생산할 수 있는 한 조건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괄호를 연다. “나는 (남성) 페미니스트이다. 나는 ‘남성’이다.”
 
이때 비로소 ‘남성’은 자기 고백적 주체를 넘어설 수 있다. ‘다른 종류의 남성’ 또는 ‘다른 종류의 여성’이 아니라 생물학적 운명을 벗어난 ‘탈성별화된 인간’으로써 주체[3]이다. 자기 결정권이 박탈된 세계에서 여성주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주변화된 사람들의 입장에 선다는 것이다. ‘여성주의 행동’을 통해 새롭게 표상된 세계 안에서 ‘차이’를 긍정하고 모든 상징적 소수자들에게 말할 수 있는 자격과 목소리를 돌려주는 것이다. 모든 주변이 중심이 되는 것이다. 당신이 그리고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것은 발화의 지점을 떠나 ‘더는 동일한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살아갈 수 없다’[4]라는 의미이다.
 



[1] 앙드레아 스미스 – 특권의 문제
[2] 샌드라 하딩 – <남성이 여성주의 사상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 남성 페미니스트/또 하나의 문화
[3] 샌드라 하딩 – <남성이 여성주의 사상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 남성 페미니스트/또 하나의 문화
[4] 데이비드 J. 커헤인 – <남성 여성주의라는 모순 어법> – 남성 페미니스트/또 하나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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