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숲이아

 

“우리 삶에는 다른 점이 많지만 트랜스젠더로서의 경험은 공통적이에요. 상황이 달랐다면 우리의 삶이 뒤바뀌어서 제가 제니퍼의 상황에 처했을 수도 있어요.”

 

미국인이며 필리핀 출신 저널리스트인 메러디스가 영화 속에서 한 말이다. 메러디스는 제니퍼 라우데 편에 서서 제니퍼가 당한 사건을 알리고 죽음 이후에 벌어진 운동을 기록하는 위치에 있다. 영화 초반부, 메러디스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제니퍼에 대해 알게 되었고 필리핀 트랜스 여성으로서 바로 공감했다고 밝힌다. 감독은 메러디스를 훌리타 라우데와 버지 수아레즈(인권변호사)와 함께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등장시키면서 관객들이 그녀에게 감정이입하고 이 사건을 트랜스젠더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한다.

 

메러디스가 서 있는 위치성은 필리핀 출신이며 미국인이라는 점에서 단순하지 않다. 영화에는 트랜스 여성 입장에서 목소리를 내는 역할을 하는 나오미가 등장한다. 나오미와 메러디스가 대화를 나누던 중, 필리핀 사법부가 펨버튼에 내린 판결을 두고 입장이 갈린다. 나오미가 필리핀은 미 제국에 의한 식민지 입장에 처해 있다는 말에, 메러디스는 즉각적인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오미가 한 말에 수긍을 한다. 그녀는 따갈로그와 영어를 할 수 있고 미국에서 살면서 자유롭게 필리핀과 펨버튼의 고향을 오고 갈 수 있는, 그 만큼 자원을 가진 사람이다. 미국인으로 본인이 속한 국가가 제국주의 국가로 불리며 다른 나라에서 식민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복잡한 위치에 있다. 인사이더도 아웃사이더도 아닌, 경계에 서 있을 때 볼 수 있는 지점. 관객들은 메러디스를 통해 다양한 관점에서 제니퍼의 죽음에 다가갈 수 있다.

 

메러디스는 본인 위치에 대한 고민을 하는 듯이 보인다. 제니퍼 엄마인 훌리타가 보기에 메러디스는 제니퍼에게 바라던 모습을 갖춘 사람이다. “트랜스젠더고 외국에 와서 잘 살고 있는 사람.” 훌리타가 제니퍼를 메러디스에게 투사하며 귓속말로 얘기하고 ‘간다’라고 부를 때, 메러디스에게 제니퍼처럼 화장을 하면 더 예쁘겠다 라고 했을 때, 메러디스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영화 장면 속에서 메러디스는 화장기가 없는 얼굴로 등장한다. <Call Her Ganda>라는 원제목에서 Ganda(간다, 아름다움)가 지칭하는 대상은 제니퍼 라우데 이면서 동시에 훌리타가 부르는 메러디스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리적인 위치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태평양에 위치한 필리핀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쪽으로는 베트남, 북서쪽으로는 중국을 마주하고 있어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과 힘겨루기를 할 때 중요한 동맹국이다. 올롱가포 시에 있는 수빅 만은 오래 전 부터 전쟁 시 보급기지로 이용되던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을 치를 때나 한국전쟁 때 수빅 만을 보급기지로 이용한 역사가 있다.

2011년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으로 있을 때,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미국의 태평양 시대”라는 글을 외교잡지 포린 폴리시에 기고했다. 앞으로 10년은 미국이 외교, 군사 정책의 축을 중동에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으로 돌리는 ‘아시아로의 회귀’ 정책을 펼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영화의 시점은 미국이 92년에 수빅만에서 철수했던 미군을 20여년 만에 재배치하고 수빅만을 다시 기지로 사용하려고 시도 할 때를 배경으로 삼는다.

 

2014년 미국과 필리핀은 내 군 시설 이용을 확대하는 내용의 방위협력확대협정(Enhanced Defense Cooperation Agreement, EDCA)을 체결했다. 미군의 수빅 만 기지 재사용을 염두에 두고 벌어진 합의였다. 필리핀 대법원에서 법적 분쟁이 일면서 시행이 보류됐다가 이듬 해 중국과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을 이유로 미군은 사실상 재배치 된다.

 

필리핀 내부 식민지로, 기지촌이라는 초국가적인 공간에서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주변화된 노동에 종사하며 살아갔던 제니퍼가 죽음을 계기로 미제국주의에 희생당한 “국민”으로 필리핀 국가 주권을 얼마나 지킬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영화 <혐오의 시대>를 통해 사건 이후 정의를 찾아가는 움직임이 때로 미국에 반대하는 목소리에 집중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필리핀 남성 정치인들은 제니퍼와 관련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주권을 지키는 일임을 강조한다. 훌리타 라우데와 버즈 수아레즈의 시선에 메러디스의 시선이 겹쳐지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메러디스는 계급, 내셔널리티 등 차이를 뛰어넘어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에서 온 동질감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사건에 뛰어든다. 메러디스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함으로 개인을 국가로 환원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제니퍼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다. 감독은 메러디스라는 매개를 통해 제니퍼와 유가족, 죽음의 진실을 찾고 정의를 되찾기 위한 싸움을 하는 사람들과 연대를 한다. 영화를 연대의 기록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나의 오해를 고백하자면, 나는 영화를 세 번 보기 전까지 감독이 메러디스인줄 알았다.

 

피해와 가해를 이분법적인 틀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교차 지점에 대해서 고민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서 있는 위치성에 대해 고민하는 것 또한 필요하지 않을까. 많은 한국인들은 한국을 피해 국가로 인식하지만, 한국은 이미 국제사회에서 하위제국주의 국가로 위치하고 있다. 요즘 한국에 주둔해 있는 미군기지 주변 기지촌에는 필리핀, 러시아에서 온 여성들이 성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한국에 머무르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나와 당신이 마주해야 할 진실이다.

 

영화를 보는 것이 영화가 몸을 통과하는 경험을 의미한다고 할 때, 이 영화는 몸에 제니퍼와 여러 사람들의 죽음이 통과해야 하는 영화였다. 감독이 제니퍼가 살해당할 당시 사진을 영화에 그대로 노출시켜야 했을까 하는 고민이 든다. 제니퍼가 요리와 노래부르기를 좋아했다는 것을, 셀프카메라로 영상을 찍으며 미소를 짓는 모습을 기억하리라 다짐한다.

 

故케이시-느루-모모님을 애도하며,
故윤금이님과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살인사건으로 세상을 떠난 故심미선, 신효순님을 기억하고 추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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