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 첫번째 후기

<일탈> 세미나 첫번째 후기_별

"현재에 관해 사유할 수 있다면 우리가 가진 지적인 도구를 모두 사용해야 한다."

 
현재를 사유하기 위하여 게일 루빈의 <일탈> 서문부터 2장까지를 함께 읽었습니다.
 
2016년 한국의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이 책은 왜 이렇게 핫한걸까요. 이 책을 출처로 한 말들로 성매매를 논할 때, 그 말들 사이에 감추어진 행간과 의도는 무엇일까요. 페미니즘, 성매매, 퀴어,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현재의 지형 속에서 이러한 질문들을 끌어 안고 일단 읽기를 시작하였습니다.
 
1, 2장의 내용상, 저자가 '가부장제'의 상정 및 이에 기반한 '반포르노그라피 정치'를 비판함으로서 펼치고자 했던 저자의 정치는 과연 무엇이었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서문부터 2장까지의 내용만으로는 쉽사리 감이 잡히지 않았고 의구심이 더해갔습니다. 에마 골드먼이 <여성거래>에서 "매춘의 인과론", "여성이 거래되는 진짜 원인", "여성의 경제적 기회와 사회적 영향력을 제약하는 (일상적) 조건들을 고심"하자고 했던 이야기는 저자에게서 "반성매매, 반포르노그라피 여성 운동은 보수주의 우파 정치이다, 십자군이다"라는 단언으로 비약 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구조적인 성적 억압과 착취를 법과 제도라는 수단을 포함하여 공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시도를 국가의 성에 대한 낙인 및 불법화와 완전히 동질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자에게 성에 있어서 '노예제와 인신매매의 수사'를 배척하는 것은 곧 국가 통제에 대항하는 성전쟁의 첨단으로 내세워지게 됩니다.

이런 방식의 프레임이 만들어지게 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동안 저자의 삶에는 무슨 일들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상업적인 성'과 '인신매매'는 각기 다른 장에 놓여있으며 반드시 서로를 동반하지는 않는다, 성서비스의 거래와 성거래에 의한 이주 현상 자체를 젠더를 비롯한 권력 위계에 의한 폭력과 차별로 진단할 수 없다는 이해는 실제로는 현장의 경험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으며 어떤 사회적 효과를 낳을까요. 섹스/젠더체계를 해체해서 나타날 새로운 문화현상과 인격은 누구의, 무엇을 위한 해방인걸까요. 이를 읽어내기 위하여 앞으로 계속 읽어나갈 예정입니다.

 
지금으로선 포르노그라피 및 젠더폭력에 관한 운동과 국가폭력을 한데 묶어 내던져버리는 일로 "여성을 여성으로 순치하는 체제"를 무너트리는 일이 막 한층 더 가능해질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처벌과 폐기에 그치며 구조 자체를 냅두는 것을 경계하는 정치는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담 이 정치를 위해서 남성, 남성성, 가부장제 등에 관한 논쟁을 보다 깊이있게, 폭넓게, 다양하게 해나가자는 제안을 하는 걸로는 안되었을까요. 안된다고 보았던 근거와 의도가 무엇이었을까요.
 
이런 책읽기로 이룸이 경계하고자 하는 것은 구조와 체제, 존재와 가치에 대한 인식의 계보와 변별점을 상실한채로 신자유주의적 개인들의 서사, 정서, 소비의 흐름에 휩쓸리는 일인 것 같습니다. '성 공황'과 '도덕적 구원' 이후의 모색은 아무도 구원조차 할 수 없을 무결함이 아닌 더 많은 관계와 돌봄과 평등, 더 많은 실패와 상처로 가닿을수 있을 거니까요. 그러기 위하여 이룸이라는 작고 구체적인 공간과 얼굴들에 단단하게 발을 디디고 이룸의 시선과 방식으로 공동의 삶을 모색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일탈>의 왜곡과 달리, 2016년 한국에서는 '일탈'한 비규범적 존재들의 긍정과 '여성'의 침해, 착취, 억압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가 연결되며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인 것처럼 얘기되지 않았음 합니다. 우리들의 목소리들에서 모아낼 수 있는 이야기가, 공통의 의제가 개별적인 권리로 한정되는데 그치지 않고 더 멀리 갔으면 좋겠습니다. 낙태죄 폐지의 움직임이 여성의, 모든 약자들의 삶의 보장을 위해서인 것처럼, #000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성 자체에 내재한 폭력을 사유해야 하는 것처럼 성매매에 대한 담론 역시도 마찬가지의 궤도에 올라야 할 것입니다.

 한 해, 우리는 강남역 10번 출구와 올란도를, 세월호를, 백남기 농민을 추모하였습니다. 인간의 몸을 지닌 유한한 자유, 사랑과 애도를 끊임없이 발굴하고 복원하는 일이 활동이 되기를. 지배와 거래를 비껴나가는, 이윤을 내기를 어려워하는 몸, 포섭되지 못하고 남아있는 한줌의 쾌락, 그것이 '우리'의 정의이기를. 오늘 또 내일 우리가 각자의 장소들에서 바라고 있는 세계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연대할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