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한꼭지]조건만남_완두

조건만남
 

완두
 
 
 
우리는 상담원과 내담자로 평등한 관계를 맺으며 
아래의 내용들을 나누고 지키며 만날 것을 함께 약속합니다.
 
상담원은 내담자가 결정권을 가질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내담자의 동의를 얻어 상담을 진행합니다. 
 
상담원의 위치에서 취득한 개인정보와 상담내용에 대하여 
비밀을 지켜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상담원과 내담자는 현물과 현금 등의 거래를 하지 않으며, 
선물을 주고받지 않습니다.
 
상담시간은 진술서 작성 등의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1시간을 넘기지 않으며, 
상담 시간을 변경할 경우에는 최소 2~3일 전에 연락을 주시길 바랍니다.
 
만약 상담과정 중 내담자에게 긴급상황(사고, 자해, 자살시도 등)이 발생할 경우에는 상담원이 그 내용을 가족 및 관련인에게 알릴 수 있습니다. 
 
상담원과 내담자는 상담소내의 업무 변경이나 각자의 사유로 인해 
상담을 지속 할 수 없을 때 상담원을 변경할 수 있습니다.
 
내담자는 상담 시 인권침해를 당하거나 상담소 이용에 있어 부당한 처우를 받았을 때 
국가인권위원회(국번없이1331), 여성긴급전화1336(국번없이1336), 동대문구청 가정복지과(02-2127-5084)로 민원신고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며칠이죠?”
“2016년 8월 16일이요”
“제가 먼저 서명 할게요” 
 
상담원          완두              (인)
“내용 다시 천천히 읽어 보신 후 궁금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내담자                                (인)
“여기에는 저랑 공유하고 싶은 이름을 쓰신 후 서명해주시면 돼요.”
 
내담자 다른이름으로 저장 (인)

 
오셨어요

 

 

 

  나는 요즘 다수의 여성과 ‘조건만남’을 한다. 만남은 상대 쪽에서 원할 때 시작한다. 약속한 시간, 약속한 장소에서 만나 내 쪽에서 카드를 긁으면 끝나는 식이다. 비용 없는 만남을 하기도 하는데, 주로 첫 만남이 그렇다. 여성들은 첫 만남에서 지나온 이야기를 꺼내고 그 이후론 앞날이 지나온 이야기와 닮지 않기를 소원한다. 매년 돌아오는 생일처럼.


  “축하해.”
  
후- 촛불을 끈다. “소원 빌었어?” 누군가 내 오른손에 흰색 플라스틱 칼을 쥐어준다. 가진 주의를 죄다 끌어 모아 생일케이크를 자른다. 빵과 크림과 과일이 갈라지고 부서진다. “와아-” 여자는 태어난 이래 줄곧, 결코 서로가 납득할 수 없는 조각으로 갈라지고 부서진다.* “축하해”
 
   “축하해, 성적이 많이 올랐네.” 학창시절 선생님은 내게 ‘지금 공부하면 남편 얼굴이 바뀐다’고 말했다. 당시 나는 그 말이 어떤 여성에겐, 학비를 벌기 위해 밤낮으로 남의 남편들 얼굴을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아빠는 내가 미스코리아가 되길 바랐다. 나는 종종 체중계 위에 올라갔다. 물론 팔리는 가슴과 엉덩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나에겐 감추는 것만이 허락된 나의 젖꼭지를 사람들은 잠갔다 틀었다 비틀었다 했다. 해가 넘어갈수록 늘어나는 초의 개수만큼 나를 단속하는 시선들이 내 과거-현재-미래에 촘촘하게 꽂혔다. 
 
   나는 여성들과의 조건만남에서 뭉텅뭉텅 잘려나간(혹은 내 의지로 자른) 기억들과 조우하곤 한다. 여성들이 서로의 어머니가 다름에도 한 달에 한 번 검은 봉지 속에서 숨죽인 피의 기억을 나누고 있는 것처럼. 

 

   그날, 나는 한 여자와의 조건만남을 끝내고 반숙 상태의 눈으로 지하철에 올랐다. 비할 수 없는 경험으로 위로 하려 했던 부끄러움 혹은, 쌩까고 싶은 온갖 것들에 대한 환멸이 감자탕 집까지 따라왔다. 여름이라 유난히 눈에 잘 보였다. 여자와 같이 사는 진상의 엄지손가락 크기를 가늠하게 하는 손톱자국. 여자의 빚을 갚아준다고, 여자의 눈물을 닦아준다고,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핸드폰 자판을 꾹꾹 눌렀을 그 엄지손가락. 
 
   감자탕 집에서 여자와 같이 사는 진상인 양 힘주어 감자를 씹었다. 왈칵 노른자가 터졌다. 감자는 잘 익었고, 따뜻했고, 달았다. 여자는 같이 사는 진상이 밖에서 상대하는 진상과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 했었다. 그래서 여자는 몇 번이고 같이 사는 진상을 상대했다고 했다. 여자는 지금쯤 집으로 돌아가 같이 사는 진상과 저녁을 먹고 있을 것이다. 나는 입 안에서 짓이겨진 감자를 삼켰다. 사실 사람은 누군가를 신뢰하는 것 보다, 이미 쌓은 신뢰를 거두는 것이 두려워 ‘도무지 사람을 신뢰할 수가 없다’고 둘러대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우린 한 번 맛 본 것을 쉽게 뱉지 못하니까.

 

 
   지난 6월, 이룸에 방문했던 우에노 치즈코는 말했다. “페미니즘의 기본은 타자를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구제하는 것이다.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밖에 없다는 것이 페미니즘의 출발이다. 여기에 오는 사람들은 자신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만 오는 게 아닌가? 자기를 바꾸고 싶은 사람들이 상담을 받으러 오는 것이고 그 사람들만 바꿀 수 있다. 나는 그게 페미니즘이 이전의 자선활동과 다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여기 오는 여성들에게 힘을 불어 넣어 주는 것뿐이다.”
 
   우리의 조건만남에서 여성들은 울고, 침묵하고, 잠들고, 잠들지 못하고, 병들고, 두려워하고, 좌절하고, 낙담하고, 화내고, 억울해하고, 미안해하고, 이별하고, 짜증내고, 먹고, 웃고, 꿈꾸고, 계획하고, 노력하고, 만나고, 고마워하고, 배우고, 나누고, 욕망하고, 사랑한다. 
 
   한 여자는 말했다. 
   “엄마의 기억을 지우개로 지울 수 있으면 빡빡 지우고 싶어요.”  
 
   한 여자는 말했다.
   “이름 바꾸려고요. 팔자가 이런 게 이름 때문인가 해서.”
 
   우리의 조건만남으로는 기억을 지울 수도, 다시 태어날 수도 없다. 대신 그것이 무엇이든 ‘타락’으로 명명된 여성의 욕구, 여성의 관계, 여성의 소비를 ‘다른 이름으로 저장’할 수 있는 동기가 될 수 있진 않을까. 나는 우리의 만남이 한 여성이라도 자신이 살아가는 조건에 변화를 주는 시도로 남길 바란다.

 


 

*“여자로 산다는 것은 곤경에 처하는 것 짜증나는 것 언제나 화가 나는 것 나 자신이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둘로 갈라지는 것.”(에리카 종, <비행공포>, 이진 역, 비채, 2013, 300쪽) 문장 차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