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회원이 알고싶다⓹]삶은 행복하게 활동은 치열하게_이선미

[그 회원이 알고싶다⓹]

삶은 행복하게 활동은 치열하게

 

인터뷰어 : 기용
인터뷰이 : 이선미

 
이선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5년 전, 내가 인턴으로 있었던 서울시 늘푸른여성지원센터에서였다. 당시 센터에서 성매매예방교육을 만들고자 했고 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전북 전주에 있는 반성매매운동단체) 활동가였던 이선미가 참여했었다. 그 때 이선미는 전북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고 유학을 갈 예정이었다. 예방교육 작업이 완료 된 뒤 이선미는 프랑스로 떠났고 그 곳에서 5년을 지내다 작년 말, 한국에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다시함께상담센터의 활동가가 되었고 현재 영등포의 성매매 집결지 현장지원센터 나비에서 일하며 여성들을 만나고 있다. 5년 전, 프랑스에 가기 전 내가 보았던 이선미는 시원시원하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시 만난 그녀는 여전히 긍정적 에너지가 넘쳤다. 인터뷰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먼저 가볍게 안부로 시작하자. 요즘 신상에 별일 없는가.
시국이 이리하여. 잘 지내는 것도 사치인 듯한 느낌이 든다.(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사망하자 경찰이 부검을 주장하고 시신탈취를 시도하던 때였다.) 내 안부는 괜찮다.
 
 
한국에 돌아온지 이제 10개월 쯤 된 건가? 아까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한국 돌아와서 만나게 된 사람인가
그렇다. 사귄지 5개월 됐다. 열심히 찾아다닌 결과다. 만나는 사람마다 소개팅해달라고 했었다.(웃음) 예전에는 나는 왜 이성애자인가 진짜 고민 많이 했다. 왜냐면 한국남자 중에 찾기가 정말 힘들다. 빠리 가기 전에 만났던 남자들과 돌아와서 만난 남자들이 또 다르다. 나이가 서른 중후반을 넘어가고 직책이 어느 정도 되다보니 너무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거다. 그나마 안 그런 사람으로 소개시켜준 것일 텐데도 그렇더라. 그래서 나는 왜 이성애자일까 고민했는데 여전히 남자가 좋다. 결혼 생각도 있다. 빠리 있을 때 베이비시팅으로 생활비를 벌었다. 아기를 좋아하지만 육아에 대한 공포는 있었는데 그게 싹 해소됐다. 아이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하루에 눈, 코, 입 가릴 것 없이 뽀뽀 백번씩 하고 그랬다.
 


<알리스 피에르와 파리에서 마지막 날>

 
아이와의 관계는 마약 같은 게 있다. 준만큼 돌아온다. 일반적인 관계는 안 그렇잖나. 아이들이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힘들게 하거나 괴롭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이라서 그런 거다. 근데 내 마음이 불편하거나 짜증이 올라온다면 그건 내 문제인 거다. 그리고 내가 불교 신자다. 마음공부에도 도움이 된다. 첫째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는데 꿈이 작가였고 감수성이 예민하고 공감능력이 뛰어난 아이였다. 그 아이랑 얘기하는 게 너무 재밌었다. 아이들은 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니까. 고정관념도 없고. 그렇게 내가 돌봄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됐고 애를 낳고 싶다는 확신이 들더라. 아빠 없이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건 너무 힘들 것 같고 결혼을 해야겠다 싶다. 언제가 될지는 모른다. 그래서 난자를 보관해야하나 생각 중이다.(웃음) 난자보관이 생각보다 돈이 많이 안 드는 것 같더라.
 
 
사범대를 졸업했고 임용고시를 준비했었다고 했다. 교사라는 직업이 적성에도 맞고 하고 싶었다고. 그런데, 어쩌다 반성매매활동가가 되었나
원래 학생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선배 언니가 여자 후배들을 데리고 여성학 공부를 시작했다. 세상에 이런 게 있어? 눈이 확 뜨인 거다. 그 동안의 남자선배들이랑 있었던 갈등이나 불편했던 것들이 설명이 되고 해소가 되었다. 그 다음 해에 총여학생회 나갔는데 떨어졌다. 선거 떨어지니 할 게 없어서 바람꽃이라는 여성주의 동아리를 만들고 반성폭력 운동을 했다. 비대위, 상담소 같이 여학우가 와서 얘기하면 우리가 대리인 역할하고 그랬다. 그리고 졸업하고 임용고시 공부를 했는데 잘 안 됐고. 그때 동아리 같이 했던 후배 한명이 전주(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를 말함)에서 일하고 있었다. ‘언니 뭘 공부를 해. 빨리와~’ 그래서 가게 된 거다.
 
성매매에 관심을 갖게 된 게, 군산 화재사건 때문이었다. 2000년은 어렸고 관심도 없고 해서 지나갔는데 2002년은 알게 된 거다. 그때 죽음이 사실 처참했지 않나. 내 또래인 피해자들이 감금을 당해서 죽었다는게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선미촌(전주의 성매매집결지)에 자원활동을 가기도 했었다. 그렇게 반성매매 운동을 알게 됐고 성매매 흐름을 알게 됐다. 2002년 당시에도 성노동과 반성매매 입장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학내 사회에서는 성노동에 훨씬 기울어져 있었다. 우린 노동운동 하는 데니까. 근데 나는 왠지 반성매매에 마음이 끌렸다. 당시 여성들의 현실이 처참했으니까. 성노동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전주에서 일을 하다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 유학은 왜 가게 된 건가.
전주센터에서 3년을 일하다 보니 아무래도 많이 치이고 소진됐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가다가는 평생 이쪽 일을 안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지겨우니까. 서른이 되니 그동안 운동을 쭉 해왔는데 이걸 정리하고 나를 되돌아보고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싶어지더라. 영어를 배울 수 있는 호주와 68혁명의 프랑스를 놓고 고민하다가 목수정의 책(‘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마 속까지 정치적인’)을 읽었고 프랑스에 가기로 결정했다. 이 언니의 삶이 너무 멋지게 느껴졌거든. 그리고 프랑스가 유학생한테 혜택이 많다. 학비가 1년에 45만원이다. 그나마 석사라서 비싼 거였고 학부는 35만원 수준이다. 거의 무료인 셈이다. 그리고 혼자서 방세 내는 사람은 주택보조금을 받을 수 있다. 집에 따라 다른데 15-20만원 정도다. 사실 공부가 주 목적이었다기 보다 외국에 살고 싶은 게 더 컸다. 6개월, 1년도 싫고 2-3년은 살고 싶었다. 근데 그러려면 비자가 학생비자 밖에 없다. 학생 비자는 학교를 등록해야지만 주니까. 언어교육 2년 정도 받고 사회학부 안에 있는 젠더학과 대학원을 들어갔다. 이름이 좀 긴데 편하게 젠더학과라 부른다. 내가 학부는 사회학 쪽이 아니었는데 센터에서 일한 경험 3년으로 소장님이 추천서 써주고 해서 경력으로 붙은 거다. 학교 가서는 많이 못 알아들었다. (웃음) 학생 중에 외국인이 많았는데 어떤 외국인이 내용을 못 따라가겠다고 토로하니까 프랑스 애들이 ‘우리도 못 알아들어 괜찮아’ 그랬다.

 

<영등포역 근처의 까페에서 만났다>
 
 
반성매매 활동가가 프랑스를 갔으니 프랑스 성매매 상황을 주의 깊게 봤을 것 같다. 프랑스는 성매매는 규모나 특징 등이 어떠한가. 최근에 성구매자를 처벌하는 법안이 통과됐는데.
프랑스는 대부분 거리성매매 위주고 규모가 참 작다. 규모로는 한국에 비할 바가 아니다. 성매매로 유명한 몇몇 거리들이 있다. 성매매하는 여성들의 90퍼센트가 외국인이다. 현지 프랑스 여성은 거의 없다. 원래 업주만 처벌했었는데 올해부터 성구매자를 처벌하는 노르딕 모델이 통과됐다. 여성은 처벌받지 않는다. 벨빌거리가 물가가 좀 싸고 맛있는게 많아서 자주 갔었는데 여성들이 아침부터 쭉 서있다. 누구 기다리는 것처럼. 혼자 있으니까 언니가 개인적으로 파는 것 같지만 뒤에 브로커들, 인신매매 조직이 있다. 그 여성들이 무슨 돈으로 어떻게 왔겠나. 비행기 값이며 체류비용이며 다 해주는 거다. 프랑스가 워낙 자유주의가 강한 나라여서 성구매자 처벌하는 법안에 대해 반대도 만만찮았다.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지 말라는 거지. 보수적인 상원은 계속 반대했는데 하원이 밀어붙여서 통과된 거다. 몇 년 걸렸다.
 
프랑스도 반성매매와 성노동으로 갈려져 있다. 아무래도 성노동이 쿨하게 느껴지니까 젊은 층이나 운동하는 친구들은 성노동에 훨씬 관심이 많다. 과거 성노동 쪽에서 하는 얘기 중에 일정 정도 이해가는 부분이 있긴 했었다. 그들이 하는 주장을 우리 언어로 어떻게 해석하고 바꿀까 고민이 든다. 우리가 가지는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지를 고민하고 언어를 더 많이 만들어야겠지. 성노동의 주장에 동의하진 않는다. 심각한 판타지다. 현실의 성매매와 동떨어져 있고 불가능한 이야기다.
 
 
이제 마지막이다. 이룸 활동에서 인상적이었거나 재밌어 보였던 게 있는지.
이룸은 어쨌든 고민을 많이 하는게 보여서 좋다. 이 활동을 하다보면 타성에 젖고 매너리즘에 빠지고 고민을 안 하게 되잖나. ‘활동하고 있으니까’에 만족하는 것 같기도 하고. 끊임없이 고민하는 게 보이고 그 고민의 과정이 보이더라. 시의적절한 성명서나 의견을 내주니 때론 고마울 때도 있다. 특히 언니들에 대한 고민을 좀 다양하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양쪽에서 욕을 먹는 것 같고.(웃음)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함께 지하철 영등포역으로 가는 길에도 반성매매 운동에 대한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이룸은 종종 성노동을 지지하는 것으로 오해를 사곤 한다. 이에 대해 이선미는 반성매매를 잘 말하려다 보니 그런 것 같다는 평가를 해주었다. 정말 그러하다고 격하게 동의했다. 그리고 이렇게 알아주는 것이 너무나 반가웠다. 이룸은 참 고민을 많이 한다. 선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쪽에서 보자면 답답하고 의아해 보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룸은 계속 반성매매를 잘 말하려고 고민할 예정이다.

●그 회원이 알고싶다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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