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김아람(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전문연구원)

 

이룸 영화제에서 영화 <이태원>을 준비하고 영화 속에서 실제 이태원을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청량리라는 공간, 그 속의 여성들, 삶이 겹쳐 보인다. 이태원에서 생각하는 청량리, 청량리로 다시 보는 이태원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까.

 

오래 전 과거로 돌아가 보자. 미군이 주둔하기 이전의 이태원과 청량리, 그 공간의 역사적 출발점에도 공교롭게 ‘타자(他者)’가 있었다. 이태원(利泰院)에서는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왜군이 들어왔다. 부산을 함락하며 북쪽으로 이동하던 부대가 한강변에 이르러 이태원에 들어섰다. 왜군은 이태원의 비구니 사찰에서 여승을 겁탈하고 절에 불을 질렀다. 여승이 아이를 낳자 타국인의 아이라 하며 그들의 집을 이태원(異胎院)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임진왜란 후 남게 된 왜군들도 이태원에 거주했다고 한다. 청량리에는 ‘외국인’은 아니지만 외지인이 많았다. 대한제국 말기의 전차 노선을 시작으로 철도, 버스가 들어서며 교통의 요충지가 되자 많은 지역의 사람들이 청량리를 오가거나 그곳에 머물렀다.

 

두 공간은 ‘이주’의 과거 또한 공통적이다. 일본의 식민화 과정에서 용산에 군사기지가 세워지자 용산기지는 이태원을 서쪽, 남쪽으로 감싸버렸다. 기지가 생기며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은 강제 이주되어(1906년) 지금의 이태원 지역인 이태원 시장과 해밀턴호텔 주변에 정착하고 마을을 만들었다. 현재 이태원이 사람 사는 공간이 된 데에는 강제 이주라는 계기가 있었던 것이다. 식민지 시기 청량리에는 판자촌이 만들어졌다. 판자촌은 본거지를 떠난 사람들,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한 사람들의 공간이다. 이태원과 청량리는 이주해 온 사람들로 인해 새롭게 공간이 창출되었다.

 

지금의 이태원과 청량리의 공간성이 만들어지는 데에는 공간을 통제하는 거대한 권력 체계가 작동하였다. 한국전쟁 후 한미군사동맹이 그 첫 번째이다. 동맹 속에 생겨난 기지촌은 이전의 주거지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공간이었다. 일본군 주둔 시절에도 용산에 유곽이 있었지만 전쟁 후 미군이 주둔하며 이태원은 급속하게 변화하였다. 휴전 후 용산에 미군기지가 형성되며 기지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용산기지의 20여개 출입문 주변에서 주점과 판잣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태원이 기지촌의 형태로 클럽과 주거지가 형성된 것은 1950년대 후반부터였다. 현재의 모습과 같은 미국식 클럽들이 이태원 소방서 뒤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태원과 청량리를 통제하는 또 다른 권력 체계는 1960년대 정부의 성매매 대책인 ‘특정지역’ 설정이다. 1961년에 ‘윤락행위 등 방지법’으로 정부가 성매매를 금지하면서도 이듬 해 보건사회부에서는 ‘특정지역’의 성매매를 허용하는, 기형적인 체제를 만들어냈다. 당시 32곳의 미군 기지촌은 모두 특정지역에 포함되었다. 청량리 또한 이 특정지역이 되었다. 청량리에도 전쟁 당시에 미군기지가 잠시 있었다고 하지만 오래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정지역이 된 두 곳에서 성매매의 규모를 비교한다면 1958년 청량리에 성매매 여성이 약 200여명으로 조사되었고, 1962년 이태원, 삼각지, 한남동의 미군 상대 성매매 여성은 900여 명으로 추산된 것으로 보아 기지촌이 형성된 곳에서 성매매가 더욱 많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기지촌, ‘집창촌’으로써 이태원과 청량리가 가장 ‘전성기’였던 1970~80년대에 이곳을 움직이는 힘은 자본과 국가의 콜라보였다. 미군 감축으로 부평에 있던 군속과 기지촌 사람들이 용산으로 오게 되었고, 정부는 기지촌의 유흥업을 조장하였다. 정부가 일본인을 상대로 하는 ‘기생관광’ 또한 장려하며 청량리에서는 외국인 성 구매자를 포함하여 수천 명 단위의 사람들이 성매매와 관련되어 있었다. 외화벌이라는 명분과 실질적인 경제 호황의 영향으로 기지촌과 집결지는 활황을 이루었다.

 

이태원은 유흥지역이면서 국제적인 쇼핑지역이기도 했고, 지금도 여러 국가에서 온 외국인들의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성산업이 위축된 곳에는 저렴한 지대를 찾던 예술가들의 작업장이 생겨났고, 보다 자유로울 수 있는 퀴어 공간이 되었다. 영화 속에서도 이 모습들은 이태원의 새로운 활기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성매매로 지탱되었던 기지촌 이태원과 집결지 청량리는 사라졌다. 화려했던 성산업은 과거의 ‘낙후된’ 산업으로 여겨졌다. 지역의 성산업을 지탱하던 자본은 ‘재개발’로 옮겨갔거나(청량리) 옮겨갈 예정(이태원)이다. 청량리의 쪽방과 유리방은 모두 철거되었고, 이태원의 오래된 미군클럽에는 미군이 없다. 청량리 집결지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사람들은 내몰려서 또 다른 곳의 집결지로 이동했다.

 

이태원의 미래는 어떨까. 올해 용산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을 완료했다. 영화 속 2016년의 ‘그랜드 올 아프리’ 클럽은 이미 허전한 추억의 공간처럼 비친다. 젠트리피케이션의 파고가 이태원에도 닥치면서 이태원을 찾아와서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만들고, 시장을 열며 그림을 그렸던 예술가들도 위태롭게 남아있다. 또한 청량리와 마찬가지로 이태원은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이태원은 “재개발 안 될 거”라는 영화 속 한 여성의 예상 또는 바람은 어긋났다.

 

2019년 10월 지금 기지촌이었던 이태원은 한남3구역이라는 이름으로 대형건설사들이 시공 다툼을 하고 있다. 쏟아지는 기사들에서는 브랜드 아파트단지가 선전되고 가격이 얼마나 고가가 될지 예상하는 내용들뿐이어서 위축된 산업과 오래산 사람들의 이야기는 찾을 수가 없다. 강제 이주로 만들어진 이태원, 그 후 미군기지와 함께 이주해온 어떤 사람들은 다시 원치 않는 강제 이주를 앞두고 있는 셈이다. 개발의 욕망은 이태원에서의 오래된 삶과 역사를 모두 삼킬 듯 폭발하고 있다. 거대한 욕망이 휘황한 미래의 청사진인 것처럼 꾸며지고, 이태원의 사람들은 ‘낙후된’ 과거로 치부되지만 그들은 여전히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아갈 주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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