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꾸지 않은 꿈> 프로그램 관객후기

_레시

 

영화제의 시작이 절망으로 가득한 것이라니, 상당히 낯설고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영화제 마지막 상영작이 무엇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지막이 절망인 것보다는 오히려 희망적인 걸지도 모른다.

영화 속 이야기는 사실 나에게는 거리감이 있는 이야기였다. 누구나 그렇듯 남의 발목이 부러진 것 보다 내 손톱 밑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픈 법이고, 학교를 다니는 나에게는 한 달 벌어먹고 살 과외 아르바이트 마저도 그럴듯한 학점을 유지하며 병행하기에는 고된 일이었다. 피곤하고 힘드니까, 당장 내일을 살아갈 힘이 필요하니까. 그렇게 눈과 귀를 막으며 살아가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빈곤이라는 ‘불행’에 대해 눈 뜨게 되었다. 왜 따옴표를 찍었느냐면, 그것은 절대 불행으로만 치부될 수 없는 것이라 그렇다. 거참 안 된 일이네, 딱하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어 라는 말로는 가릴 수 없는 것이라 그렇다. 영화 속 사람들마저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했으면 내 삶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공순이가 아니라 대학생이, 혹은 평범한 회사원이, 아니 그냥 내가 꿈꾸던 ‘무엇’이 될 수 있었을까. 놀랍게도 이 사회가 그들에게 끊임없이 속삭이던 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네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돼, 그러면 이 지긋지긋한 곳을 탈출할 수 있어, 네가 이렇게 불행한 건 결국 네가 아무것도 안 해서 그래. 그렇게 가슴 깊숙하게 새겨진 목소리는 쉽게 지워지지 않고, 결국 그들의 낯빛에 체념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제서야 내가 아닌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게 내가 겪지 않았다고 해서 문제가 아니지는 않다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배워갔다. 배워도 배워도 끝없는 이야기일 것이라는 걸 알고는 한숨이 나왔고,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이러한 불행과 만났을 때 더 숨막히는 구조가 된다는 걸 체감하고는 절망을 느꼈다. 여성에게 상당히 제한적인 선택지는, 빈곤한 여성에게 더욱 좁아져 이들을 옭아맨다. 성매매 여성과 공순이 사이에서 저울질해야 하는 그들에게 어떠한 보호막도 제공해주지 않는 이 사회에서는 대체 어떤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건지. 진정 여성에게 국가란 없는 것인지. 영화의 행복하지 않은 결말이 마치 보기가 없는 시험에서 정답을 고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씨네토크에서 유나님이 말씀하셨듯, 사실 희망이라는 단어를 선뜻 꺼내기엔 어려운 세상이다. 성매매 현장에서 죽는 여성이 너무 많아 뉴스에도 나오지 않고, 불법촬영물이 난무하지만 아무도 해결하지 않고, 약물강간과 폭행과 성추행이 난무하는 클럽이 아직까지 잘 벌어먹고 사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그래도 철없는 20대 초반인 현재의 나는, 유토피아에서 살아갈 수는 없어도 유토피아를 꿈꿔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영화 속 사람들에게도 절망이 그들 삶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누군가 재채기하는 소리가 우스워서 혹은 지나가는 까마귀 소리가 우스워서 아니면 친구가 실없이 하는 농담이 우스워서. 그렇게 예상치 못한 구석에서 소리 내어 웃듯이, 어이없게도 희망은 어디엔가 있고, 이 세상이 전부 절망으로만 가득 차있지는 않다. 이러한 사회 구조에 눈 뜨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나고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보태지고 점점 커지기 시작하고. 미미한 촛불이 모이면 거대한 횃불이 된다고 그랬던가. 더 친근한 말로는,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도 했다. 세상의 몸집이 너무 커서 움직이기에는 시간이 좀 걸리는 거라고, 그러니 좀 힘들어도 나 그리고 우리가 그 움직임을 재촉해야 한다고. 어쩌면 내 마음대로 이 영화에서 희망을 말해버린 걸지도 모르겠지만, 컴컴한 새벽까지 영화를 본 기억을 더듬고 이 글을 쓰고 세상에 대해 고민하는 이 시간에는 희망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부디 이 글을 읽은 당신에게도 희망을 이야기할 힘이 생기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관련영화

모든 여성의 안위는 위태롭다, 정도의 차이일 뿐.

모든 여성의 안위는 위태롭다, 정도의 차이일 뿐.

<아무도 꾸지 않은 꿈> 프로그램 관객후기 _장비단 여기에 참여하려고 밤새 과제 마감하고 1시간 자고 과외 후 충무로까지 이동했다....

계속 읽기
희망없는 삶에 대한 기록

희망없는 삶에 대한 기록

_빨간거북 양미(여성노동인권교육활동가) ‘벽’ 혹은 ‘시선’ : 7080 ‘어린 여공’과 2012 ‘공순이 언니들’ 그 많은 좌측과 우측을 돌아...

계속 읽기
구미공단에 ‘성차별의 탑’을

구미공단에 ‘성차별의 탑’을

_김주희(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2012년 제작된 홍효은 감독의 다큐멘터리 <아무도 꾸지 않은 꿈>은 구미공단 여성 노동자들이 마주한 2000년대 노동...

계속 읽기
카드뉴스 3. 아무도 꾸지 않은 꿈

카드뉴스 3. 아무도 꾸지 않은 꿈

프로그램 홍보 1. https://e-loom.org/film/아무도-꾸지-않은-꿈-a-dream-forgotten/ “섹션 1 새로운 배치 : 성매매에 대해 말하지 않기” 첫번째 상영작 2019.11.9 토 14:00...

계속 읽기
아무도 꾸지 않은 꿈 A dream Forgotten

아무도 꾸지 않은 꿈 A dream Forgotten

계속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