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김주희(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2012년 제작된 홍효은 감독의 다큐멘터리 <아무도 꾸지 않은 꿈>은 구미공단 여성 노동자들이 마주한 2000년대 노동 현실을 그린 영화이다. 나는 여성 공장노동자들을 떠올릴 때마다 정치학자 김원이 그의 책 『여공 1970』에 소개한 일화 한 토막이 함께 떠오른다. 전 원풍모방 노조부지부장 박순희는 김원과의 인터뷰에서 원풍모방이 한국모방을 인수한 뒤 노량진 공장 굴뚝에 “(주)원풍모방(제1공장)”이라는 글씨를 새겼는데 이때 여성 노동자들이 몰려와서 “왜 [회사가 아니라] 공장이라고 썼냐”며 항의했다는 에피소드를 전했다. 1970년대 ‘공장’이라는 단어는 그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위축시켰다.

 

이들은 “공순이”라는 모멸적 시선을 견디며, 혹은 그것에 맞서며, 노동현장을 지켜야 했다. 그리고 <아무도 꾸지 않은 꿈>의 영어 제목은 “잊혀진 꿈(A Dream Forgotten)”이다. 1970년대 공장을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었던 여공들의 현실은 2000년대 아무도 꿈꾸지 않기에 잊혀진 구미공단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꿈을 통해 반복된다. 여성들은 영화에서 등록금을 벌기 위해, 가족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이혼 후 생계를 위해, 소음을 견디려 귀마개를 하고, 수량을 맞추라고 닦달을 당하며, 오랜 시간 서 있느라 “다리통이 뿐드러지도록” 공장에서 일했다고 말한다.

 

“그 안에 있으면 꿈을 가질 수 없는 것 같아요.”

 

여성들은 공장에 들어간 순간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되어야 했다고 말한다. 기계에 꿈을 묻는 일은 가당치 않을 것이다. 오직 기계를 설치하고 작동시키는 이들만이 자신의 꿈을 드러낸다.

 

구미국가산업1단지 관문인 광평동 삼거리에는 높이 40m의 ‘수출산업의 탑’이 서 있다. 1975년 구미공업단지 수출 1억 달러 돌파 뒤 세워진 이 기념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쓴 휘호가 새겨져 있다. 그로부터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 후발 국가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마침내 산업화를 이룬 민족의 기념비적 장소 구미는 여전히 “우리의 미래”로 칭송되고 있다. 지난 7월 구미에서 열린 “상생형 구미 일자리 투자 협약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이곳 구미시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수출산업의 탑’에는 구미가 한국경제의 성장엔진이라는 자부심이 담겨 있”다며 박정희 귀신을 부르길 서슴지 않는다. 그는 “일본의 수출 규제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핵심소재의 해외 의존도를 줄이는 것이 국가적 과제”이기 때문에 “구미형 일자리가 우리 경제의 새로운 동력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9월, 구미의 반도체기업 KEC에 대해 성차별을 시정하라고 권고했다. KEC의 여성 노동자들은 입사 때부터 남성보다 낮은 직급으로 채용되어 승진에서 배제되고 월급도 절반이었다. 단적으로 KEC 내 20년 이상 경력의 생산직 노동자 108명 중 여성 52명은 전원 사원급이지만, 남성 56명은 전원 관리자급으로 승진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KEC는 “경정비 업무는 설비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있어야 가능하며, 설비 부품을 자주 운반해야 하는데 무겁기 때문에 여성 근로자들이 하기 어렵다”고 답변했다. 여성의 무능력을 태생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체계화하여 노동자들을 통제해온 공업 도시 구미에는 그렇다면 최소 80m의 ‘성차별의 탑’이 세워져야 한다.

 

영화 <아무도 꾸지 않은 꿈>에도 KEC 마크가 눈에 띈다. 직장 폐쇄 철회 투쟁 중인 31세의 허세영은 11년 동안 KEC에서 일했지만 “내 회사인데 내가 못 들어가고 거리에 쫓겨났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KEC 마크가 선명하게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이들은 천막농성장 건너편의 용역깡패들이다. 이들은 캠코더를 들고 채증하며 농성 중인 노동자들의 존재를 불법화하고 있다.

 

이토록 절망적인 도시 구미를 밝히는 불빛은 다름 아니라 각종 유흥업소의 네온사인이다. 인터뷰에 등장한 이들은 ‘여공과 술집 여자 사이’의 근접한 거리에 관해 이야기한다. 나 역시 성매매 산업 연구를 진행하며 업소 종사 여성들에게 생산직 노동, “라인 알바” 경험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다. 한국 근대화 프로젝트의 상징적인 도시 구미는 “한국의 실리콘밸리”라 불리며 재도약을 꿈꾸지만 성산업을 중심으로 여성 기층노동자들과 남성 노동자들의 삶은 극명하게 분기한다. 노량진 굴뚝의 ‘공장’이라는 글자가 유독 원풍모방 여성 노동자들에게 무게감 있게 다가온 것은 이런 맥락일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공단 도시에서의 분기하는 삶의 경험을 외면하지 않고 차분하게 드러낸다.

 

2019년 ‘이룸 영화제’의 제목은 “절망을 감추는 욕망, 욕망을 만드는 도시”이다.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이 개최하는 영화제에서 구미공단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다루는 영화가 상영되는 이유는 아마도 이 도시에서의 일상생활을 여성주의 시각으로 들여다보자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국가와 자본이 여성의 몸을 정의하는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과 산업의 젠더 정치학은 대출 찌라시, 단기방 광고, 유흥업소 간판 등 스쳐 지나가기 쉬운 일상적 도시 경관을 통해 구성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성매매 문제는 상업화된 섹스가 가진 문제를 넘어선다. 그것은 이 체제가 여성을 정의하는 방식, 여성에게 허용하는 사회적 관계가 무엇인지 직시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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