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호]“7년”의 편지


이 기사는 주희(가명)님께서 기고하신 글입니다.


 



그 광고지 몇 장들..



저는 아이들을 유학을 보내놓고 많은 외로움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여동생이 알려준 중국 연락 전화번호를 위안삼아 하루에도 몇 번씩 다이얼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쉽게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며칠에 한 번씩 이따금씩 연결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눈물이 흘러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습니다. 미안함과 그리움과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 경제적 어려움으로 보내긴 했지만 그 역시 해답은 아닌 듯 했습니다. 아이들이 없는 공간 그 역시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손을 놓고만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적지 않은 월세와 하루하루 일수를 찍고 있었습니다. 일수를 며칠만 밀려도 초인종 소리에 민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날을 꼼짝없이 방에 숨어있었는데 한 시간 가량 초인종을 눌러댄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불안하게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던 중 고지서 한 장이 날아왔습니다.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벌금 이백만원을 납부하라는 거였습니다. 청천벽력같은 얘기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광고지 몇 장을 뽑아 가지고 와서 열심히 탐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큰 박스 광고란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쯤 지났는데 제 눈을 사로잡는 글귀가 들어왔습니다. 선불가능숙식제공 이라는 문구와 연락처가 있었습니다.


 


배달하고, 일수찍고, 예쁜 옷도 사 입고



저는 숨도 쉬지 않고 다이얼을 돌렸습니다. 경기도 모 지역에서 일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무조건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분은 저의 집 근처로 오시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분과 저의 집에서 식사를 한 뒤 경기도로 떠났습니다. 가게는 지하이고 꽤 넓었습니다. 벽이 돌로 되어있어 참 시원했습니다. 깨끗했고 주인 언니의 인상은 서글서글하고 손님한텐 참 예의바르게 행동했습니다. 다방을 처음 운영한다 했습니다. 선불금은 몇일 있다 준다기에 그러자고 하고 지하에 있는 숙소로 갔습니다. 숙소에는 20대 초반의 아가씨가 짐을 싸고 있었습니다. 짐이 꽤 많았습니다. 가방으로 5개쯤 되는 것 같았습니다. 보아하니 이 아가씨도 저하고 함께 온 삼촌이 데리고 온 것 같았습니다. 삼촌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주인 언니의 험담도 빼놓지 않고. 저는 이튿날부터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숙소가 지하인데다 모기가 많아 잠을 설쳤더니 몸이 무겁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침 8시부터 가게의 전화벨은 쉼 없이 울려댔습니다. 군청 앞에 위치한 탓인지 배달도 많고 손님들도 점잖았습니다. 아침 8시가 되면 주인아저씨가 카맨으로 등장을 하십니다. 저는 주인아저씨하고 배달을 다니다 아침 11시쯤이 되면 주인언니하고 배달을 다녔습니다. 주로 저 혼자 일을 해야 했습니다. 보자기는 주방이모가 쌓아놓고 비교적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가게였습니다. 오후에는 입금제로 일하고 있는 언니 한분이 출근을 하십니다. 이 언니는 서울에서 왔다했습니다. 이곳이 고향처럼 좋다고 했습니다. 평생 이곳에서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나이는 저보다 두세살 위인 것 같은데 키가 작아 동안으로 보였습니다. 이 언니는 주로 커피말고 냉커피냉 위주로 배달을 갔습니다. 주인 언니와 배달을 가면 먼 곳으로 가는지 한참 있다 오곤 했습니다. 베테랑이라 요령껏 일도 잘 했습니다. 그에 비해 저는 초짜라 재미있기도 하구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수입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예쁜 옷도 사입을 수 있고 밀린 일수도 찍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서울에서의 생활도 모두 잊어버리고 이곳이 좋아졌습니다. 오전과 오후에는 주로 배달을 가고 짬짬이 티켓을 나가고 저녁 8시부터 새벽 2-3시까지는 노래방에서 일을 했습니다. 힘들지만 수입이 생기니 재미있었습니다.


 



 


보면 볼수록, 진한 사랑애가 붙어나는



저는 그러는 사이 가깝게 지내는 오빠가 생겼습니다. 고물상을 운영하는 분이었는데 그냥 이유 없이 좋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랑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 오빠가 저의 힘든 타지 생활을 지탱하게 해준 힘을 줬던 것 같습니다. 이 오빠는 손님과 많이 달랐습니다. 참 편했습니다. 제게 돈이 없어도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오빠였습니다. 휴일이면 개울가에 가서 물장구를 치고 놀았습니다. 무엇보다 운전하는 모습에 반했던 것 같습니다. 돈은 없지만 소탈하고 꾸밈없는 착한 심성이 저를 매료시켰던 것 같습니다. 매일 봐도 지겹지 않았고 보면 볼수록 더 진한 사랑애가 붙어나는 기분 아마도 모를 겁니다. 그 오빠는 재혼이었고 자녀가 4명이나 있었습니다. 여느 남자같으면 가정이 우선이었겠지만 이 오빠는 제가 우선인 듯 했습니다. 저를 만나면 행복해했고 편안해했습니다. 저 또한 편의를 주고자 티켓비를 물지 않는 퇴근 후에 만나 밀애를 즐겼습니다. 제가 힘들어하고 푸념을 늘어놓으면 다 들어주고 말없이 웃고만 있습니다. 저는 이런 그가 좋았고 저희들의 관계는 몇 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아침 8시가 되면 배달이 시작되고 첫 거래처는 문구점이었습니다. 이 거래처는 하루도 빠짐없이 커피 3잔을 시키고 한 잔은 저를 마시라고 배려를 해주십니다. 기분이 좋으면 수첩이나 볼펜 같은 것을 선물로도 주시고요. 하지만 이 손님의 마음잡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중후한 50대 후반의 재력도 있고, 아무튼 참 외로운 분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배달이 들어오면 늘 긴장됐습니다. 커피를 타는 사이 손이라도 만져주면 심장이 멎은 듯 행복했습니다. 문구점은 부인이 운영하고 계셨고 이 분은 군청 근처에서 사무실을 운영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분에 대한 내 감정은 시들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저는 커피 3잔을 쌓아가지고 계단을 올라 그의 사무실로 갔습니다. 하지만 그분 밖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점점 불안해진 저는 침착하게 커피를 탔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커튼을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안경을 벗더니 저를 안으려고 했습니다. 저는 안 되겠다 싶어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무척 바뻤습니다. 그 이후론 그 거래처에서는 커피를 주문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저는 티켓다방의 시작을 아무 의심 없이 돈만 벌면 된다는 생각만 갖고 7년간 계속했습니다. 남은 건 상처뿐. 가족에게도 돌아갈 수 없는 현실. 암담한 미래. 잠자면 잊혀지겠지 하고 잠만 자면서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