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故장자연의 싸인 – 게임은 이제 시작이라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이 말은 죽은 자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자들의 말이다.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죽기 전에 이미 많은 말들을 조금씩 꾸준히 남긴다. 죽음의 원인이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죽는자를 옭아매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죽음의 이유들을 찾아내는 것이 억울한 사회적 타살을 밝혀내는 첫걸음일 것이다.
죽음 이후 2년 만에 다시 떠오른 장자연 사건이 국과수의 필적감정 결과 하나로 너무도 깔끔하게 덮여지고 있지만, 필적감정에만 사건의 진상을 의존할 필요는 없다. 장자연 사건의 중심은 2년 만에 나타난 새로운 편지들이 아니다. 새로운 편지들은 사건을 처음부터 재수사 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여론을 드러냈을 뿐이다. 새로운 편지가 진짜든 가짜든 이미 2년 전에‘진짜’가 있었다는 걸 우리는 잊고 있다. 장자연이 자필로 남긴 그 진짜 편지는 내용증명의 효력이 있는 주민등록번호와 사인, 지장까지 고루 갖추고 있다. 이처럼 증거력이 확고한 정황들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짜 연예인들과 업소언니들이 하는 일이나 겪는 것들이 얼마나 비슷한데


장자연 부활 사건에서도 여전히 장자연은 하나의 도구였을 수도 있다. 장자연 주변 인물들이 등에 업고 있거나 로비하려는 권력층이라던가, 2년 만에 사건을 터뜨린 방송국이라던가, 하는것에만 관심이 쏠려있다. 성과 연결된 모든 사건에서 여성연예인들의 비인권적인 현실에는 왜 주목하지 않는가. 언론은 여성연예인의 피해와 구조적 모순을 다루지 않고, 권력을 유지하거나 얻으려는 남성 권력들의 여성연예인에 대한‘거래’의 사실 여부만을 가지고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다.
장자연 사건에서 사건이 아닌 죽은 장자연을 애도하는 것은 정작 여성들이다. 강남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한 여성은 이에 대해
“오죽하면 업소 언니들한테‘3등 연예인’ 이라는 말을 하겠어요. 진짜 연예인들과 업소언니들이 하는 일이나 겪는 것들이 얼마나 비슷한데요.”라고 말한다. 여성연예인의 활동에서 암묵적으로 용인되고 있는 성적 서비스 또는 성적 노동이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성들이 성접대 제의를 받는 환경은 이미 폭력적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장자연씨 자살 이후 여성 연기자 110명, 여성 연기 지망생 24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에서는, 연기자의 60.2%가 성접대 제의를 받았고, 지망생 또한 29.8%가 성접대 제의를 받았다고 보고되었다. 방송영화공연예술인노동조합의 설문조사도 이와 흡사하다. 많은 사람들은‘성접대 제의를 받았다 하더라도 거부하면 그만이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성이 아닌 그 어떤집단이 성접대 제의를 이토록 빈번하게 받았을까. 여성들이 성접대 제의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환경은 이미 폭력적이다. 여성에게 몸이 유일한 자원인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상납 제의를 뿌리치지 못한 여성들의 행동을 자발적인 행위로 포장하여 성상납, 성접대라 부를 일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부르다 보면 성을 자원으로 활용한 모든 결과를 여성에게 짐 지우고 낙인찍는것이 당연시된다. 그 먹이사슬에 적응해서라도 매장당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여성들을 두고 굳이 정당하지 않은 욕망이나 타락이라 이름 붙이고 손가락질 하는 것은 사회적‘차별’이다. 남성 중심의 문화에 팽배하게 자리잡은 성폭력적인 인식과 행태를 가리기 위해‘눈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다. 여성 연예인들에게 성상납 제의를 하고 그것을 수수, 매매한 권력들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인신매매, 성폭력이라고 불러야 아귀가 들어맞지
않을까.


 


여성연예인 서포터즈‘침묵을 깨는 아름다운 사람들’출범


‘여성이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그만큼 내적인 힘이 없어서’라고 하며 죽은자를 탓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힘없이 죽어갈 수밖에 없으면서도 마지막 힘을 내어 말하려고 했던 것에 귀 기울일 때다.
피해를 인정받지 못한 한 여성의 죽음 앞에서, 아무런 보상도, 위로도, 진상규명도 없는 상태이다. 정말 아득해진다. 같은 일이 줄기차게 이어질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여성의 죽음을 잊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 공적 기관에는 신고되
지 않는 여성연예인 성폭력 실태가‘침묵아사’(여성연예인 서포터즈‘침묵을 깨는 아름다운 사람들’) 활동을 통해 접수되고 지원되고 있다. 목소리 내고 싶은 여성들이 있고 이를 지원하려 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 목소리를 확장시키려는 작은 언론이라도 있으니 지속적으로 싸워봄직하다.



(故장자연님과 여성폭력으로 죽어간 수많은 여성들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