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18 [“페이드 포 PAID FOR : 성매매를 지나온 나의 여정” 북토크] 후기 3. 터울

드디어 페이드포 북토크의 마지막, 세 번째 후기가 도착했습니다!

이번 후기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터울님이 적어주셨어요.  맞아, 이런 얘기도 있었지! 하며 읽고

아 터울님은 이런 연결선상에서 성매매를 고민하는구나, 하며 읽었습니다. 다른 분들도 후기를 읽으며  10월 18일 페이드 포 북토크로 잠시 이동해보아요.

<페이드포> 북토크 후기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 터울

 

2019년 10월 19일, <페이드 포 : 성매매를 지나온 나의 여정>의 북토크가 개최되었다. 성매매 경험 당사자인 레이첼 모랜이 자신의 성매매 경험을 풀어놓은 이 책은, 당사자만이 경험하고 기술할 수 있는 현장의 이야기와 더불어, 그 현장 위에 도사리고 있는 성산업과 젠더 억압의 구조 양자 모두를 놓치지 않고 포착해낸 드문 저작이다. 다만 이 책이 아일랜드의 성산업과 성매매 경험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번 북토크에서는 책의 내용과 비교하여 한국의 성산업과 성매매 관행이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을 갖는지에 대해 집중했다. 패널로는 여성학자 정희진 선생님과 김주희 선생님, 이루머인 별님께서 참석해주셨고, 장내는 자리를 가득 채운 청중들의 열기로 가득했다.

 

먼저 아일랜드와 한국 공히 별반 차이가 없다고 평가되었던 것들 중 인상깊었던 건 다음과 같았다. 성매매 여성 입장에서, 성구매자 남성들 중 성적 취향이 스스로 ‘변태적’이라고 밝힌 사람들이 차라리 대하기 쉬웠고, 자신의 성욕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하는 성구매자 남성일 때 오히려 예기치 못한 다양한 폭력과 ‘변태적’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대목이다. 이것이야말로 젠더 기반 폭력(GBV)의 가해가 어떤 특수한 남성의 사례가 아니라,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한 제도적 남성성이 발현된 결과라는 증거 중 하나다.

 

이에 대해 정희진 선생님께서는, 성구매자 남성 뿐만 아니라 가정폭력, 성폭력 가해 남성의 경우에도 겉보기엔 너무나 멀쩡한, 소위 ‘일반적인’ 남성일 때가 많다고 덧붙이셨다. 실제로 성폭력 가해 남성의 서사 또한, 피해자에게 딱히 해코지하려는 생각이 있었다기보다, “남자라면 으레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했고, 그게 자연스럽다고 여겨서”라는 식이 많다. 이는 성매매를 비롯한 젠더 기반 폭력을 특수한 사례로 치부하고 잊어버릴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성욕’의 얼굴을 한 제도적 남성성에 대해 사회구성원들, 특히 남성들이 스스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환기한다.

 

물론 젠더 기반 폭력이 제도적 남성성의 구조로 인해 발생한다는 것과, 모든 남성들이 젠더 기반 폭력의 가해자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계급, 인종 등 모든 구조가 그렇듯이 가부장제 또한 개인의 행위를 전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아니고, 페미니즘에 대한 세간의 오해 또한 이렇게 구조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갖는 데서 출발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최근의 미투 운동을 겪어오면서, 모든 남성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성폭력 가해 남성만큼은, 가해가 발생한 그 순간 가부장제가 제공한 ‘일반적인 성욕’의 교범에 빙의된 ‘제도적 남성’으로 평가할 수 있고, 그의 행위가 그 자체로 범죄라는 합의는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 이 책은, 성구매자 (이성애)남성 또한 그 ‘제도적 남성’의 목록에 추가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말하고 있다.

 

다음으로 아일랜드와 한국의 사례 가운데 차이점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에 대해 정희진 선생님과 김주희 선생님께서 정리해주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양에서 구성된 남성공동체와 동성사회성(homosociality)이 동등한 남성끼리의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거나 희화화하거나 실제로 ‘교환’하는)연대를 전제로 했다면, 한국은 여기에 미국(일본) 남성과 한국 남성의 위계가 추가되는 점이 서로 구분된다. 즉 동등한 남성이 아니라 외국 남성에게 뇌물(접대)를 주는 한국 남성의 구도가 자리잡고, 그 접대의 도구로 한국 여성들이 활동되는 방식이다. 이를 ‘식민지 남성성(colonial masculinity)’으로 개념화할 수 있는데,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외교매춘, 사업매춘, 기생관광으로 이어지는 밀실 성매매의 관행으로 반복되어왔고, 최근의 버닝썬 사태에서도 똑같은 형태로 재현되었다는 것이다.

 

 

이날 북토크에는 다행히(?) 나 말고도 몇 명의 남성들이 더 있었다. 그 중에 게이인 남성은 아마도 더 드물었을 것이다. 반성매매 단체의 행사에 참석하는 게이의 입장으로서, 이런 자리에 올 때마다 느끼는 소회가 있다. 본래 이 이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스스로 대단히 꺠어있거나 PC해서가 아니라, 내가 속한 게이/퀴어 커뮤니티를 직업상 바깥 세상에 설명하다보니 젠더·섹슈얼리티 체계를 다루는 페미니즘을 경유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의 남성 권력와 이성애중심주의와 시스젠더 권력은 대부분의 경우 서로 동시에 작동하고, 최근의 퀴어·페미 관련 논쟁들은 저 구도에 대해 보다 통합적인 설명이 필요하다는 증거에 가깝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또 이 북토크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던 것은, ‘피해에 대한 공론’과 ‘프라이드’가 서로 양극단의 항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마치 전자는 여성운동, 후자는 퀴어운동의 전략으로 일반화되는 경향이 있고, 이는 여성운동이 피해의식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퀴어운동은 팔자가 편한 자들의 놀이라는 편견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퀴어문화축제에서 얼굴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운동이 된다는 것은 그 이면에 이성애·이원 젠더 규범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막대한 ‘피해’가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동시에 여성단체들을 만난 내담자 여성이 자신의 경험을 ‘피해’로 직면하고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한 후에 경험하는 자력화를 ‘프라이드’라 부르지 못할 까닭이 없다.

 

이 책이 뜻깊었던 것은, 수많은 질곡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자신의 성매매 경험을 구조와 함께 응시해내고, 그럼으로써 이렇게 자신을 드러낼 만큼 과거의 자신과 화해할 수 있었던 저자의 ‘프라이드’가 행간에 묻어났기 때문이다. 내 고통의 까닭을 알게 된 뒤에 짓는 환한 웃음과 그로부터 배어나는 한 인간의 존엄함에 대해, 이 날 북토크는 온 마음으로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존엄을 얻기 어려웠던 사람이 존엄을 되찾을 때, 인권의 원의 또한 그 자리에서 오롯해진다. 귀한 자리에 초대받게 되어 무척 기쁘고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