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칼럼]무기력과 함께 하는 겨울밤_유나

무기력과 함께 하는 겨울밤
 
날이 추우니 움직이지 않는다. 밤이 길어지니 방에만 있다. 배는 자주 고픈데 누구를 만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내내 혼자 밥을 먹자니 맛도 없고 기운도 없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니 뻐근한데 밖에 나갈 생각만 해도 손이 오싹하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까 싶지만 나를 자극시키지 않고 머리 아프게 하지 않으며 세상의 편견을 덜 반영한 것들을 찾다보면 볼 만한 게 없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자리는 머리에 떠올리기만 해도 피곤하고 한두 명만 만나자니 그럴 만큼 편한 사람은 또 한 줌이다. 친구와 통화나 할까 하다가 그 친구 바쁘고 옆에 남편이나 애인이 있을 거란 생각에 핸드폰만 들여다본다. 이런 맘을 잠에 흘려보냈는데 밤이 계속 길어져 잠만으로 시간을 채울 수 없는 지경이다.
 
근래 내 상태이다. 무기력의 집합소랄까. 내 이야기를 들은 활동가 모씨는 이 모든 것이 성매매 상담소에서 일하면 생기는 후유증이라 한다. 하지만 sns를 보고 다른 이들 얘기를 듣다보면 이건 꼭 성매매 상담소에서 일하지 않더라도 빠지게 되는 상태인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또 누군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농경사회에 익숙해진 인간의 몸은 일이 없던 겨울이면 몸을 쉬고 달래며 살찌웠던 그 때를 따라간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이 무기력은 내 몸 원하는 대로 뒹굴 거리지 못하여 생긴 후유증?!
 
후유증을 없애려면 겨울 내내 쉬어야 할 텐데 그건 밥 벌어 나를 먹여야 하는 내 손 밖의 일이니 이를 없애는 대신 살살 달래려 한다. 그렇게 수집한 ‘겨울밤 무기력 달래는 방법’은 웹툰, 간식, 예능프로 세 가지로 정리된다. 최대한 단순하게 보고 웃을 수 있는 것들로만 추려 모아 밤을 보낸다.
 
이불 속 내 친구 웹툰. 점점 보는 웹툰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웹툰을 접하는 홈페이지도 다양해진다. 요즘에는 묘진전, 딩뚱땡, 어쿠스틱라이프, 오무라이스잼잼, 뽀짜툰, 셋이서 쑥, 마조앤새디, 아랫집 시누이, 모두에게 완자가, 아이들은 즐겁다, 용이 산다, 복사골 여고 연극부까지… 헥헥… ‘챙겨’ 본다. 가끔 놓친 건 없나 완결 웹툰도 뒤적뒤적.
 
그리곤 밤에 먹을 간식으로 고구마를 미니 오븐에 넣은 뒤 밀린 예능을 본다. 최근에 새로 발굴한 예능 프로는 ‘우리 동네 예체능 농구편’과 ‘만두명가’이다. ‘우리 동네 예체능 농구편’을 보다보면 슬램덩크에 자연스럽게 손이 간다. 오호라, 긴 밤을 보낼 아이템이 하나 더 느는군! ‘만두명가’는 나를 배고프게 하며 끊임없이 PPL이 등장한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이 단점은 먹음직스런 만두들의 자태를 감상하고, 침이 흐를 때 즈음 그 만두집을 검색하여 어디인지 찾아보는 즐거움을 이길 수 없다. 그리고는 혼자 내 꼭 저 곳들을 둘러보며 만두로 포식하겠다는 꿈으로 설렌다. 몇 회 남지 않은 관계로 ‘더 지니어스-룰 브레이커’를 다음 타자로 찜했다.
 
이런 것들을 하며 밥도 먹고 제자리를 걷는다. 청소를 하고 빨래를 개킨다. 이것이 모두 상담소 활동의 후유증이라던 활동가 모씨의 지도편달에 따라 퀼트도 배우기로 했다. 웹툰도, 예능도 한계치에 다다랐을 때 혼자 퀼트를 하며 무념무상에 빠지는 것을 지향한다.
 
원래 나는 이런 무기력이 오는 게 무서워 빨리 내쫓고 싶었다. 퇴근 후 집회에 가지 않고 사람을 만나지 않는 내가 미워 괴로웠다. 연대가 필요한 사람들의 소식을 차단해버리고 텅 빈 저녁을 보내려는 욕구를 어떻게 봐야할지 헷갈렸다. 나를 미워하고 합리화하는 일을 반복하다 일단 무기력과 함께 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직은 괜찮다. 이 무기력이 잘 달래지면, 아니 밤이 다시 짧아지면 또 어떻게든 밖을 나다니겠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