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촌, 지워지는 역사를 페미니즘적으로 균열내고 기억하며 개입하기 답사 후기_세 번째]
유족 없는 폐허에서 ‘유족 되기’ 실천으로
김주희(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이사, 덕성여대 교수)
2026년 5월 23일,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과 역사문제연구소, 두레방이 공동 기획한 <기지촌, 지워지는 역사를 페미니즘적으로 균열내고 기억하며 개입하기> 답사에 함께했다. 공고와 동시에 빠르게 신청이 마감되었다는 소식에, 서둘러 신청서를 제출해 다행이라 생각했다. 다양한 배경의 참가자들이 저마다 이 답사에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을 들으면서 기지촌 역사를 경유하는 여성주의적 관심과 문제의식이 얼마나 다채롭게 확장될 수 있는지 새삼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 이번 여정은 서명과 모금으로만 보태던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 저지’의 현장에 뒤늦게 당도한 일이었고, 십수 년 전 활동과 조사차 경기 북부 기지촌을 오가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일이기도 했다.
동두천 성병관리소를 시작으로 보산동, 상패동, 캠프 호비, 빼뻘 마을을 거쳐 의정부 역사(驛舍)까지 이어지는 숨 가쁜 여정이었다. 으레 1박 2일은 걸릴 법한 밀도의 장소들을 주최측의 준비와 연구자, 활동가들의 탄탄한 해설 덕분에 한나절에 돌파할 수 있었다. 지면의 한계상, 이 글에서는 그날의 단편적 인상과 감각을 소식지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동두천 성병관리소를 마주했을 때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국군광주병원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엉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국군광주병원은 계엄군에 의해 부상당한 시민들이 치료받던 장소로, 내가 수년 전 방문할 당시 의료기기와 폐자재가 뒤섞인 채 방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두 폐허는 2026년 현재 전혀 다른 운명을 살고 있다. 2024년 국군광주병원은 역사공원으로 조성되어 공적 기억의 영토로 편입되었지만, 동두천 성병관리소는 500일이 넘는 지금도 철거 반대 운동이 계속 진행 중이다. 무엇이 이 격차를 만들어 내는지, 답사는 이 질문과 함께 시작되었다.
정희진은 한국 기지촌 여성운동사에 관한 글에서, 기지촌이 성매매 현장 내부에서도 가장 천시되었기 때문에 과거 그곳에서 여성운동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기록한다. 이러한 척박한 환경에서도 2022년 기지촌 여성운동은 미군 ‘위안부’ 피해에 대해 정부 책임이라는 역사적 심판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국가 권력은 법이 정한 최소한의 배상 책임만 이행할 뿐, 기지촌의 역사를 현재와 무관한 ‘과거의 사건’으로 남겨두면 그만이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기지촌은 결국 이 도시의 안보와 자본이 어떤 동원과 배제를 통해 유지되는지 질문하는 현재 진행형의 현장이기도 하다.
천과 가림막으로 둘러싸인 채 내부 출입이 통제된 성병관리소 건물은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유용성’이 다한 시간을 상징하는 듯 보였다. 현장에서 철거 저지 공대위 집행위원장의 설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건물 내부에 쌓인 쓰레기 더미를 “내가 직접 청소했다”는 것이었다. 정부와 지자체가 철저히 방치한 공간은 활동가들의 돌봄으로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다. 이들에 의한 기억 인양의 실천이 계속되고 있지만, 여전히 동두천 성병관리소 건물은 공적 기억의 장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이어진 답사의 현장들은 ‘지워져야 마땅한 역사’를 증명하듯 기억의 장소로 구획조차 되지 못한 상태였다. 문 앞에 집기가 잔뜩 쌓인 낡은 집 앞을 지나면서, 이곳이 故윤금이 씨의 살해 사건 현장이었다는 설명을 듣는 식이었다. 많이 알려졌듯이, 당시 사건 현장을 신고하고 가해자 마클을 붙잡아 경찰에 넘긴 기지촌 동료 여성은 이후 행방불명되었다. 이처럼 기지촌의 역사는 우리가 무엇을 알지 못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거대한 공백들이 산재해 있다. 답사에서 만난 무연고 기지촌 여성의 무덤은 이러한 알 수 없는 공백을 집약적으로 상징한다.
상패동 공동묘지에 방문했는데 이 공동묘지는 분묘 1007기가 모두 이전을 완료한 상태로 공원화가 진행 중이었다. 이 중 무연분묘는 780기였다고 하니, 이곳은 유족 없는 이들의 공동묘지의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 공동묘지에는 많은 기지촌 여성들이 안장되었으며, 故윤금이 씨 역시 화장 후 이 묘지에 뿌려졌다고 한다. 답사 주최측에서 나누어준 자료집에는 미군에 살해된 여성의 장례식 대오 모습, 기지촌 여성들이 동료 여성의 상여를 멘 채 데모를 벌인 일화 등이 기록된 소설, 신문 기사가 인용되어 있다. 그럼에도 동두천시는 상패동 공동묘지 분묘 중 기지촌 여성 관련 자료는 ‘부존재한다’는 답변을 내놓았다고 한다.
이러한 전략적 기만, 제도적 망각은 동료의 죽음에 항의하던 기지촌 여성들, 즉 서로의 유족을 자처하던 ‘동료 목격자들’의 존재 또한 지우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가부장적 혈연관계가 단순히 혈통에 대한 기록을 넘어 여성에게 규범과 자격을 요구하는 성적 장치라는 점을 떠올리면, 이들은 생전의 가족이 있었음에도 사후에 유족 없는 이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유족 없음’의 필연성이야말로 기지촌이 유지되어 온 본질적인 성적 통제 기제였다. 내가 만났던 이태원 기지촌 여성들 역시 엄연히 원가족이 존재했지만, 이들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워 차마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조차 집안에 알리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생전에 가족을 부양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삶을 숨겨야 하는 여성들의 고립은 결국 사후 무연분묘의 수치로만 기록되고 있다.
답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소로 기억되었던 ‘박순자의 묘’ 역시 마찬가지다. 미군기지를 내려다보는, 캠프 호비 답장 옆에 있는 박순자의 묘는 사실상 상상으로만 채워진, 무엇의 흔적인지도 알 수 없는 장소다. 자료집에 따르면 1971년 사망한 박순자(SOON JA RAYNOLDS)의 봉분은 2010년 무렵 미국식 평장으로 바뀌었고, 묘비에는 영어로 “내 사랑 평화롭게 쉬기를”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누가 이렇게 묘지를 관리했는지 관리자를 찾는 플래카드에도 끝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 장소에 관한 서사의 전부다. 주변 산자락에도 미군기지를 바라보는 이름 없는 무덤들이 가득하다고 한다. 기지촌의 역사는 현재 남은 무연고 묘지로 기억되고 있었다.
남은 것은 아마도 기지촌 여성이었을 박순자라는 이름, 그리고 그를 그리워했을 미군의 흔적뿐이다. 사적인 애도의 기억으로만 지탱되는 박순자의 묘비는 그 자체로 한미동맹의 명료한 서사에 맞서는 하나의 ‘대항기념비(counter-monument)’라 할 수 있다. 비어 있음과 파편성으로 가득한 이 기지촌의 폐허는 잔해의 물질성을 통해 그곳에서 삭제된 역사를 증명한다. 다만, 이러한 잔해의 미학에만 몰두할 때 현실의 철저한 방치와 그로 인한 역사의 소멸을 지나치게 낭만화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점 또한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어 답사자들은 빼뻘 마을로 향했다. 캠프 스탠리 경계를 따라 자리 잡은 빼뻘 마을은 경기 북부의 대표적 기지촌 지역이자, 기지촌 여성운동의 거점이었던 두레방의 역사가 새겨진 장소다. 2000년대 초반의 분주하던 빼뻘 마을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마주한 마을의 쇠락한 풍경, 생각보다 훨씬 좁은 골목의 적막함에 잠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과거 이태원 기지촌 활동 당시, 여성들은 미군 훈련병들이 탄 배가 들어올 때를 두고 “배가 터졌다”며 부산으로 향하곤 했다. 부산 해군기지에 미 군함이 정박하면 미군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는 의미였는데, 이 “배가 터졌다”는 말은 아직까지도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다. 해설을 맡은 활동가가 빼뻘의 쓸쓸한 골목을 가리키며 “이곳으로 퇴근길 미군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고 설명하는 순간, 과거 이태원 여성이 한 말이 겹쳐졌다. 또 활동가는 물길이 보이지 않는 좁은 골목을 가리키며 이곳이 과거 빨래터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군 부대의 수영장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면 여성들은 그곳에서 빨래를 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적막만 남은 이 쇠락한 골목들은, 한때 미국발 안보 자본이 뿜어내는 ‘풍요’가 우르르 쏟아져 나오던 파이프라인이었다. 또한 골목을 가득 메운 기지촌 여성들의 몸 역시 안보 경제를 작동시키는 핵심 인프라 그 자체였다.
함께 걷고, 멈춰 서서 듣고, 지워져 가는 현장을 눈으로 목격하는 이러한 기지촌 답사의 과정을 통해 안보와 현실의 ‘번영’이 누구의 몸을 물적 토대 삼아 지탱되어 왔는지 그려볼 수 있었다. 국가가 마땅히 책임져야 할 복지나 재분배, 일자리 같은 사회적 인프라가 부재한 자리에, 가난한 여성들의 몸을 대신 배치하여 지역 생존을 지탱하게 만든 역사는 우리가 기억을 통해 구획하고자 한 기지촌의 경계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여성들을 자원의 여과기와 순환 통로로만 소모한 채 무연고 묘지에 폐기한 이 한 편의 부조리극은 기지촌의 기억이 왜 페미니즘 운동의 핵심 의제여야 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답사의 마지막 순서로 의정부 역사에서 두레방 대표와 이룸 활동가의 발제로 간담회가 진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무연고 묘지와 상여를 메던 기지촌 여성들의 저항을 목격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부장적 혈연의 범주를 넘어 페미니스트로서 여성들의 ‘유족이 되는’ 운동이라는 발언을 했다. 또한 이룸의 활동가는 이번 답사를 통해 성매매 집결지 여성들의 국가 배상 소송도 가능할지 새로운 그림을 그려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어진 대화에서 우리는 집결지 여성과 미군 ‘위안부’는 ‘다르다’는 발언을 마주하게 되었다.
시간적 한계로 깊은 토론을 나누지 못한 면이 있고, 우리 모두가 처한 실천의 맥락도 다르다. 실제로 소송에 참여한 122명의 원고가 증명해야 했던 폭력은 국가와 미군 당국의 조직적인 성병 관리와 감금이라는 고유한 특수성을 지니며, 오랜 시간 현장을 지켜온 이들에게는 이 제도적 피해를 선명히 규정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피해의 위계를 떠올리지 않을 도리가 없는 이러한 ‘다르다’는 선긋기는 가부장적 국가가 기지촌 여성들에게 가했던 자격 박탈과 고립의 메커니즘을 운동 내부에서 재현할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기지촌 여성운동은 국가가 방기한 생존의 하부 구조를 스스로 만들며 싸워온 주체들의 활동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목격한 그 하부 구조의 잔해들은 국가와 자본이 여성의 몸을 안보 경제의 도구로 탈취해 온 정치경제학적 구조 그 자체를 폭로하고 있었다. 따라서 특정 피해자 집단을 성역화하는 일에 멈추지 않고, 분리의 언어를 넘어, 여성의 신체를 도구화해 온 거대한 추출의 구조를 직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여성주의 기억의 정치가 우리에게 남기는 날카로운 질문이자, 혈연 중심의 유족 정치에 매몰되어 있던 당사자 정치의 좁은 틀을 깨고 나아갈 새로운 연대의 출발점일 것이다.
[참고자료]
정희진 “죽어야 사는 여성들의 인권” 한국 기지촌여성운동사, 1986-98″ , <한국여성인권운동사>,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엮음, 한울, 1999, 301쪽.